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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11: 포화 속에서 시작된 군 사목

117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4-05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1) 포화 속에서 시작된 군 사목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전장 속 병사들의 신앙 돌보다

 

 

1950년 9월 7일 유엔군 묘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외국인 군종 신부와 신자들. 한국인 군종 신부들도 포탄이 떨어지는 전방에 찾아가 군인 신자들을 사목했다. 출처=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가톨릭교회는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했다. 교회는 “형제를 살상하는 비극적 전란의 원인은 악하고 무서운 악마적 사상인 오직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에 있다”고 천명했다. 노기남 주교는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는 동시에, 이 사상의 박멸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촉구했다.(천주교 회보 1950.11.10)

 

이후 교회는 한국전쟁을 반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전쟁,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여하라고 독려한다.

 

 

공산군에 맞서 일어서다

 

한국전쟁 동안 대구와 부산의 거리는 전선에서 후송돼 오는 부상병을 실은 차량과 상이군인, 피란민들로 큰 혼잡을 이뤘다. 당시 부산역 광장에는 연일 구국 결사항쟁을 부르짖는 군중집회가 열렸다.

 

교회의 젊은 층도 구국 결사에 뜻을 같이했다. 1950년 8월 중순 부산 범일동성당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던 김동한ㆍ허창덕 외 10명의 신부는 젊은 신부들과 신학생, 교우 청년 3000명을 규합해 1개 연대 규모의 ‘가톨릭 청년 결사대’ 결성을 은밀하게 추진한다. 이 계획은 황헌친 준장의 지지를 얻어 국방장관을 경유,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다. 그러나 현역 군인에게도 충분한 무기를 공급할 수 없다는 정부 측 설명으로 좌절되고 만다.

 

계획이 틀어지자 부산 부평동 합숙소에 있던 신부들은 봉사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해 병원 등에서 활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신부 15명, 신학생 30명, 수녀 70여 명이 제3, 5, 31 육군병원 등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선교 효과도 컸다. 임종자 대세와 신앙상담, 그리고 병원에서 세례받는 이들 숫자도 해마다 늘었다.

 

 

전장으로 간 신자 청년들

 

매일 수많은 청년이 전쟁터로 가야 했다. 징집 나이에 해당하는 젊은 신학생과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학순, 김창렬, 김옥균 등 30여 명의 신학생이 1950년 9월 12일 부산에 있는 육군본부를 찾아가 자원입대했다. 신학생들은 1개월간 훈련을 받은 후 유엔군 산하 미 제2보병 사단, 제1기갑사단 등에 카투사 행정병으로 근무했다.

 

지학순 주교는 입대 당시 28세였다. “나 같은 사람은 만 28세의 노장 신병이었는데 동작이 느리다고 줄곧 야단하니 못 견딜 노릇이었다.… 또 군인이라면 총기 취급 방법도 좀 배워야 할 텐데 총이라고는 구경도, 본 일도 없었다. 우리는 사무 볼 군인이라고 해서 그랬지만, 나중에 일선에 가서 적에게 포위됐을 때는 총 한 방 못 쏴 본 군인이라 정말 혼났다.”(「내가 겪은 공산주의」 중에서)

 

그는 진주와 전주, 평양 등을 오가며 동료들의 죽음과 전쟁으로 인해 드러난 인간의 어두운 면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동료 전사자의 집에 가 사망 통지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솟구쳐 나오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고 회고한다.

 

신학생 지학순은 1952년 부상으로 제대 후 같은 해 사제품을 받고 1965년 초대 원주교구장 주교로 사목하며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인권 증진과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헌신했다.

 

북녘에서도 공산군에 맞서 신앙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황해도 장연본당 신윤철 신부의 권유로 오병현 등 청년 신자 20명은 1950년 4월 말부터 북한군의 징집을 피해 구월산에 은신했다. 그해 6월 24일 신 신부가 체포되자 ‘가톨릭 십자군 유격대’를 조직하고 항쟁을 전개한다. 9월 말에는 120명의 부대원을 확보, 유격 활동을 벌이며 유엔군 입성 전인 10월 17일 장연읍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신자들로 치안서장, 면장 등을 선출한 후 치안과 행정을 펴나가는 한편, 북으로 후퇴하는 노동당 간부나 인민군 패잔병 소탕 작전을 펼쳤다. 이후 국군 장교가 지휘하는 부대에 편입돼 구월산 일대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했다.

 

1953년 4월 4일 제3 육군병원 간호 장교 영세 기념 사진. 출처=「천주교 군종교구사」.

 

 

한국 가톨릭 군 사목 태동

 

우리나라의 군종 제도는 정부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직자들의 종군 필요성을 느낀 각 종단의 거듭된 요청으로 시작됐다. 정부와 종교계는 군종 제도 도입 방법을 논의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군종 제도 설치를 국방부에 지시했다.

 

육군은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를 설치하고 각 종단에 군종 후보생을 모집했다. 이에 가톨릭에서는 1951년 2월 28일 11명의 신부가 개신교 목사들과 함께 제1기 육군 군종으로 입대했다. 이들은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무보수 촉탁 문관 신분으로 임관되어 전후방의 각 부대에서 신자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게 됐다. 육군과 해군 군종으로 신부들이 추가 입대해 1951년 한 해 동안 22명의 군종신부가 탄생했다.

 

전방에서 활동하는 군종신부들은 늘 어려움을 겪었다. 군종 업무에 대한 군의 인식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지휘관들조차 군종신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가톨릭 신부를 처음 만나는 병사들도 많았다. 초기에 군종들은 모자에 하얀색 십자가 배지를 달았고, 신부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자 로만 칼라를 했다. 로만 칼라를 착용하지 않으면 위생병 혹은 비행대원이나 목사로 알고 신자들이 나서지 않았다.

 

전장에서 사제의 만남은 신자 병사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선물이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최전방 벙커에 도착하면 신자 군인들이 ‘신부님이 적진 150m 최전방 고지까지 오실 줄을 몰랐습니다’ 하며 감격의 눈물마저 흘렸다. 그들은 벙커에서 기어 나와 입대 이후 밀렸던 고해성사를 보았다. …열흘간의 예하 부대 순방 일정을 마치고 사단 본부 천막 성당 숙소에 돌아오면 병사들에게 옮아 번식할 대로 번식한 보리알같이 새하얀 서캐 잡기에 한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그럼에도 보람찬 마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천주교 군종교구사」 중 육군 군종 제2기 박희봉 신부 증언)

 

1952년부터 1953년까지 2년 동안은 성직자 외에도 많은 신학생과 전교 회장이 군종으로 입대했다. 육군에서 필요로 하는 군종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군종으로 입대한 이들은 각 군과 포로수용소에서 군 복음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군종신부 전교사업후원회’가 결성돼 군종 신부들의 활동에 힘을 실어줬다.

 

휴전 후 가톨릭 군종 활동은 지속성을 상실한 채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제대 군종신부는 속출했지만 새 입대자가 없었던 까닭이다. 1958년 2월 군종신부단 창단과 군종교구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대두되며 1989년 10월 23일 한국 군종교구 설정이라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군사목을 시작한 지 39년, 군종단이 창설된 지 29년 만에 일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5일, 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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