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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근현대 진잠의 천주교

114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27

근현대 진잠의 천주교*



국문초록

 

이 글은 충청남도와 대전시의 접경에 위치한 근현대 진잠지역의 천주교에 관한 연구이다.

 

조선 후기 박해 속에서 성장한 진잠의 천주교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개항으로 말미암아 정부 주도의 박해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에 위치한 진잠지역의 박해는 여전하여 1900년에는 진잠의 지방 관리들과 양반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였으며, 1903년에는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신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런 가운데에도 신자들은 진잠지역에 뿌리를 내려 되재본당에 속한 공소를 형성하였다.

 

진잠지역은 과거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했고, 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라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전시와 충청도의 접경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잠지역은 천주교의 관할 구역 안에서도 여러 차례 변동을 겪었다. 1920년까지는 되재본당의 관할이었고, 1921년 논산본당이 설립되자 그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 후에는 대전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6.25전쟁 후 신자들이 증가하자 1950년대 후반에는 진잠지역의 중심에 진잠공소가 생겨났다. 이 공소는 대전시의 발전과 함께 점차 성장하여 2001년에 ‘진잠본당’으로 승격하였다. 진잠본당은 조선시대부터 진잠지역에 이어져 온 신앙 역사를 계승하기 위해 1866년에 순교한 한재권(요셉)과 정원지(베드로) 성인을 본당의 주보로 정하였다. 진잠에서 태어난 두 순교자는 1984년 성인품에 오른 분들로 진잠의 천주교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이를 통해 진잠본당은 조선시대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신앙의 역사를 상징하는 공동체로서 과거와 단절 없이 신앙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Ⅰ. 머리말

 

조선 후기 서울에서 중국 북경을 오가는 사행길을 따라 평화롭게 수용된 천주교는 1791년 제사문제로 촉발된 진산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은 보다 나은 신앙생활을 위해 산골짜기나 오지로 삶의 자리를 옮겼는데, 그런 지역 대부분은 행정기관이나 군사시설이 있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접경에 위치하였다. 그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을 이루는 금산, 논산, 고산의 산간지대는 내포지방과 호남을 비롯한 전국의 신자들이 피난하여 하나의 권역을 이룬 거대한 신앙공동체였다. 진잠지역은 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역사를 함께 해왔다.

 

진잠에 천주교가 처음 전해진 시기는 조선시대에 전라도 땅이었던 진산의 유생 윤지충이 신앙을 받아들인 1787년에서 멀지 않다. 진잠에 인접한 충남 연산과 은진에 신자들이 이미 거주하였고,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이 은진에 천주교를 전한 기록이 나오므로 그 무렵에 진잠에 천주교가 전해졌으리라 추정된다. 이렇게 시작된 진잠의 천주교는 조선 후기 내내 옹기 굽는 신자들의 교우촌으로서, 그리고 박해받는 신자들의 피난처의 역할을 하며 신앙 여정을 이어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고, 내부의 모순과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급변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전쟁,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접경지대에 위치한 진잠지역도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진잠은 거주민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중앙의 논리에 의해 행정구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고, 대전시의 성장에 따라 각각 다른 구(區)와 동(洞)에 편입되고 나뉘기를 거듭했다. 이는 한국의 행정체계에서뿐만 아니라 천주교회 체제 안에서도 그러하여 교구가 나뉘고, 본당이 새로 설립될 때마다 계속해서 관할이 변경되었다.

 

천주교 역사 안에서 진잠지역은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않아 최근까지 독립적으로 연구된 바 없었다. 인접한 진산에서처럼 눈에 띄는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아니었고, 충청도 내포지역처럼 주목받을 만한 큰 공동체가 형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인데, 어쩌면 접경지역에 위치한 진잠의 주변적 특징이 연구 자료에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잠의 천주교는 한반도에 신앙공동체가 생겨난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와 어느 지역 못지않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충청도와 전라도, 때로는 충청남도와 대전시의 접경에서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온 진잠의 천주교에 관한 연구이다. 최근의 연구에서 조선시대의 진잠지역 천주교와 주요 인물들의 행적이 다뤄진바 있기에,1) 이 글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천주교를 중심으로 다뤄지는 이 연구는 접경지대의 진잠지역이 급변하는 시기에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진잠의 천주교 역사가 조금이나마 드러나고, 근현대 대전시의 변화상도 함께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Ⅱ. 개항과 교회 재건


1. 선교사 재입국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조선에서 활동하던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9명이 체포되어 순교하고 리델, 페롱, 칼레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들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다각적으로 모색하며 재입국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사이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신부가 1870년 프랑스에서 주교품을 받고 이듬해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에 상해에서 조선 신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 군함이 조선을 침략한 1871년 신미양요 때 조선 신자 9명이 그 함대를 찾아가 승선하여 중국으로 간 것이었다.2)

 

조선인 신자들과 연결이 되어 선교사들의 재입국 가능성은 높아졌으나 현실화는 쉽지 않았다. 거의 모든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비신자들 틈에 살고 있어 서로 왕래가 어려웠고, 배교자들의 밀고로 신자들은 계속 쫓기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병인박해를 일으킨 흥선대원군이 여전히 집권하고 있어 그가 실각하는 1873년까지 재입국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라졌고, 1876년 2월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니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 입국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결과 그해 5월 9일 프랑스 선교사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극적으로 입국한 블랑 신부는 그해 10월 10일 중국에 있는 리델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실태를 보고하였다. 그는 가장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전라도를 그 해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하며 가는 길에 있는 교우촌들을 언급하였다.

 

“이 교우촌에서 저 교우촌으로 꽤 쉽게 갈 수 있을 듯합니다. 가는 길에 있다고 들은 크고 작은 교우촌들이 있는 곳은 이렇습니다. 용인, 양성, 안성, 직산, 전의, 공주, 계룡산, 진잠, 진산, 금산, 도간이, 고산, 전주, 정읍, 순창, 장성, 고창 등.”3)

 

이 편지에 나타나듯이 진잠은 주변의 계룡산, 진산과 더불어 신자들의 공동체가 있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기나긴 박해를 피한 신자들이 진잠과 같이 산속 깊은 곳에 교우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1877년에는 세 명의 선교사가 추가로 입국하였다. 두세, 로베르 신부가 새로 입국하였고, 1866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주교가 되어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다시 입국하였다. 이렇게 입국한 선교사들은 구역을 나누어 활동하며 신자들을 찾아다니고, 교리서들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교회 재건에 나섰으나 또 다시 박해에 직면하였다. 1878년 1월 중국의 선교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던 조선 신자들이 국경에서 체포되자 그들의 자백으로 리델 주교가 체포되었다.4)

 

리델 주교는 이전의 선교사들과 달리 감옥에 갇혀 있다가 그해 6월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미 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외국인을 조선의 법대로만 처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의 신자들, 특히 리델의 활동을 돕거나 관련이 있는 신자들 50여 명은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다. 이때 체포된 이들은 서울에서 13~14명,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에 거주하는 신자들이었다.5)

 

“큰 몽둥이로 무장한 포졸들이 저항을 시도하려는 모든 신자들을 그 자리에서 호되게 몰아쳤다는 소문이 나돕니다. 질울, 먹방이 같은 공주지역, 그리고 연산, 대흥, 부여, 진잠지역 등이 침입을 받았고,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답니다. 공주 감옥에 갇혀있는 교우들은 가혹한 형벌과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에 처해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체포된 교우들 중 배 바오로와 그의 아들은 첫 번째 희생제물이 되었고, 최객한 타데오, 연산 배티의 박씨 4형제, 같은 마을의 공소회장 성 서방, 그리고 고발자들이 있는 진잠 오리울에서 가까운 전라도 진산 가새벌의 김요한 회장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6)

 

진잠과 그 일대 신자들이 대거 체포된 이유는 선교사들이 충청도와 전라도 접경의 산간지역 교우촌들에 거주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박씨 4형제가 체포된 ‘연산 배티’(충남 논산시 벌곡면 검천리)에는 1878년 2월 30일(음) 포졸들이 와서 드게트(Deguette, 최동진) 신부가 어디에 있는 지를 대라며 신자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체포해갔다.7) 연산 배티는 진잠에서 남서쪽으로 10km 지점에 있는데 장태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여러 교우촌들 중 하나였다.

 

리델 신부의 체포로 뜻밖의 박해가 발생한 중에도 블랑과 드게트 신부는 서로 담당 구역을 나눠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주교님, 전라도에서는 블랑 신부와 제가 관할구역을 나눠 사목하는데, 오늘 이 지역도 판공을 끝냈습니다. 블랑 신부는 아직 고산에 있으나 경상도로 가려고 합니다. 저는 충청도로 와서 우선 강경부터 시작해 연산의 신외성8)에도 가서 성사를 주었습니다. 저는 현재 노상당 소세9)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력 11월 8일에는 부여 숭각10)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250~300명의 교우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충청도는 박해 동안 혼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작년에는 큰 교우촌들이 17군데였지만 현재는 두 곳만 남아있습니다).”11)

 

이 편지를 보면 드게트 신부는 논산과 부여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을 맡았다. 그곳에는 1877년에는 17곳에 큰 교우촌들이 있었으나 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이 모두 흩어져 두 곳만 남게 되었다.

 

드게트 신부는 충청도와 인접한 전라도 북부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진잠 역시 그의 관할이었다. 그러나 1879년 5월 15일 그는 공주에 머물러 있다가 한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공주로 압송된 그는 서울로 이송된 후 9월 7일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10월에 중국 봉천에 도착하였다.12) 드게트 신부가 체포될 때 신자들 14명도 함께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지역적인 박해가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중앙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적인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선교사들의 활동이 계속되자 병인박해로 무너진 조선 교회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2. 진잠의 사건들

 

선교사들의 추가 입국이 이어지고 관할구역을 나눠 활동하면서 지방의 선교사들은 중심이 될 만한 곳에 공소를 세웠다. 그들이 공소를 정기방문하여 신앙공동체는 힘을 얻어갔으나 지역사회의 천주교 배척은 여전하였다. 정부 주도의 박해는 끝났을지라도 100년 가까이 진행된 박해의 습속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궁벽한 시골일수록 사적인 박해는 더 심했다. 진잠 어리울에서는 1900년과 1903년 두 차례 천주교 탄압 사건이 일어났다.

 

1900년 진잠 어리울(대전시 서구 우명동)13) 옹기점에서 발생한 사건은 진잠의 지방관, 향리, 향반들이 신자들을 강탈한 사건이었다. 본래 신자들이 살지 않던 어리울에 1898년 미알롱 신부가 선교를 위해 새 공소를 세웠다.14) 천한 신분의 옹기장이 신자들이 진잠에 자리를 잡으려 하자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멀리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이 진잠에도 알려지면서 주민들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의화단 사건은 1899~1901년 중국에서 발생한 외세배척운동으로 반외세, 반기독교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1900년 8월부터 진잠에서도 천주교 배척운동이 본격화하였다. 이때부터 보수 유생들은 비밀리에 집회를 열고 주민들과 단합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 일을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래도 어리울 신자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자 옹기를 만드는 점토를 가지고 시비를 걸어 소송을 제기하였다. 진잠 관장 역시 여기에 가세하여 공소회장을 소환하고 각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진잠 지역민과 관장의 탄압이 노골화하자 어리울을 담당하던 미알롱 신부는 서울의 교구장 주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어리울 사건은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이어져 1902년까지 소송전이 벌어진 가운데 주민들의 탄압과 수탈은 계속되었다. 이 사건의 영향은 어리울 신자들에게만 그치지 않았고, 미알롱 신부가 담당하던 진산, 금산, 고산, 은진 등 전역에 영향을 미쳐 기존 신자와 예비자들이 천주교를 버리고 떠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지역민들의 탄압에도 신자들은 어리울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았는데 1903년 11월에 또 다른 수난을 당하였다. 조선 각지를 떠돌며 활동하던 활빈당(活貧黨)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야했다.15)

 

“주교님, 저는 네 공소를 방문하고 나서 이곳의 극심한 혼란 때문에 더 이상 어찌할 줄을 몰라 공소 판공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한 무리의 강도들 이야기입니다. 활빈당은 누구도 예외 없이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비신자들을 습격하지만 신자들 공격을 더 선호하는 듯합니다. 지난 13일 진잠 어리울 옹기점에서 여덟 집이 불탔고, 마을 전체가 파괴되었으며 한 교우는 칼을 맞아 사경을 헤맵니다. 몇몇 교우들이 사는 은진 여술은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열두 집이 불탔고, 8명의 남자가 중상을 입었으며 두 명은 사경을 헤매고 1명은 죽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여자들이 끔찍한 일을 당하는 등등.”16)

 

미알롱 신부의 편지에는 이러한 일들이 대낮에 조선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잠 어리울과 주변 신자들처럼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신자들은 조선의 개항 후에도 오랫동안 무방비 상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지역주민들은 물론 조선의 행정기관으로부터 마치 외국인처럼 대우받으며 갖가지 불이익을 당했던 시기였다.

 

 

3. 되재본당 설립

 

조선 후기 100여 년간 박해를 받던 신자들은 대부분 산간지역이나 오지에 거주하였다. 행정기관으로부터, 혹은 향촌 사회의 제재로부터 멀리 벗어난 지역에 살다보니 주로 지역과 지역의 경계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진잠과 그 일대 신자들은 장태산과 대둔산을 중심으로 거주했는데, 이 지역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가 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신자들은 하나의 생활권처럼 교류하고 살았기에 이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되재본당은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북부의 산간지대 전체를 담당하였다.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설립된 되재본당은 1891년 차돌박이(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첫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너무 깊은 산중이어서 성당을 지을만한 공간이 여의치 않자 1894년 되재로 자리를 옮겼다.17) 이렇게 설립된 되재본당은 전라도 북부뿐만 아니라 진잠을 포함한 충청도 남부의 연산과 은진 일부(현재의 논산시 벌곡면, 양촌면, 가야곡면, 연산면)를 1921년까지 관할하였다.18)

 

1897년 5월 되재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부임한 미알롱 신부에 의하면 진잠에는 1898년 어리울에 공소가 세워졌다.19) 본래 신자가 살지 않던 지역에 옹기를 굽는 신자들이 모여와 형성한 공소였다. 어리울공소의 신자 현황은 1900년 부활절을 지내고 작성한 통계표에 나타나는데 모두 29명이었다.20)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29명 중 22명이 판공성사를 보고, 1년 동안 성인 영세자가 4명이 있을 만큼 내실이 있었다.

 

1900년 진잠 주민들이 어리울 옹기점을 탄압하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에도 신자는 계속 증가하였다. 1900~1901년 통계표에는 신자가 48명,21) 1901~1902년에 63명,22) 1902~1903년에 99명23)으로 각각 나타난다. 한편 1901~1902년에는 어리울에 서당식 학교가 운영되었다는 기록도 있다.24) 학생이 1명뿐이어서 잠시 운영되다 중단된 듯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어리울 공소가 지역사회 안에서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903년 어리울공소는 활빈당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그해 12월 미알롱 신부가 쓴 편지를 보면 어리울은 “최고의 공소들 중 하나”25)로 보고되었다. 이후 7년간의 통계표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 현황이 드러나지 않으나 어리울 공소는 물론 진잠 일대에 신자가 계속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1909~1910년 통계를 보면 어리울 공소의 신자는 140명으로 증가했고, 새로운 공소인 ‘진잠 서편이’에 38명의 신자가 있다고 나온다.26)

 

‘서편이’는 진잠 성북리(대덕군 진잠면)의 한 지역으로 시내 서쪽에 있다 하여 ‘서편’(西便) 혹은 ‘서편말’로 불렸다.27) 대전시가 확대되며 여러 차례 행정개편이 이뤄져 지금은 유성구 성북동의 지역이다. 언제부터 신자들이 서편이에 거주했는지는 모르나 1904~1908년 사이에 되재본당의 한 공소로 설정되었다. 서편이는 어리울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했으리라 추측된다.

 

1910~1911년에 어리울의 신자는 127명으로 1년 전보다 13명 줄었고, 서편이는 42명으로 4명이 증가했다. 두 공소를 합치면 169명이므로 전체를 보면 1년 전 178명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삼림약탈을 위해 1908년 삼림법(森林法)을 제정하고, 세금징수를 위해 1909년 연초세법을 제정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는 산간지역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거나 담배농사를 지으며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다른 생업을 찾아 이동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28) 이러한 제도 변화가 이즈음에 진잠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통계표를 작성할 때 그 해 11월(혹은 10월 말) 처음 출발한 공소부터 다음 해 부활절 전에 방문하는 마지막 공소까지 방문 순서에 따라 기술한다. 1899년 가을부터 1911년 부활절까지 기록이 남아있는 통계표에서 진잠과 그 일대의 방문 순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 기록을 보면 진잠 어리울은 진산 가새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99~1901년 사이에 두 차례 진산 구만리(금산군 복수면 지량리)를 거쳐 간 경우를 제외하면 진산 가새벌(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다음에 진잠 어리울을 방문하였다. 진산 가새벌은 윤지충의 제사사건이 발생했다고 추정하는 진산면 지방리(혹은 막현리)와 같은 마을이다. 18세기 후반 천주교가 진산지역에 전해질 때 윤지충이 먼저 입교를 하고, 그의 동생 윤지헌에 의해 논산의 은진으로도 천주교가 전해졌다.29) 이런 과정을 보면 진산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진잠에도 유사한 경로로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박해가 끝난 이후 형성된 진산에서 진잠으로 이어지는 공소 방문 길은 두 지역 간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하나의 지표라 생각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12년 무렵 진잠에 ‘장바탕이’ 공소가 생겨났고, 그보다 좀 후대로 짐작되는 시점에 원정에도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대전시 서구 오동(옛 지명은 대덕군 기성면 오리)30)에 위치했던 장바탕이는 어리울과 같은 골짜기 안에 2km 남짓 떨어진 마을이다. 아마 이전에는 어리울에서 공소 판공을 시행하다가 1912년 무렵부터 장바탕이에서 판공을 시행한 듯하다. 여하튼 ‘장바탕이’라는 이름은 대목대목구 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 처음 나온다.

 

“(1912년) 11월 2일 금요일. 나는 5시에 미사를 드리고 6시 50분 기차를 탔다. 2시 30분에 두계역에 도착하여 거기서 베르모렐, 베르몽 신부, 또 첫 번째 공소인 장바탕이에서 온 많은 교우들을 만났다. 우리는 말을 타고 그곳으로 갔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하지 않은 공소생활을 하게 되었다.”31)

 

1911년 대구대목구가 새로 설정되면서 진잠, 은진, 석성, 노성, 연산 등 충청도의 5개 지역은 행정구역에 관계없이 지역공동체의 특성을 감안하여 대구의 관할이 되었다.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교구 설정 후 첫 공소 방문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 중 처음으로 방문한 공소가 진잠 장바탕이였다.32) 두계역, 지금의 계룡역에서 내린 드망즈 주교는 멀리까지 마중 나온 장바탕이 신자들과 함께 진잠으로 이동하여 첫 공소 일정을 진행하였다.

 

이 기록을 볼 때 장바탕이 공소는 적어도 1912년 전부터 있었고,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규모가 큰 공소였다. 그들은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했고, 대대로 신앙생활을 한 구교우(舊敎友)들이었다고 짐작된다. 1924년 드망즈 주교가 무주 용포리(전북 무주군 무주읍) 공소를 방문했을 때 기록한 “이곳은 장바탕이의 구교우들이 최근에 세운 옹기촌이다.”33)라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전시 서구 원정동(옛 지명은 대덕군 기성면 원정리)34)에 설립된 원정 공소는 언제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리 큰 공소는 아니어서 신자 수가 20명을 넘지 않았다. 원정 공소와 장바탕이 공소는 되재본당에 소속되어 있다가 1921년 논산본당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이관되었다. 논산본당에서 1921~1922년에 보고한 통계표를 보면 장바탕이 신자는 85명, 원정 신자는 18명이었고, 공소 명칭은 각각 ‘대전 오리동’, ‘대전 원정’으로 기록되어 있다.35)

 

 

Ⅲ. 시기별 관할 본당


1. 논산본당 시기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후 하나의 교구 안에서 움직였던 한국 천주교회는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나뉘었다. 대구대목구는 남쪽의 경상도, 전라도 전체를 관할함과 동시에 경계에 있는 충청도 남부의 일부 지역도 담당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산간지대가 행정상으로는 경계를 이루지만 박해를 피해 대대로 살아온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공동체여서 갈라놓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진잠 신자들은 1911년 이후에도 계속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중심을 둔 되재본당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대전 목동에 ‘대전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진잠은 그 관할에 편입되지 않았다. 대전본당은 1906년 공주본당에서 분가한 옥천본당에서 비롯되었다. 옥천본당은 청주의 비룡(충북 청주시 남이면 비룡리)으로 한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대전이 성장함에 따라 1919년 목동(당시 주소는 충남 대전군 외남면 방축리)로 자리를 옮겼다.36) 이 때문에 대전본당은 대전 동쪽의 옥천과 북쪽의 청주지역을 담당하였으므로 남서쪽에 위치한 진잠은 관할에 포함되지 않았다.

 

1921년 들어 진잠은 되재본당에서 논산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그해에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 간 경계가 행정구역을 따라 확정되자 그동안 나바위본당이 관할하던 강경, 연산, 노성, 은진지역과 되재본당이 관할하던 진잠 지역을 논산본당이 관할하게 되었다. 신설된 논산본당에는 16개 공소가 있었는데 장바탕이가 그중 하나로 주소지는 ‘대전 기성 오리’(大田 杞城 五里)였다.37)

 

 

 

1921~1924년 논산본당 통계표를 보면 대전(진잠)에 있는 공소는 장바탕이, 원정, 서편이(서평) 세 개로, 되재본당 시기에 줄곧 나오던 ‘어리울’은 나오지 않는다. 191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어리울공소는 가까이 있는 장바탕이공소로 편입된 듯하다. 원정과 서편이는 공소가 크지 않아 때에 따라 주변 공소에 통합되어 판공성사를 받았으리라 판단된다. 1924년 논산본당 공베르 신부가 작성한 연례보고서에는 장바탕이와 서편이 공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번째 공소(서편이)는 옹기촌인데 거의가 신입 교우들로서 어른, 아이 모두가 교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두 차례의 판공 때 복사는 하루 종일 그들에게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주요 교리를 가르쳐 거의 다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서로 화목하여 노름도 안하고 폭음도 안 합니다.... 다음은 대전 땅의 오리동(장바탕이) 공소인데 그 상황이 더욱 심각합니다. 몇 해 전부터 교우들이 타지역으로 이주해가는 바람에 공소는 예전에 비해 축소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척이나 좋았던 이 공소가 오늘날은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38)

 

이 보고서를 보면 두 공소는 모두 옹기를 굽는 신자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서로 다른 점은 장바탕이는 구교우들로 구성된 공소인 반면, 서편이는 새로 입교한 신자들(신문교우)로 구성된 공소였다. 두 공소는 일제강점기 들어 더 강화된 연초법과 삼림법으로 인해 옹기점 공소들이 축소되어 간 것으로 판단된다. 땔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옹기업의 특성상 삼림법의 강화는 생계에 큰 지장을 주었기 때문에 장바탕이 신자들이 고향을 떠난 듯하다. 이외의 다른 변수로 신자들의 간도 이주도 한 원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박해부터 줄곧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했던 신자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대거 간도로 이주했는데,39) 그러한 움직임이 1920년대까지도 계속 이어졌으리라 생각된다.

 

 

2. 대전본당 시기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대전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지역이다. 한밭이라 불리던 대전이 널리 알려진 마을이 아니었던 데다가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박해를 피해 주로 옹기업과 담배농사를 하던 신자들은 대부분 대전 주변의 산간지대에 거주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보면 동쪽의 옥천지역, 남쪽의 논산·금산지역, 서쪽의 부여 · 공주지역의 산간지대가 주요 거주지였다. 이런 까닭에 대전은 1919년이 되어서야 작은 규모의 본당(대전본당)이 생겨날 정도로 천주교 역사에서 늦게 등장한다.

 

대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1901년 공사가 시작된 경부선 철도에 대전역이 생기면서부터이다. 대전역이 생기자 각처에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모여들었다. 대전에 신자들이 언제부터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옹기를 굽는 신자들 몇몇이 대전역이 생긴 이후 목동에 정착하였다. 1913년 그들이 옥천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판공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후 신자들이 점차 늘어나 1918년에는 90명에 이르렀다.40)

 

1906년 설립되어 대전을 담당하던 옥천본당은 1914년 청주의 비룡으로 한 차례 자리를 옮겼고, 대전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1919년 대전 목동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당시 주소는 충청남도 대전군 외남면 방축리였고, 본당의 정식 명칭은 ‘대전본당’이었다.41) 대전본당은 1932년 청주본당을 분가하며 충청북도에 있는 공소들을 모두 이관하고 대전지역 선교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기반이 약한 도시여서 선교가 쉽지 않아 1940년에 신자가 527명뿐이었고, 관할 공소는 둔산, 가수원, 주원(대전시 동구 신하동), 신탄진, 하감(충남 연기군 동면 노송리) 에 불과했다.42)

 

진잠지역이 대전본당으로 편입된 시기는 1945~1948년 연간으로 짐작된다. 목동에 있던 대전본당은 선교를 위해 대전역이 있는 시내로 이전하려는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이 된 후인 1945년 10월 대흥동으로 본당을 이전하였고 명칭도 ‘대전본당’ 그대로였다.43) 이 무렵 관할구역 조정이 이뤄져 논산본당에 속해 있던 진잠이 대전본당으로 이관된 듯하다. 1946년 논산본당에서 강경본당이 분가하여 신설되고, 1948년 대전교구가 설정되었는데 이런 기회에 관할구역 조정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현재 남아 있는 통계표에 의하면 1949년부터 진잠 지역 공소가 대전본당 관할에 포함되어 나타난다.44)

 

  

 

1949~1969년 통계표에 보듯이 오리, 즉 장바탕이공소는 대전본당의 공소로서 줄곧 성장하였다. 1961년에 ‘진잠’ 공소라는 이름으로 신자 47명이 처음 타나나는 것으로 보아 1950년대 후반에 새로 설립된 듯하다. 이후 진잠지역에는 장바탕이공소와 진잠공소가 함께 성장하는데 후일 진잠본당이 자리잡는 계기가 이 무렵에 마련되었다.

 

위의 통계표를 보면 1949~1960년 사이에 보고 누락된 연도가 많지만 전체 흐름을 읽어내는 데는 지장이 없다. 이 기간에 6.25전쟁이 있었는데 산 깊은 곳에 자리한 장바탕이는 전쟁 초기에 신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대전본당이 처음 자리했던 목동의 신자들 중 몇몇이 장바탕이로 피신하였고,45) 대전교구 설립 이후 첫 번째로 사제품을 받는 강만수(요셉) 신부도 전쟁 중에 대전에 있다가 장바탕이로 피신했었다고 전한다.

 

 

3. 가수원본당 시기

 

6.25전쟁이 끝나고 대전의 인구가 증가한데다 천주교 선교가 활발해지자 대전 서쪽을 관할하는 새로운 본당이 설립되었다. 1972년 설립된 유천동본당은 대흥동본당과 목동본당에서 각각 일부를 분할하여 세워졌다. 새 본당은 유천동, 오류동, 문화동, 산성동, 복수동, 태평동, 도마동, 변동, 내동, 정림동을 본당구역으로 삼고, 공소로는 가수원, 진잠, 흑석리, 오리(장바탕이), 그리고 신도안(계룡시 신도안면)을 관할하였다.46)

 

유천동본당의 신설에도 불구하고 대전 서구의 신자 증가가 계속되자 7년이 지난 1979년 진잠에 새로운 본당이 세워졌다. 새 본당의 명칭은 ‘진잠본당’(구)47)으로 관할구역은 당시 행정구역에 따라 진잠면, 기성면, 두마면이었고,48) 본당이 위치한 주소지는 현재의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이었다.

 

“〈본당 연혁〉 1979년 9월 10일 유천동본당에서 본당 승격으로 현재의 장소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임 암브로시오 형제와 윤 레지나 자매의 도움으로 여러 신자들의 참여 속에 지금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이때 초대 주임은 장영식 토마 신부님께서 부임하였고, 오리공소와 남선리공소가 본당으로 편입됨.... 그 후 85년 8월 29일에 현재의 본당 신부인 유윤식 신부님이 부임하셔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부임 초기에 벌곡공소가 부창동 성당 관할에서 진잠본당 관할로 변경되었음.”49)

 

1987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본당 연혁〉에는 당시 본당구역과 공소가 명시되어 있다. 원내동, 교촌동, 가수원동을 1~4구역으로 나누었고, 가수원동의 계룡아파트와 관저동의 충방아파트는 별도로 나누었다. 그리고 세 개의 공소가 나와 있는데 기성면의 오리공소(장바탕이), 진잠면의 남선공소(신도안공소: 현재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 논산 양촌면의 벌곡공소였다. 오리공소, 즉 장바탕이공소는 신자가 총 38명(남 15, 여 23)이었다.

 

진잠본당(구), 즉 가수원본당이 처음 세워진 장소는 대전시 서구 교촌동 259번지였다.50) 하지만 대전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중에도 서쪽 끝에 위치한 진잠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었다. 결국 1989년 12월 13일부로 가수원동의 새로운 부지로 본당을 옮겨 ‘가수원본당’으로 개칭하였고, 진잠은 가수원본당의 공소가 되었다.51)

 

 

Ⅳ. 현재의 진잠


1. 진잠본당 설립

 

2001년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에 ‘원내동본당’이 설립되고 2006년 ‘진잠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함으로써 지금의 진잠본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진잠에 신앙공동체가 생긴 시기는 1950년대 후반으로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진잠에서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기성면 오리(장바탕이)와 성북리처럼 산골 깊숙한 곳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인구 이동이 많아지면서 신자들이 대전 중심 쪽으로 이동하고, 선교가 활발해지면서 진잠의 중심부인 교촌리 일원에도 공소가 생겨났다.

 

대전본당(대흥동)의 통계표를 보면, 1961년에 ‘진잠공소’가 처음 등장한다.52) 그해 신자 수가 47명이므로 그전부터 신앙공동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1964년 통계를 보면 79명까지 증가하는데 이때는 아직 별도의 공소 강당이나 부지 없이 ‘공소집’의 형태로 공소회장 집이나 일반 가정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졌으리라 추측된다. 과거 새로 설립되는 공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태로 성장해갔다.

 

1970년대 들어 현재의 진잠 성당(유성구 교촌동 263-1번지)이 건립된 자리에 별도의 공소가 마련되었다. 1973년경 서울에 사는 ‘블랑카’라고 불리는 할머니가 진잠으로 내려와 방 한 칸을 빌려 전교를 시작하였다.53) 블랑카 할머니는 대전본당(대흥동) 레나타 회장과 단짝이 되어 매일 진잠에 와서 선교하였다. 레나타 회장은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다고 한다.54) 임 암브로시오55) 회장 또한 선교에 적극 협조하여 레나타 회장과 함께 기금을 희사하며 교촌동 263-1번지에 35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포도밭이었던 이곳에 땅이 마련되자 신자들이 합심하여 대흥동에서 헌 목재를 사 손수레로 싣고 와서 작은 공소 건물을 지었다.

 

이 시기 진잠공소는 유천동본당의 관할이었는데 매주 토요일에 본당 신부가 공소로 와서 미사를 봉헌했다. 대축일에는 신자들이 한복을 입고 걸어서 본당으로 가 미사에 참석했다. 본당 주임 조성옥 신부는 대축일에 공소 신자들이 오면 소고기국을 끓여 잘 대접해주었다고 한다. 1979년 진잠공소가 진잠본당(구)으로 승격되자 레나타 회장과 임 암브로시오 회장이 또 한번 거금을 희사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하지만 매주일 신자들이 내는 헌금이 1만 5천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본당 신부의 생활비도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이에 레나타, 암브로시오 회장이 2년간 매월 일정 금액을 보조해주어 본당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970~80년대를 지나면서 대전은 급속히 확대되어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진잠지역은 대덕구, 서구, 유성구의 여러 동들로 나뉘어 행정구역이 달라졌다. 또한 진잠본당(구)이 1989년 가수원으로 옮겨져 명칭도 ‘가수원본당’으로 바뀌자 다시 ‘진잠공소’로 환원되었다. 가수원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인구가 증가하고, 신도시에 신자들의 증가가 뚜렷해진 영향이었다. 다시 환원된 진잠공소에서는 매주 미사가 봉헌되기는 하였으나 진잠의 신자들이 바뀐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2001년 진잠공소는 ‘원내동본당’이라는 이름으로 승격되어 결정적 출발을 하였다.56) 본당 이름을 ‘원내동’으로 한 이유는 관할구역 안에 가장 큰 동의 명칭을 딴 것이기도 하지만 1979년에 있었던 ‘진잠본당’(구)과의 혼선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원내동본당은 또 한 번 변모했다. 대전의 서남부권 개발과 도시기반시설 확충에 따라 원내동본당의 임시 성당, 사제관, 회의실 등을 모두 철거해야할 상황이었다. 이에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2003년 9월 재정경제부에 요청서를 제출하여 택지가 개발되더라도 기존 위치에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57)

 

진잠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고, 본당에 걸맞은 성당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가 2006년 6월부터 시작되었어도 진잠의 신자들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이름을 되찾고 싶어 하였다. 그 뜻이 받아들여져 천주교 대전교구는 2006년 11월 1일 ‘원내동본당’을 ‘진잠본당’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동시에 진행된 성당 신축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7년 5월 9일 준공을 완료하고, 같은 해 5월 24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로서 진잠공소에서 시작한 진잠본당 공동체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2. 역사 이어가기

 

조선 후기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된 초기부터 시작된 진잠지역 천주교의 역사는 200년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과거 ‘진잠군’으로 불리던 지역은 충청남도와 대전시의 변모에 따라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어 본래의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진잠본당은 옛 진잠군이 관할하던 지역을 가장 많이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진잠본당 관할의 모습도 가만히 살펴보면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전쟁 전까지 진잠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남서쪽의 산골짜기에 거주하였다. 현재의 진잠본당은 시내에 위치한 진잠향교에서 불과 50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옛 진잠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진잠본당 자리에 공소가 생긴 시기는 1950년대 후반이었으니 오랜 천주교 역사가 깃든 자리와 현재의 공동체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물론 이 간극이 역사의 단절은 아니다. 장바탕이(오리) 공소처럼 산골짜기에 있던 공소들은 진잠공소가 본당으로 성장하면서 새 공동체에 편입되었고, 지금도 진잠본당이 옛 공소들이 있던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다만 옛 공소들의 신자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나고 공동체의 중심이 바뀌면서 옛 모습이 희미해졌을 뿐이다. 이러한 간극을 좁히기 위해 진잠본당은 2001년 10월 본당의 주보(主保)를 한재권(요셉)과 정원지(베드로) 성인으로 정하였다. 두 성인은 각각 1829년과 1846년 진잠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들로,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거행한 103위 시성식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진잠본당은 한걸음 더 나아가 2009년 7월 한재권 성인의 유해를 본당으로 모셨다.58) 그리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그해 9월 27일 유해 성광에 안치하였고, 지금은 성당 제대 우편에 모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현시하였다. 한재권 성인의 무덤은 천호성지(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 있는데 1983년 그곳으로 이장할 때 유해 일부가 호남교회사연구소에 보존되었다. 이를 알게 된 진잠본당 주임 신부와 대표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유해를 모셔올 수 있었다.

 

또 다른 진잠지역의 역사 연결은 2008년 천주교 대전교구 차원에서 이뤄졌다.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으면서 대전교구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들을 8차례에 나눠 도보로 순례하였다.59) 이렇게 시작된 교구 차원의 도보순례 중 몇몇 구간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도보순례가 이뤄지고 있다.

 

 

 

6월 15일에 진행된 ‘장태산휴양림 입구 → 지방리공소’ 구간은 지금도 계속 도보순례가 이뤄진다. 장태산휴양림 입구 인근의 장안동은 진잠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가 전해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리공소, 즉 현재의 진산성지가 자리한 일대는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윤지충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그의 동생 윤지헌이 은진 일대에 천주교를 전할 때 진잠에도 선교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진잠 장안동에서 진산으로 이어지는 도보순례 구간은 신앙의 역사를 거슬러 찾아가는 여정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잠지역에서 펼쳐진 천주교 역사를 시기별 변화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 박해 속에서 성장한 진잠의 천주교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 해 조선에 다시 입국한 선교사들은 비교적 신앙공동체가 잘 유지된 교우촌들을 방문하며 선교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진잠도 그중 하나였다. 선교사들의 방문은 성직자 없이 지내던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1878년 리델 주교의 체포를 계기로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진잠과 주변 산간지대를 선교사들이 방문하고, 그곳에 은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관련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다.

 

이 사건 후 진잠지역에 정부 주도의 박해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으나 지방 관아와 주민들의 박해는 여전하였다. 진잠 어리울(대전시 서구 우명동)에서는 1900년 진잠의 지방관, 향리, 향반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옹기점을 운영하는 신자들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 1903년에는 떠돌이 활빈당(活貧黨)의 습격으로 마을 전체가 전소되고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진잠에 뿌리를 내린 신자들은 1891년 설립된 되재(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본당의 관할 아래 주목받는 공소로 성장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한 진잠은 주변에 설립되는 몇몇 본당들의 공소로 여러 차례 관할이 변경되었다. 1920년까지는 되재본당에 소속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어리울, 장바탕이(대전시 서구 오동), 서편이(대선시 유성구 성북동)에 공소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셋 중 장바탕이공소가 가장 컸는데 기존의 어리울공소를 편입하여 진잠을 대표하는 공소가 되었다. 1921년 논산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진잠은 논산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40년대 후반까지 그 상태가 유지되며 장바탕이(오리), 서편이(서평), 원정(대전시 서구 원정동) 등 세 공소가 진잠지역에 있었다.

 

진잠이 대전에 설립된 본당들의 공소가 된 시기는 일제강점기가 지나서였다. 목동에 있던 대전본당이 1945년 10월 대흥동으로 이전한 뒤 어느 시점에서 처음으로 진잠이 대전본당에 편입되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대전에 신자들이 늘어나자 1950년대 후반 기존의 장바탕이공소와 별도로 진잠공소가 설립되었다. 진잠공소는 1973년경 몇몇 신자들의 적극적 활동으로 유성구 교촌동 263-1번지의 포도밭을 매입하여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 그 자리에 1979년 ‘진잠본당’(구)이 세워졌다가 가수원으로 본당이 이전되었고, 2001년 ‘원내동’이라는 이름으로 본당이 다시 설립된 후 2006년에 ‘진잠’으로 명칭을 변경함으로서 현재의 진잠본당이 결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의 진잠본당은 조선 후기부터 200년 넘게 진잠지역에 이어져 온 신앙 역사를 계승하기 위해 본당 주보를 한재권(요셉)과 정원지(베드로) 성인으로 정하였다. 진잠에서 태어난 두 순교자는 1984년 성인품에 오른 분들로 진잠의 천주교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진잠본당은 또한 한재권 성인의 유해를 성당 제대 옆에 모셔 역사의 연결을 확고히 하였다. 2008년 대전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으면서 신자들이 진잠의 장안동에서 진산성지(충남 금산군 진산면)로 이어지는 10km 산길을 처음 순례하였다. 지금도 해마다 계속되는 이 순례길은 진산에서 비롯되어 진잠으로 넘어온 신앙 전파여정을 거슬러가는 길이다. 이를 통해 현재의 진잠본당으로 이어지는 신앙 역사를 근원에까지 연결하고 있다.

 

진잠지역은 주변의 깊은 산간지대로 연결되는 지형, 그리고 과거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현대에는 충청남도와 대전시의 경계에 위치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큰 변화를 겪었다. 박해를 피한 신자들이 진잠의 산골짜기로 모여들어 오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국가 행정구역이 바뀌거나 새 본당들이 생길 때마다 진잠의 천주교 공동체는 관할구역이 바뀌었다. 한편 진잠 공동체 내부에서도 변화를 겪어 과거 신자들이 거주하던 산간지대와 오늘날 중심이 된 도심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그러나 진잠 신자들의 역사 인식과 그것을 이어나가려는 노력에 힘입어 현재의 진잠본당은 과거와 단절 없이 신앙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참고문헌


1. 자료

 

1876년 10월 10일 블랑 신부의 편지(2004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1878년 7월 7일 블랑 신부의 편지(2004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1878년 11월 28일 드게트 신부의 편지(2006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 박은희 역).

1900년 4월 18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2000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1903년 11월 16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2000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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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공문 ‘사목500-74’(1979년 8월 30일).

〈대전주보〉 515호 – 1981년 10월 18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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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교구장 공문(1990년 1월 12일).

대전교구 교구장 공문(제01-02호 2001년 1월 30일).

대전교구 사무처 공문(제03-82호 2003년 9월 17일).

진잠본당 공문 제09-20호(2009년 9월 30일).

권두경 마르코(1937년생), 김진태 니콜라오(1939년생)의 증언(2017년 6월 5일 인터뷰).

 

2. 논저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천주교 전주교구, 1998.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2》, 호남교회사연구소, 1998.

김태훈,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남해의봄날, 2016(2쇄).

목동본당 80년사 편찬위원회, 《목동본당 8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목동 교회, 1999.

방상근, 〈병인박해기 진잠의 신앙공동체와 순교자〉, 《장안동지역의 천주교회사 학술대회》, 2017.

오기선, 〈대전 대성당을 짓던 일〉, 《순교자들의 요람을 찾아서》 상, 태영사, 1988.

이석원, 〈조선후기 진잠과 주변 지역의 천주교 신앙공동체〉, 《장안동지역의 천주교회사 학술대회》, 2017.

조현범, 〈선교의 자유와 교회의 성장〉, 《한국 천주교회사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천주교 대전교구 60년사 편찬위원회 저, 《대전교구 6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2008.

펠릭스 클레르 리델 저, 유소연 역,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살림출판사, 2008.

한글학회 엮음, 《한국지명총람 4》(충남편) 상, 한글학회, 2001.

한글학회 엮음, 《한국지명총람 4》(충남편) 하, 한글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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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 7월 7일 대전광역시 서구청에서 주최한 ‘장안동지역의 천주교회사 학술대회’에서 진잠지역 천주교의 역사가 다뤄졌다. 제1주제 – 이석원, 〈조선후기 진잠과 주변 지역의 천주교 신앙공동체〉; 제2주제 – 방상근, 〈병인박해기 진잠의 신앙공동체와 순교자〉; 제3주제 – 김정환, 〈근현대 진잠의 천주교〉. 본 논문은 그날 발표한 제3주제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2) 조현범, 〈선교의 자유와 교회의 성장〉, 《한국 천주교회사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45쪽. 이하 프랑스 선교사들의 재입국 과정은 이 글을 참조하였다.

 

3) “Il paraît que l’on pourrait y aller assez facilement de chrétienté en chrétienté. Voici la route dont on parle ; dans tous ces endroits il y a plus ou moins de chrétiens : Ryong‐in ; Yang‐syeng ; An‐syeng ; Tjik‐san ; Tjyen‐eui ; Kong‐tjyou ; Kyei‐riong‐san ; Tjin‐tjam ; Tjin‐san ; Keun‐san ; To‐kan‐i ; Ko‐san ; Tjyen‐tjyou ; Tyeng‐eup ; Syoun‐chyang ; Tjyang‐syeng ; Ko‐tchyang etc.”(1876년 10월 10일 블랑 신부의 편지 - 2004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4) 펠릭스 클레르 리델 저, 유소연 역,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살림출판사, 2008, 51~58쪽.

5)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천주교 전주교구, 1998, 385쪽.

 

6) “Le bruit courut que les dits satellites armés de gros gourdins avaient reçu l’ordre de massacrer sur place tout chrétien qui essayerait de faire résistance. Les environs de Kong‐tjyou, tels que Tjil‐oul, Mok‐pang‐i etc. Nyen‐san, Tai‐heung, Pou‐ye, Tjin‐tjam etc… furent envahis, un très‐grand nombre d’arrestations furent opérées et les chrétiens captifs dans les prisons de Kong‐tjyou furent bientôt, dit‐on, réduits à l’extrémité par suite des tortures et du manque de nourriture. Parmi les chrétiens arrêtés, le catéchiste Pai Paolo et son fils furent des premières victimes, Tjoa‐kăik‐han Thaddée, les frères Pak (quatre) de Pai‐hteui‐nyen‐san, Syeng‐sye‐pang maître du Kong‐so du même endroit, et Kim Jean catéchiste de Ka‐soi‐pel tjin‐san (Tjyen‐la‐to) à cause du voisinage de O‐rioul (Tjin‐tjam) où il fut dénoncé, dit‐on.”(1878년 7월 7일 블랑 신부의 편지 – 2004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7) “죄인의 형 이냐시오와 알렉시오와 마르코가 연산 배티 살더니, 무인년 2월 30일에 유명한 유다스 최우돌이 경포 20명을 데리고 죄인 4형제를 잡아서 최 신부와 이 복사 요한의 거처를 알려고 혹독한 사형을 많이 받고, 그때에 알렉시오는 자기 혀를 내어 물어 끊으려 하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현대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87쪽. 정리번호 20번).

 

8) 충남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새외성. 부황리는 조선시대에 연산군 외성면 지역이었다(한글학회 엮음, 《한국 지명 총람 4》 하(충남편), 한글학회, 2006, 91쪽).

 

9) 박헌봉 판소리 〈춘향가〉를 보면 이몽룡이 서울에 전라도로 내려가는 길에, “공주 금강을 건너, 장깃대 높은 행길, 소세 무내미 얼른 넘어, 정천 들어 숙소한 후, 평창역마 갈아타고, 노성 풋개 사다리 얼른 지나, 은진 깐치당리 중화하고, 황화정을 지내어, 양계역마 갈아타고, 여산읍에 당도하니, 예서부터 전라도 초두이라.”(인터넷 카페: 조용한 숲속 벤치 http://cafe.daum.net/poet-land)는 대목이 나온다. 이로 보건대 ‘소세’는 공주 장깃대와 정천(논산시 노성면 정천리) 사이의 한 지역인 듯하다.

 

10)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 숭각(崇角).

11) 1878년 11월 28일 드게트 신부의 편지(2006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 박은희 번역).

12)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389~390쪽.

 

13) 《천주교 전주교구사 1》, 646~651쪽에서는 이 사건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공소 이름을 ‘우러울’이라 하였다. 하지만 필자(김정환)는 1900년 4월 18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에 어리울(Eryel)로 나와 있기에 이 기록을 따라 ‘어리울’로 표기한다. 한편 한글학회에서 발행한 《한국 지명 총람》 4(충남편상), 315쪽에는 대덕군 기성면 우명리, 즉 현재의 대전시 서구 우명동에 ‘울어울’, ‘울어동’, ‘우명’이란 지명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4) 1900년 4월 18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2000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648쪽.

 

15)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579~581쪽. 이 책에서는 ‘진잠 앵골’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1903년 11월 16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에 ‘진잠 어리울(Eryel)’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필자(김정환)는 이를 근거로 1900년의 강탈 사건이 동일한 교우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한글학회에서 발행한 《한국 지명 총람》 4(충남편 상), 314쪽을 보면, 대덕군 기성면 오리, 즉 현재의 대전시 서구 오동에 ‘영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를 ‘앵골’과 같은 곳으로 본다면 어리울과 앵골은 같은 골짜기 안에 1km 남짓 떨어져 있는 가까운 마을들이다.

 

16) 1903년 11월 16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2000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17)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2》, 호남교회사연구소, 1998, 92~93쪽.

 

18) 이종흥 역, 《안세화 주교 공문집》, 천주교 대구대교구, 2003, 33쪽. 충청도의 노성, 석성, 그리고 연산과 은진 일부는 나바위본당(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서 관할하였다.

 

19) 1900년 4월 18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2000년 지정환 신부 판독 자료);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648쪽.

 

20)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구자료집 제2집 교세통계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87, 192~195쪽. 이 통계표에도 공소 이름이 ‘우러울’로 나오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어리울’로 고쳐 표기한다.

 

21) 위의 책, 224~225쪽.

22) 위의 책, 230~231쪽.

23) 위의 책, 250~251쪽.

24)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701쪽.

25) 1903년 12월 26일 미알롱 신부의 편지.

26)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구자료집 제2집 교세통계표》, 292~293쪽.

 

27) 한글학회 엮음, 《한국지명총람 4》(충남편) 상, 한글학회, 2001, 346쪽;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구자료집 제1집 – 지명 조사 보고서》, 호남교회사연구소, 1987, 46쪽.

 

28)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736~743쪽.

29)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267~268쪽.

30) 《한국 지명 총람》 4(충남편 상), 314쪽.

3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60쪽.

 

32) 《드망즈 주교 일기》, 60쪽의 각주 22번에는 장바탕이를 금산군 추부면의 장대리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필자(김정환)는, 드망즈 주교가 이동한 경로와 시간을 고려하여 진잠 장바탕이로 판단하였다.

 

33) 1924년 10월 12일 일기(《드망즈 주교 일기》, 507쪽).

34) 《한국 지명 총람》 4(충남편 상), 315쪽.

35)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천주교 대전교구 통계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0, 386~387쪽.

 

36) 목동본당 80년사 편찬위원회, 《목동본당 8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목동 교회, 1999, 68~71쪽;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한국인 성직자들의 편지》, 천주교 대전교구, 1990, 118~119쪽.

 

3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4, 694쪽.

1921~1922년 논산본당에서 보고한 통계표에는 ‘대전 원정’이 나오지만 연례보고서에는 별도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38)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705쪽. 위의 표 2를 보면 오리동의 신자들이 3년 연속 증가하고 있어 이 편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 거주자와 교적상 숫자 사이의 차이라고 추측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39)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서울교구 연보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81~82쪽; 100쪽

40) 《목동본당 80년사》, 68~71쪽.

41) 위의 책, 73쪽; 1919년 10월 23일 이종순 신부의 편지(《한국인 성직자들의 편지》, 118~119쪽).

42) 《목동본당 80년사》, 110쪽.

43) 오기선, 〈대전 대성당을 짓던 일〉, 《순교자들의 요람을 찾아서》, 태영사, 328~331쪽.

44) 《천주교 대전교구 통계자료집》, 428~429쪽.

 

45) 《목동본당 80년사》, 125~127쪽. 이름이 밝혀진 신자는 최복련(야녜스)이고, 그와 몇몇 여성 신자들이 함께 피신했었다고 한다.

 

46) 《사목계획서 1988》, 천주교 대전교구 유천동본당, 1988, 15쪽(미출판).

47) 2001년 ‘원내동본당’으로 설립되어 2006년 명칭을 변경한 ‘진잠본당’과 구분하기 위해 (구)를 첨부하였다.

48) 대전교구 공문 ‘사목500-74’(1979년 8월 30일).

 

49) 〈진잠본당 연혁〉(미출판). 이 연혁은 진잠본당(구)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지금은 내포교회사연구소의 ‘가수원본당’ 자료 파일에 보관되어 있다.

 

50)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 가톨릭 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37쪽(‘가수원본당’ 항목).

51) 대전교구 교구장 공문(1990년 1월 12일). 가수원본당의 주소지는 대전시 서구 가수원동 764-10번지였다.

52) 《천주교 대전교구 통계자료집》, 514~515쪽.

 

53) 권두경 마르코(1937년생), 김진태 니콜라오(1939년생)의 증언(2017년 6월 5일 진잠 성당에서 인터뷰). 진잠공소의 초기 역사는 이 증언과 몇몇 자료를 참조하여 재구성하였다.

 

54) 윤 레나타 회장은 1981년 10월 6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진잠본당 구즉공소를 건립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대전주보〉 515호 – 1981년 10월 18일 발행).

 

55) 성명은 임길순으로 성심당의 설립자이다. 1997년 88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김태훈,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남해의봄날, 2016(2쇄), 65쪽).

 

56) 대전교구 교구장 공문(제01-02호 2001년 1월 30일).

57) 대전교구 사무처 공문(제03-82호 2003년 9월 17일).

58) 진잠본당 공문 제09-20호(2009년 9월 30일).

59) 천주교 대전교구 60년사 편찬위원회 저, 《대전교구 6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2008, 130쪽.

 

* 본 논문은 2017년 7월 7일 ‘장안동지역의 천주교회사’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22359&Page=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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