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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 연구

111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17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 연구

 

 

합덕읍 신리 교우촌과 거더리 교우촌에 거주했던 천주교회의 주교 1명과 신자 42명이 1839~1870년 사이에 박해를 받아 죽은 사실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들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1839년에 1명, 1866년에 7명, 1867년에 7명, 1868년에 22명, 1869년에 3명, 1870년에 1명, 연도가 불분명한 시기에 1명이 박해로 죽었다. 이들 43명 가운데 37명은 배교를 거부하고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고, 1명은 감옥에서 병으로 죽었으며, 1명은 박해를 피해 산속의 토굴에서 지내다 병으로 죽었고, 3명은 배교하였으나 죽임을 당했다. 이 외에도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손씨 성을 가진 사람들로서 1839년에 순교한 손경서와 1866년 이후로 그들의 거주지와 가까운 지역인 해미 ‧ 홍주 ‧ 공주에서 순교한 손치황 ‧ 손자선 등의 시신은 후손들이 거두어서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의 묘역에 안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손씨 문중의 묘역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대전리 공동묘지에 이장한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들 가운데에는 손경서 ‧ 손치황 ‧ 손자선 등의 손씨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손씨의 선산인 대전리 254-8번지에서 목이 없는 시신 40여기를 발굴하여 대전리 공동묘지에 이장한 32기 무명 순교자 묘들 가운데는 1866년 후반에 붙잡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리 ‧ 거더리 신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생각된다.

 

 

Ⅰ. 머리말

 

합덕의 신리와 거더리 마을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살던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이나 원시장(베드로)이 살던 응정리(현 합덕읍 성동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때문에 이들 마을에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해졌다. 그 결과 이들 마을은 일찍부터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고, 또한 공소로 설정되었다.

 

특히 이들 마을은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촌, 또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 중의 하나로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또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사목활동 중심지로 삼아 활동했던 교우촌인 관계로 인하여 이들 마을에는 다블뤼 주교와 관련된 사적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들 교우촌은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겠다.

 

한편 신리 · 거더리 교우촌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 때부터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1866년부터 1870년까지 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는 신리 성지를 학문적으로 구명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차기진이 이미 주목한 바가 있고,1) 서종태도 무명 순교자 묘와 관련하여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다.2) 그리고 최근에 김성태가 밀양박씨(密陽孫氏)와 신리 교우촌의 관계를 규명한 연구가 있다.3)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 전체를 전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다.

 

이에 본고에서는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에 관한 사실 관계를 구명하고, 이어 그것을 토대로 신리 · 거더리 순교자 시신의 행방을 무명 순교자 묘와 관련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가 신리 성지를 학문적으로 구명하는 데 조금이나마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Ⅱ.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


1. 기해박해 순교자

 

신리 · 거더리 교우촌에서는 이미 1839년 기해박해 때부터 순교자가 나왔다.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4)가 바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신리 · 거더리 출신 최초의 순교자이다. 달레 책이나 《기해일기》에서는 그를 단지 ‘내포평야에 있는 홍주의 서민 집안 출신’5) 또는 ‘충청도 홍주 사람’6)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만, 훗날 신자들이 신리 출신 손여일과 손여도에 대한 증언에서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손자다”라고 밝히고 있는7) 점으로 보아 그가 신리 · 거더리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손경서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집이 부유하고 친척이 번성하였다.8) 사업에 능숙한 그는 교회의 일을 맡아 잘 보살폈으며, 유 방제 신부 때부터 교회를 위하여 많은 봉사를 하였다.9) 그는 1838년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홍주 감옥에 갇혔으나 돈을 바라는 수령에게 속량금을 많이 내고 함께 붙잡혔던 사람들과 함께 입으로만 배교하고 풀려났다.10)

 

집에 돌아와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그는 1939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바닷가의 안전한 곳에 집을 한 채 마련하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피신시킴으로써 입으로 배교한 잘못을 보속하고자 하였다.11) 앵베르 주교가 붙잡힌 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포졸들이 대신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고문함에 따라 자수하였다.12)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13) 그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생에 대한 애착에 유

혹되어 배교하였으나 나중에 배교를 취소하고 죄를 뉘우친 뒤 12월 21일14) 교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5)

 

 

2. 병인박해 순교자


(1) 1866년 순교자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시작하여 1872년까지 오랜 동안 지속되었다. 그 중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신리 거주 순교자들은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총 7명이 찾아진다. 이들 가운데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黃錫斗, 루카)와 손자선(토마스)은 1866년 박해 초기에 붙잡혀 순교하였다.

 

우선 1845년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다블뤼 신부는 1854년 무렵부터 조선의 풍습과 역사 및 천주교 순교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둠벙이 공소(현 공주군 신풍면 조평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6) 그는 1856년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순교자 전기의 편찬을 위임받아 본격적으로 교회사와 순교 자료 수집에 전념하였고, 1857년 3월 25일(양력) 계승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서품되었으며, 이후로 충청도 광천에 거처를 두고 조선 순교사 자료 수집과 집필에 몰두하였다.17) 1857년 12월(양력)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의 선종으로 3개월 동안 교우촌을 순방한 뒤 광천으로 돌아왔으며, 1859년까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완성하여 파리로 보내고, 1860년에 《조선사 서설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완성하여 1862년 10월(양력) 홍콩의 리브와(Libois) 신부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발송하였다.18)

 

다블뤼 주교는 1861년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선종으로 경상도 중부와 남부 지역을 맡아 순회하였고, 1861년 10월(양력)에는 ‘성모성탄구역’(충청도 홍주와 내륙 지역)을 맡아 교우촌 순방에 나섰으며, 1863년 9월(양력)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그의 사목 관할 구역까지 맡아 순방하였는데, 이때 신리를 방문하여 손자선의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19) 그는 1865년에 ‘방사골’(Pang-sa-kol, 혹은 방아사골)에 거처했는데, 이웃집에서 옮겨 붙은 화재로 조선어와 한문으로 기록된 순교자 관련 원본들을 모두 소실 당하였으며, 1865년 10월(양력)부터 신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황석두 회장과 함께 손자선의 집(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63-3)에 거처하였다.20)

 

다블뤼 주교는 1866년 1월 25일(양력)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주교들을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대원군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다시 내포로 돌아와 공소 순방을 하고 있던 중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브르트니에르(Bretenières, 白) 신부의 쪽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에게서 좋은 소식이 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다블뤼 주교로서는 맹렬한 박해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정에서 러시아인들에 관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주교들과 선교사들을 가까이 두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선교사들을 추적하러 내려온 포졸들이 신부들의 소재를 밝혀내고자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고문하는 것을 보고서 그는 잠시 동안 자수할 생각을 하였다. 또한 그러한 자기의 생각을 페롱 신부와 리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기도 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는 급히 사태에 대한 설명과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것은 불란서에 대한 모욕이요, 중국 황제에 대한 모욕이라는 내용을 써서 몇몇 신자 뱃사공에게 주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서양 배나 중국 배에 그 편지를 전하게 했다. 아직 뱃사공이 출발하지 않았는 데, 베르뇌 주교와 그의 세 동료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다블뤼 주교는 포교지가 처하여 있는 급박한 위험에 대하여 자세히 적은 편지 한 장을 또 써서 주며 함께 전하게 했다.21) 두 통의 편지를 받아 바다로 나간 뱃사공은 보름 동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중국 밀수업자들의 작은 배를 만나 편지를 전했다.22)

 

박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신자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수원 고을 새암골(泉谷里)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던 오메트르(Aumaître, 吳) 신부가 사목활동을 중단하고 거더리로 찾아오자 다블뤼 주교는 20리 떨어진 세거리(현 당진군 합덕읍 대합덕리의 삼거리인 듯) 마을에 있던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셋이서 함께 온 하루를 보낸 뒤 헤어졌다. 세 사람은 자기들의 존재가 신자들에게 너무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내포 같은 평야지대에서는 도주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블뤼 주교는 거더리에 그대로 남았고, 오메트르 신부는 15리 떨어진 소덜(쇠재, 현 예산군 봉산면 금티리)로 갔으며, 위앵 신부는 세거리로 돌아갔다. 그 뒤 포졸들이 거더리와 소덜 마을에 출동하여 이틀 동안 7차례나 탐색을 하자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는 식량도 준비하지 않은 채 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려고 했으나 역풍이 일어 이틀 동안 해안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계속 배에 있는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떠났던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23)

 

다블뤼 주교는 거더리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9)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3월 11일(양력) 포졸들이 배론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박 필립보를 길잡이로 앞세우고 거더리 마을에 출동하였다. 이때 그는 신자들의 간청에 따라 제의류를 담은 바구니를 숨겨놓은 나뭇더미 속에 숨었는데, 손치호 집을 수색하던 포졸 한 사람이 나뭇더미를 발로 걷어차서 바구니와 주교의 머리를 찾아냈다. 다블뤼 주교는 일어나 순순히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졸들이 다른 선교사들의 소재를 말하라고 재촉하자 다블뤼 주교는 이미 도주의 기회가 일체 사라졌다고 확신하고서 신자들에게 쓸데없이 약탈과 고문을 당하거나 배교를 할 위험을 무릅쓰지 않게 하려고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불러와 자수하게 하여 함께 체포되었다.24) 다블뤼 주교는 위앵 ·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신앙을 굳게 증거하여 군문효수 형을 선고 받았으며, 2월 14일(양력 3월 30일) 충청도 수영(水營)이 있던 보령 갈매못(渴馬津頭, 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25)

 

황석두는 원래 연풍(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의 병방골) 사람으로 19세 때인 1832년부터 스승인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1834년에 영세 입교한 뒤 가정의 박해를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1842년 무렵에는 가족들도 모두 그를 따라 입교하여 평해황씨(平海黃氏)의 가정공동체를 형성하였다.26)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éol, 高) 주교가 그를 신부로 만들려고 하자 그의 아내가 그와 헤어져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함에 따라 그는 다블뤼 신부에게 몇 년 동안 신품 공부를 하였다.27) 그러나 조선에 정식으로 세워진 수녀원이 없어서 교황청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신품 공부를 그만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하여 1858년부터 페롱(Féron, 權)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였고, 이어 베르뇌 주교와 조안노(Joanno, 吳) 신부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28) 뒤에 베르뇌 주교가 그를 다블뤼 주교에게 소속시켜 책 저술과 교정을 돕게 하자 양자인 황천일(黃千一, 요한)에게 페롱 신부의 복사 일을 맡기고, 그는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전교 활동을 도왔으며 함께 교회 서적을 번역하였다.29) 이어 다블뤼 주교가 1865년 10월(양력)부터 신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자 그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손자선의 집에 거처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3월 11‧12일(양력) 다블뤼 주교와 위앵 · 오메트르 신부가 거더리에서 붙잡혔을 때, 그도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다블뤼 주교가 포졸들에게 풀어주도록 요청하여 모두 풀려났으나 그만은 떠나기를 거절하고 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다블뤼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자원하여 그도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30) 그는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신앙을 굳게 증거함에 따라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으며, 3월 30(양력)일 다블뤼 주교 및 위앵 · 오메트르 신부 등과 함께 충청도 수영이 있던 보령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31)

 

손자선은 홍주 거더리 살던 사람으로서 손치황의 아들이고 손자여의 동생이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의 5촌 조카였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부모와 형과 온 집안이 계명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친척도 다 신자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뤼 주교가 3월 11일(양력) 거더리에서 체포된 지 4~5일 뒤에 덕산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의 몇몇 신자 집을 약탈했는데, 덕산 수령이 훔친 물건을 돌려주게 하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손자선이 대표로 그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 관아로 갔다. 그러나 덕산 수령은 약속은 지키지 않고 손자선에게 천주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손자선은 과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옥에 갇혔다. 그가 모진 형벌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자 덕산 수령은 그를 공주로 이송하였다. 그는 공주에서도 역시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2월 15일(양력 3월 31일) 교수형을 받아 2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32)

 

정정심(가브리엘)은 신리33)에서 살다가 1866년 11월에 해미 포교에게 붙잡혀 해미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해미로 붙잡혀 간 교우는 20명이었다. 그는 해미에서 심문을 받은 뒤 11월에 교수형을 받아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34) 함께 붙잡혀 간 교우가 20명이나 될 정도로 많았던 점으로 보아, 그는 병인양요 이후에 박해가 격화된 1866년 후반에 붙잡혀 순교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 아드리아노는 본디 신창 용당리 출신이었다. 그는 기해박해 때 붙잡혔으나 배교하고 풀려난 뒤 1863년 이전에 계명을 지키며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하기 위해 거더리로 가서 살다가 1866년 박해를 당하여 처음에는 피신했다가 나중에 붙잡혀 홍주에서 심문을 받고 그곳에서 1866년에 교수형을 받아 6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35) 처음에 피신했다가 나중에 붙잡힌 점으로 보아, 그는 병인양요 이후에 박해가 격화된 1866년 후반에 붙잡혀 순교한 것으로 믿어진다.

 

손사중은 손치황(요한)의 오촌 조카로 신리에서 살다가 1866년 박해 때 여러 사촌 형제들과 한가지로 붙잡혀 해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그곳에서 40여 명36)과 함께 한날에 교수형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37) 40여 명이 함께 한날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점으로 보아, 그는 병인양요 이후에 박해가 격화된 1866년 후반에 붙잡혀 순교한 것으로 믿어진다.

 

손치황(요안, 아우구스티노)38)은 손자여(갈리스도)와 손자선의 부친으로 신리에서 살다가 1866년 박해 때 차남 손자선이 공주에서 순교한 뒤에 장남 손자여를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붙잡혀 순교하였다.39) 그가 순교한 장소와 연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증언 자료에는 한결같이 그가 해미 포교에게 붙잡혀 해미에서 심문을 받고 그곳에서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고 되어 있고40), 그의 장남 손자여에 대한 증언 자료에는 1868년 박해 때 부자가 한가지로 경포(京捕)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41) 그의 부자에 대해 그의 손자가 증언한 자료에는 그가 홍주에서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을 찾아다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42) 그런데 손자여는 1868년 윤 4월 17일 포도청에서 자기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고 진술하였다.43) 이 손자여의 진술로 볼 때 부자가 함께 1868년에 붙잡혀 서울에서 순교했다는 증언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신을 찾아다 장사지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1866년 겨울에 해미나 홍주에서 순교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2) 1867년 순교자

 

1867년 박해 때 순교한 신리 거주 순교자들은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총 7명이 찾아진다. 이이들 가운데 이영여는 본디 홍주 거더리 사람으로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년에 서울로 가서 착실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1866년 박해를 만나 서울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자 다시 시골로 내려와 살다가 1867년에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3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44)

 

김양범(빈첸시오)과 김선행(필립보)은 부자간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 원주 감영에서 순교한 김강이(시몬)의 차남과 손자이다.45) 이들 부자는 뒤에 거더리로 이사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신부의 복사를 하다가 1866년 박해를 만나 피신했는데, 1867년 가을에 먼저 아들 김선행이 수원 포교에게 붙잡혀 수원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고, 아버지 김양범도 같은 해 9월에 며느리를 보러 갔다가 수원 포교에게 붙잡혀 수원에서 매를 맞다가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 다.46)

 

손 마르첼리노는 본디 홍주 신리 사람으로서 1866년 박해 때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경포에게 붙잡혔으나 다블뤼 주교가 포졸들에게 풀어주도록 요청함에 따라 선교사들만 서울로 붙잡아가고 신자들은 놓아주었기 때문에 곧 풀려났다. 그는 집에서 지내다가 그 이듬해인 1867년에 홍주 포교들이 그의 재물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탐내 그를 체포함에 따라 홍주로 압송되어 그 해 11월 29일 여러 교우와 한가지로 교수형을 받아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47)

 

손사준은 손치호 회장의 조카로 홍주 신리에서 살았다. 1866년 박해를 만나 그의 여러 일가들이 많이 붙잡혀 순교하였으나 그는 피신생활을 하며 체포를 면했다. 그러던 중 그는 1867년에 잠깐 집에 들려 박해의 상황을 알아보려 하다가 홍주 포교에게 붙잡혀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3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48)

 

손자진은 1866년에 해미에서 순교한 손사중의 사촌이자 손 마르첼리노의 재종으로 홍주 신리에서 살며 아이 적부터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워 믿었다. 1866년 박해를 당해 여러 일가와 서양 선교사들이 다 잡혀 순교함을 원통히 생각하며 날을 보내다가 1867년에 홍주 포교에게 붙잡혀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49)

 

손 루시아는 본디 홍주 신리 사람으로서 병인박해를 당해 남편이 홍주로 붙잡혀 간 일로 관아에 들어갔는데, 먼 일가 되는 벼슬아치가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서 살라고 해서 가족들을 이끌고 산골짜기로 들어가 굴을 파고 지내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1867년 3월 18일 그곳에서 39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50)

 

(3) 1868년 순교자

 

1868년 박해 때 순교한 신리 거주 순교자들은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총 22명이 찾아진다. 이들 가운데 손치호(니고나오)는 홍주 거더리 사람으로서 손치황의 4촌이고 3대 교우였으며 1861년 이전부터 거더리 공소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866년 박해를 당해서는 몸을 피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1868년 4월 박해 때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 그해 4월에 교수형을 받아 56(또는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51)

 

손여일(孫汝一, 필립보)은 홍주 신리 사람으로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의 손자이고 손자선의 7촌 조카이다. 그는 심문을 받던 1868년 당시로부터 4년 전인 1864년에 손자선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1865년에 다블뤼 주교에게 손자선 집에서 영세를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부모가 모두 일찍 죽고 삼촌과 한가지로 있다가 1866년 박해를 당했는데, 이때 서양 선교사들과 신자 무리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가 1868년에 경포에게 여러 일가와 한가지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윤 4월 19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는 과정에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때 그는 겁을 먹고 배교하고 공부를 폐기한 지가 3년이 넘는다고 진술하였다.52)

 

손여회(孫汝會, 필립보)는 홍주 신리 사람으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의 손자이며 손자중의 아들이다. 그는 천주교를 7~8세 때인 1854~1855년에 아버지에게서 배웠으며, 1865년에 박가의 집에서 다블뤼 주교에게 영세를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1866년 박해 때 붙잡혀 수원 옥에 갇혔으나 배교하고 풀려났으며, 그의 아버지 손자중도 1866년 박해 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는 1868년 박해 때 경포에게 4촌 종형제와 7촌과 함께 네 사람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윤 4월 17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천주교를 영원히 배척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수형을 받아 21세의 나이로 죽었다.53)

 

손자중(孫子仲, 바오로)은 본디 홍주 신리 태생으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아버지 손경서에게 8세 때 천주교를 배웠고, 21세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1868년 박해 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윤 4월 12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52세의 나이로 죽었다. 당시 그는 기해박해 때 붙잡혀 죽임을 당한 손경서의 자식된 자로서 사학은 철천의 원수이기 때문에 배척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으며, 여태까지 친한 교우를 헤아려 이름을 기록해 바쳐 앞서의 죄를 갚는 바탕으로 삼겠다고 진술하였다.54)

 

손자여(孫子汝, 갈리스도)는 홍주 신리 · 거더리 사람으로 손자선의 형이고 손치호의 당질이며 손자중의 6촌이다. 그는 1864년쯤에 이미 순교한 아버지 손치황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1865년 봄에 다블뤼 주교에게 견진을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1866년 박해를 당해 낮에는 피하고 밤에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다시 나가는 식으로 체포를 면했다가 1868년 박해 때 경포에게 일가 두 사람과 다른 신자 한 사람과 함께 4명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윤 4월 17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배교할 수 없다고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윤 4월 17일경에 포도청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55)

 

손조이(孫召史)는 교회측 기록에 의하면, 거더리 사람으로서 다블뤼 주교의 복사를 3년이나 하다가 1867년에 박해를 만나 7~8월 사이에 홍주에서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김 서방 및 손자중과 같은 날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으며, 김 서방은 1868년 7~8월 사이에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손조이와 같은 날 순교했다고 되어 있다.56) 그런데 손자중은, 앞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1868년 윤 4월 12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손자중과 같은 날 순교한 것이 맞는다면, 그녀는 1848년 윤 4월 12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날 순교한 김 서방의 체포 시기가 이미 순교한 뒤인 1868년 7~8월 사이로 잘못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체포된 시기도 1867년 7~8월 사이가 아니라 순교한 시기로부터 멀지 않은 1868년 윤 4월경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손치양(孫京老, 사도 요한)은 홍주 거더리 사람으로서 4형제 중 막내였으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의 4촌이었다. 1866년 박해를 당해 그의 여러 일가들이 많이 붙잡혀 순교했으나 그는 몸을 피해 두루 다니며 체포를 면했다. 그러던 중 1868년 4월에 박해가 일어나 수원 포교에게 붙잡혀 수원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를 도굴할 때 참여한 배 주인이라는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그 해 5월에 충청도 수영이 있던 보령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57) 그런데 《고종실록》 5년(1868) 5월 29일(을사)자 기사에 보면, “손경로(孫京老)라는 자가 서양 선박이 구만포에 와서 정박하고 있을 때 먼저 환호하며 소리 지르고 그 이양선에 올라가서 오랑캐들의 모자를 쓰고 춤을 춘 사실에 대해 자복했다”고 있고, 이어 죄인 손경로 등을 충청도 수영이 있던 갈매못으로 압송하여 군민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하게 한 내용이 있다. 이로써 보아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손치양은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손경로와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손여도는 홍주 거더리 살던 사람으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의 손자이고 손자중의 장자이다. 1866년 박해를 당해 여러 서양 선교사들과 일가들이 붙잡혀 순교했으나 그는 체포를 면했으며, 1868년 박해를 당해 그의 종형제는 서울로 붙잡혀 가 순교하고 그는 홍주 포교에게 붙잡혀 홍주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관원이 재물을 둔 곳을 대라며 혹형을 가했으나 그는 아무 재물도 없다고 진술하였으며, 옥에 갇힌 3달 만에 교수형을 받아 3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58)

 

손치경(孫致景, 안드레아)는 홍주 태생으로서 1868년 당시로부터 15년 전인 1853년에 아버지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1866년 1월쯤에 다블뤼 주교와 위앵 ·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 뵈었는데, 이때 다블뤼 주교에게 견진을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1866년 박해 이후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1868년 박해 때 붙잡혀 그해 윤 4월 12일 서울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배교를 거부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심문 도중에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59) 그런데 ‘홍주 신리 태생’을 ‘홍주 태생’으로 기록한 경우도 많은 점과 신리 마을 신자들인 손치황 · 손치양 등과 돌림자가 같은 점, 그리고 다블뤼 주교와 위앵 ·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 뵙고 다블뤼 주교에게 견진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리 · 거더리에 사는 신자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오흥여(吳興汝, 루치아)는 본디 면천 굴미 사람으로서 신창 남방재로 이사하여 살았으며, 중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1866년 박해를 당해 홍주 거더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1868년 4월 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었으며,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5월 5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비록 사악한 무리가 그에게 이르렀지만 서양 사람을 만나보거나 교우와 상종한 일이 참으로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4월경에 처형을 당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60)

 

배성로(裵成魯, 안드레아)는 본래 홍주 신리 태생으로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25세 때인 1864년에 황석두 집에서 다블뤼 주교에게 견진을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1868년 박해 때 체포되어 그해 6월 20일 서울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2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61)

 

송구현(宋龜鉉, 도미니코)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본디 청주 태생으로 1868년 당시로부터 7년 전인 1861년에 홍주 신리로 이주했다고 진술했다.62) 그러나 교회측 기록에는 그는 본디 서울서 살던 양반 출신이라고 되어 있다.63) 이 두 자료는 서로 모순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두 자료로 볼 때, 그는 본디 서울서 살던 양반 출신으로서 청주로 가서 살다가 1861년에 다시 홍주 신리로 이주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30세 때인 1833년에 손자중의 아버지인 손경서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뒤에 다블뤼 주교에게 공소에서 영세하고 세례명을 지었다.64) 그는 1866년 박해를 당해 몸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다니다가 1868년 박해 때 서울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거리에서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6월 20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배교를 거부하였다.65) 그리하여 그는 그해 7월에66) 6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67)

 

이사성68)은 홍주 거더리 사람으로서 1866년 박해 때 수원 포교에게 붙잡혀 가다가 도망하였으며, 그 뒤 1868년 박해 때 다시 홍주 포교에게 붙잡혀 홍주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그해 7월에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69)

 

박영신(朴永信, 안토니오)은 본디 경기도 용인 사람으로서 홍주 거더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는 심문을 받던 1868년 당시로부터 10년 전인 1859에 손자선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1868년 당시로부터 5년 전인 1863년에 손자선의 권유로 그의 집에서 다블뤼 주교에게 견진을 받고 세례명을 지었다. 그는 1866년 박해를 당해 피신하여 박해를 면했으나 1868년 박해 때 경포에게 붙잡혀 그해 윤 4월 17일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해 윤 4월경에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70)

 

박 마티아와 그의 사촌인 박충만 · 박태양 · 박충복과 박충복의 아내는 홍주 섬말(島里, 거더리)71) 살다가 1868년 박해 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들 5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순교할 당시의 나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박 마티아 1명뿐인데, 그의 순교할 당시 나이는 25, 6세였다.72)

 

조 모니카는 수원 걸매서 살다가 홍주 섬말73)로 이사하여 살던 중 1868년 박해 때 수원 포교에게 붙잡혀 수원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이질에 걸려 옥중에서 50여 세의 나이로 옥사했다.74)

 

간 그레고리오(또는 필립보)와 신 그리산도는 각기 본디 연풍 사람과 덕산 개산 사람으로서 동정을 지키며 살다가 중년에 서로 만나 홍주 거더리 근처에서 살았으며, 뒤에 함께 공주 무성산에 들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병인박해를 당해 다른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자 다시 홍주 거더리 근처로 돌아와 살다가 1868년 박해 때 홍주 포교에게 함께 붙잡혀 홍주에서 심문을 받고 교수형을 받아 간 그레고리오(또는 필립보)는 63세, 신 그리산도는 51세(또는 52세, 5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75)

 

(4) 1869년 순교자

 

1869년 박해 때 순교한 신리 거주 순교자들은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총 3명이 찾아진다. 이들 가운데 이사성(요한)은 홍주 신리에 살던 사람으로서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다니다가 1869년 10월에 남양 포교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40여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76)

 

백청여는 본디 대흥에서 살다가 홍주 신리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이사성(요한)과 한가지로 1869년 10월에 남양 포교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45여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77)

 

이 안드레아는 홍주 거더리78)에 살던 사람으로서 1866년 박해를 당해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1869년 2월에 공주 포교에게 붙잡혀 공주에서 심문을 받고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교수형을 받아 2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79)

 

(5) 1870년 순교자

 

1870년 박해 때 순교한 신리 거주 순교자들은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박춘화 1명이 찾

아진다. 박춘화는 본디 홍주 섬말80) 에서 살다가 홍주 신리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1870년에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30여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81)

 

(6) 순교한 연도가 불명확한 순교자

 

순교한 연도가 불명확한 신리 거주 순교자들은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임 프란치스코와 손복록 2명이 찾아진다. 임 프란치스코는 홍주 거더리 살던 사람으로 수원 포졸에게 붙잡혀 수원에서 순교하였다.82) 그러나 그가 붙잡혀 순교한 시기는 잘 알 수가 없다.

 

손복록은 손자진의 재당질(또는 당질)로서 여러 일가들은 먼저 붙잡혀 순교하였고, 그는 나중에 붙잡혀 해미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교수형을 받아 1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83) 그의 여러 일가들이 먼저 붙잡혀 순교한 점으로 보아 그는 신리에 거주하던 신자로 판단되며, 그가 붙잡혀 순교한 시기는 1867년 이후로 보아진다.

 

 

Ⅲ.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와 무명순교자 묘

 

앞장에서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장에 서는 앞 절에서 알아본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이 순교를 당한 뒤 그들의 시신이 어떻게 수습되고 안장되었는지 그 행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 시신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손경서는 1839년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 그해 12월 21일84)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 손경서 외에는 신리 · 거더리 신자들 가운데 순교한 자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신리 · 거더리는 기해박해 때 손경서가 순교를 당한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손경서가 살던 신리 · 거더리는 주민들이 이미 1785~1789년 사이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일찍부터 교우촌을 이루었고85), 1836년 11월 25일 모방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줌으로써 공소로 설정되었다.86)

 

게다가 손경서의 온 집이 부유하고 친척들이 번성한 데다87) 그의 자식들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나 집안사람들이나 공소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에 매장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생전에 너그러운 성품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을 많이 베풀어 주었고 교회를 위해서도 많은 봉사를 하였다는88) 점을 고려할 때, 그가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그의 가족들이나 집안사람들이나 공소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의 선산에 안장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거두어진 손경서의 시신은 어디에 안장되었을까 궁금하다. 그가 생전에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여 효성으로 이름이 났고 집안을 항상 화기애애하게 유지하여 친지들의 감격을 자아

냈던89) 만큼 그의 시신은 당연히 손씨 문중 묘역에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나 집안사람들이나 공소 신자들은 그의 순교를 거룩하게 기리며 그의 묘소를 자주 찾아가 참배하고 잘 관리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묘는 대전리 공동묘지의 14기 무명 순교자 묘가 원래 놓여 있던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 즉 부잣집 묘처럼 사성이 크게 잘 갖추어져 있고 고덕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환히 보이는 썩 좋은 묏자리90)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대전리 공동묘지로 이장한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 가운데는 손경서의 유해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음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리 · 거더리 신자들 시신의 행방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1866년 박해 초기에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은 그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안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866년 2월 14일 충청도 수영이 있던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의 시신과 장주기(요셉)의 시신은 형장의 모래밭에 묻혔으나91) 황석두의 시신은 그의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안장되었다.92)

 

그리고 1866년 2월 15일 공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손자선의 시신도 그의 형 손자여에 의해 거두어져93) 대전리 공동묘지의 14기 무명 순교자 묘가 원래 놓여 있던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 안장되었다.94) 그러므로 이곳에서 대전리 공동묘지로 이장한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 가운데는 손자선의 유해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병인양요 이후에 박해가 격화된 1866년 하반기에 해미와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정정심 · 김 아드리아노 · 손자중 · 손치황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앞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홍주(또는 해미)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손치황의 시신은 거두어 안장되었다. 이러한 손치황의 예로 보아 해미와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정정심 · 김 아드리아 노 · 손자중의 시신도 역시 거두어 안장되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물론 그들의 시신도 대부분 뻐궁산 또는 개골산으로 불리는 손씨들 선산에 안장되었을 것인데, 손자중과 손치황의 시신은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 안장된 반면에 정정심과 김 아드리아노의 시신은 다른 곳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므로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서 대전리 공동묘지로 이장한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 가운데는 손자중과 손치황의 유해도 함께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신리 · 거더리 신자들의 실제 수는 앞에서 알아본 6명보다 훨씬 많았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신자들이 1868년에 순교한 손치양에 대해 증언하면서 “1866년 박해 때 여러 일가가 많이 잡혀 죽었다”고 한 것과 1867년에 순교한 손사준에 대해 증언하면서 “여러 일가들이 먼저 잡혀 많이 죽고 집을 피하여 다녔다”고 한 것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달레 책에서 “다블뤼 주교 일행이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거더리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에 조선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 중의 하나였던 신리 · 거더리 마을이 점령당한 도시 같은 취급을 받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95)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여기서 신리 · 거더리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신자들이 대거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신리 · 거더리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는 병인양요 이후 박해가 격화된 1866년 후반에 벌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1866년 8월에 프랑스 군함이 천주교 신자들의 물길 안내로 한강을 따라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오고 9월에 강화도를 점령하여 한강을 봉쇄하자 집권자인 대원군은 그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돌려 박해를 강화하는 한편 9월 15일부터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양화진)으로 옮겨 주로 서양과 내통한 신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함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남김없이 제거하여 서양과의 내통을 막는 방안을 의정부가 1866년 10월 15일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서양 배가 먼 바다를 건너와서 제멋대로 침략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 염탐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서둘러 해야 할 일은 사악한 천주학의 무리들을 제거하여 남김없이 모두 없애버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이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형조, 한성부, 사헌부와 사간원, 좌·우포도청에서, 그리고 지방에서는 팔도와 네 유수도(留守都) 및 각 진영에서 사악한 천주학의 무리들과 관계되는 자들을 모두 수색해 체포하여 매달 월말에 그 결과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20명 이상을 체포할 경우에는 좋은 지역의 변장(邊將) 자리를 만들어 임명해 보내고, 만약 허위로 채워서 보고하였거나 진짜와 가짜가 뒤섞였거나 또한 혹 혐의로 인한 악감을 품고 일반 백성들을 잘못 체포할 경우에는 해당 군교와 하인들에게는 잘못 체포된 사람이 받는 처벌과 같은 형벌을 적용하며, 단단히 타이르지 못한 각 해당 당상관, 감사와 병사 · 수사 및 토포사에 대해서는 모두 무거운 죄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96)

 

서양과 내통한 무리들을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죄인의 체포를 담당하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장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수색해 체포하여 매달 월말에 그 결과를 의정부에 보고하게 하고, 아울러 20명이상의 신자를 체포한 사람에게는 좋은 지역의 변장(邊將) 자리를 만들어 임명하여 포상하되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한 관장은 모두 엄히 처벌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이러한 의정부의 제의는 그대로 받아들여져 시행되었다.97)

 

이러한 조정의 지시를 받은 전국 각지의 포졸들은 출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었을 것이 뻔하다. 충청도의 홍주 · 해미 · 공주의 진영에 소속된 포졸들은 특히 다블뤼 주교가 사목활동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였고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체포되었던 신리 · 거더리 교우촌을 중요한 표적으로 삼아 먼저 그곳 신자들을 대거 체포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신리 · 거더리가 당시 가장 큰 교우촌이었다는 점98)과 조선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 중의 하나였다는 점99)을 고려할 때 신리 · 거더리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기록이 교회측 자료나 관변측 자료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그들이 몇 명이나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는지 알 길이 없다. 교회측 기록과 관변측 기록에 누락된, 1868년에 충청도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기록이 많이 있었음이 《공충도사학죄인 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필사본)에 의해 밝혀진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교회측 기록과 관변측 기록에 대거 누락된 신리 · 거더리의 1866년 순교자들도 마찬가지로 충청도에서 참수형을 당한 자들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한 것이 바로 대전리 254-8번 지의 목이 없는 40여기 묘100)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해석이 맞는다면, 이곳에서 이장한 대전리 공동묘지의 32기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는 병인양요 이후 박해가 격화된 1866년 후반에 참수형을 당한 신리 · 거더리 신자들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1867년 이후에 순교한 신리 · 거더리 신자들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1876년에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손 마르첼리노 · 손사준 · 손자진 등의 시신은 순교지가 신리 · 거더리에서 가까우므로 가족 등에 의해 수습되어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대전리 공동묘지로 이장한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 가운데는 손 마르첼리노 · 손사준 · 손자진 등의 유해도 함께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수원에서 순교한 김양범 · 김선행 부자와 서울서 순교한 이영여의 시신은 순교지가 신리 · 거더리에서 멀기 때문에 아마도 수습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Ⅳ. 맺음말

 

이제까지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에 관해 여러 모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글을 통하여 알아본 몇 가지 사실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신자는 손경서 1명뿐인데, 신리 · 거더리의 최초의 순교자이다. 병인박해 때는 1866년에 7명, 1867년에 7명, 1868년에 22명, 1869년에 3명, 1870년에 1명, 순교한 연도가 불명확한 1명 등 모두 42명이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었다.

 

이들 42명 가운데 37명은 배교를 거부하고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고, 1명은 옥사하였으며, 1명은 박해를 피해 산속의 토굴에서 지내다 병사하였고, 3명은 배교하였다. 그밖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무명 순교자가 다수 있었다.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손경서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인 1866년에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과 홍성(또는 해미)에서 순교한 손치황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 안장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또한 1866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손자중, 1867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손마르첼리노 · 손사준 · 손자진, 1868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손여도, 1867년 이후에 해미에서 순교한 손복록 등의 시신은 순교지가 신리 · 거더리에서 가깝거나 그리 멀지 않으므로 가족 등에 의해 수습되어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대전리 공동묘지로 이장한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 가운데는 그들의 유해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교회측 기록이나 관변측 기록에 누락된 1866년 후반에 붙잡혀 순교한 신리 · 거더리 신자들이 많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것이 대전리 공동묘지 32기 무명 순교자 묘가 원래 놓여 있던 대전리 254-8번지의 목이 없는 40여기 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1868년에 보령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손치양의 시신도 가족 등에 의해 수습되어 대전리 254-8번지의 목이 없는 40여기 묘역에 안장되지 않았을까 한다.

 

아울러 1866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정정심 · 김 아드리아노, 1868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이사성 · 간 그레고리오(필립보) · 신 그리산 도와 공주에서 순교한 이 안드레아 등의 시신도 수습되어 손씨 선산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신은 대전리 120-8번지의 손씨 문중 묘역이나 대전리 254-8번지의 목이 없는 40여기 묘역이 아닌 다른 곳에 안장되었을 것이다.

 

한편 1867년 이후에 수원이나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은 순교지가 신리 · 거더리와 멀므로 가족 등에 의해 수습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참고문헌]


1. 원사료 및 사료번역본

 

《고종실록(高宗實錄)》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필사본)

《기해일기》(황석두루가서원 국역영인판, 1986)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병인치명사적》(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필사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치명일기》(황석두루가서원 국역영인판, 1986)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보경문화사 영인본, 1985)

샤를르 달레 저,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중·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579번〉(A-MEP, Vol.579)

〈한불관계자료(1866~1867) -병인양요-〉, 《교회사 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2. 연구논저

 

김성태, 〈신리 교우촌과 밀양 손씨(1)〉, 《교회와 역사》 2010년 8월호.

―――, 〈신리 교우촌과 밀양 손씨(2)〉, 《교회와 역사》 2010년 9월호.

서종태, 〈신리 무명 순교자 묘에 대한 연구〉, 《한국사회와 천주교》, 디지인흐름, 2007.

유한영,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 탄생 185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2006

 

차기진, 〈박해기의 신리(거더리) 공소와 순교사〉, 《여사울 · 성거산 · 신리 · 갈매못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2007.

―――, 〈신리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신리 성지의 사적과 순교자에 대한 종합적 고찰》(세미나 자료집), 2008.

―――, 〈조선 후기 충청좌도의 천주교 전파 과정 연구〉, 《한국 천주 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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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기진, 〈신리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신리 성지의 사적과 순교자에 대한 종합적 고찰》(세미나 자료집), 2008.

2) 서종태, 〈신리 무명 순교자 묘에 대한 연구〉, 《한국사회와 천주교》, 디지인흐름, 2007.

3) 김성태, 〈신리 교우촌과 밀양 손씨(1)‧(2)〉, 《교회와 역사》 2010년 8~9월호.

 

4) 최근에 김성태가 손경서 집안의 족보를 발굴하여 자료로 활용한 연구에 의하면, 손경서(보명은 敬奎)는 밀양손씨(密陽孫氏) 명천공파(明泉公派)의 일족으로 명천공(明泉公) 6세손 한(漢)이 1664~1690년 사이에 신리에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밝혔다.(김성태, 〈신리 교우촌과 밀양 손씨(1)〉, 《교회와 역사》 2010년 8월호, pp.47~49).

 

5)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p.423

6)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p.176.

7) 《병인치명사적》(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필사본) 23권, pp.16~17, 23; 《치명일기》 649번.

8) 《기해일기》, p.176.

9)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423.

10) 위와 같음.

11) 위와 같음.

12)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488.

 

13) 그의 손자 손여회가 1868년에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저의 할아버지가 연전에 천주교를 믿은 일로 서울 포도청에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진술한 점으로 보아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4)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11월 21일’로 되어 있다(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526 각주 40).

 

15)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526.

16) 차기진, 앞의 글, pp.7~9.

17) 차기진, 앞의 글, p.8.

18) 차기진, 앞의 글, p.8.

19) 위와 같음.

20) 차기진, 앞의 글, pp.8~11.

 

21) 두 통의 편지 가운데 둘째 편지는 도중에서 없어졌고, 첫째 편지는 사건이 있은 지 오랜 뒤에 만주의 베롤 주교에게 전해졌다(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25). 다블뤼 주교의 첫째 편지를 전달할 사명을 띤 2명의 조선인 밀사는 6월 17일 요동에 이르러 베롤(Verrolles) 주교에게 그 편지를 전달하였다. 이어 6월 18일 베롤 주교는 로즈(Roze)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의 박해를 알리는 동시에 단호한 보복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로즈 사령관은 이 편지를 8월 하순에 홍콩에서 받았다(〈한불관계자료(1866~1867) -병인양요-〉, 《교회사 연구》 2, pp.197~200).

 

22)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24~425

23)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25~426.

24)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26~428.

 

25) 《포도청등록》 중, 보경문화사, 1985, pp.620~621 및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34~435.

 

26) 차기진, 〈조선 후기 충청좌도의 천주교 전파 과정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p.241.

27)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29.

28)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29~430.

29)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29 및 《병인치명사적》 8권, pp.26~28.

30)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28~429.

 

31) 《포도청등록》 중, 보경문화사, 1985, pp.620~621 및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34~435.

 

32)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그가 체포된 경위가 다르게 되어 있다. 즉, 그는 1866년 병인박해를 당하여 피신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지냈다. 그의 삼촌이 체포를 면하기 위하여 덕산 관아에 돈을 바쳤었는데, 수령이 그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삼촌이 그의 형에게 가서 돈을 찾아오게 하였으나 그의 형이 가기를 꺼렸으므로 그가 대신 가서 덕산 수령에게 돈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그러자 관속들이 그 돈을 먹지 못하게 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수령에게 그를 고발하여 그는 체포되었다는 것이다(《병인치명사적》 7권, pp.4~8, 10권, pp.4~7).

 

33) 증언 자료에 보면, 정정심이 살던 곳을 홍주 신리라고 하기도 하고(《치명일기》 714번,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5번,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174 : 《병인치명사적》 21권, p.141, 《치명일기》 714번), 덕산 신리라고 하기도 하였다(《병인치명사적》 6권, p.55).

 

34) 《병인치사적》 6권, p.55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5번, p.174 ; 《병인치명사적》 21권, p.141 ; 《치명일기》 714번.

35) 《치명일기》 674번 ; 《병인치명사적》 11권, pp.45~47.

36) 《치명일기》 690번에는 ‘30여 명’이 한가지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고 되어 있다.

37) 《치명일기》 690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86번, p.143 ; 《병인치명사적》 23권, p.19.

 

38) 《병인치명사적》 18권, pp.38~39에 나오는 손 아우구스티노는 증언 내용으로 볼 때 손자여(갈리스도)와 손자선(토마스)의 부친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므로 손치황과 동일인물로 간주하였다.

 

39) 《치명일기》 689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86번, p.143 ; 《병인치명사적》 21권, p.96 ; 23권, p.19.

40) 위와 같음.

41) 《치명일기》 225번 ; 《병인치명사적》 11권, pp.7~8, 64~65.

42) 《병인치명사적》 18권, pp.38~39.

43) 《포도청등록》 하, 보경문화사, 1985, p.455.

 

44) 《치명일기》 232번 ; 《병인치명사적》 11권, pp.63~64. 이중 《병인치명사적》에는 그가 순교한 연도가 ‘1866년 정묘년’으로 되어 있는데, 정묘년을 1866년으로 착각한 것으로 이해된다.

 

45) 《치명일기》 366·375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92번, p.149, 《병인치명사적》 9권 pp.17~18, 21권, pp.103~104.

 

46) 《병인치명사적》 9권, pp.17~18. 한편 두 부자가 1867년 9, 10월간에 붙잡혀 순교했다는 증언도 있고(《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92번, p.149, 《병인치명사적》 21권, pp.103~104), 1867년 가을에 한가지로 붙잡혀 순교했다는 증언도 있으나(《치명일기》 375번) 이들 자료는 다소 불명확해 보인다.

 

47) 《병인치명사적》 23권, pp.14~15 ; 《치명일기》 646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8번, p.176 ; 《병인치명사적》 21권, p.144.

 

48) 《병인치명사적》 23권, p.22 ; 《치명일기》 648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8번, p.177 ; 《병인치명사적》 21권, p.144.

 

49) 《병인치명사적》 23권, pp.19~20 ; 《치명일기》 647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8번, p.177 ; 《병인치명사적》 21권, p.144.

 

50) 《병인치명사적》 23권, p.57.

 

51) 《병인치명사적》 11권, pp.6~7 ; 23권, pp.21~22 ; 《치명일기》 223번. 한편 손치호가 1876년에 붙잡혀 어디서 순교했는지 모르지만 수원이나 홍주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는 말을 지방 교우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는 증언도 있으나(《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92번, p.149 ; 《병인치명사적》 21권, p.103) 이 증언은 불명확하여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52) 《포도청등록》 하, p.456 ; 《병인치명사적》 23권, pp.16~17 ; 《치명일기》 116번. 《포도청등록》의 기록과 달리 교회측 기록에는 그가 1866에 붙잡혀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병인치명사적》 23권, pp.16~17 ; 《치명일기》 116번), 이러한 증언은 잘못된 것이다.

 

53) 《포도청등록》 하, p.455 ; 《병인치명사적》 23권, pp.15~16 ; 《치명일기》 115번. 《포도청등록》의 기록과 달리 교회측 기록에는 그의 나이가 25세로 되어 있는데 (《병인치명사적》 23권, pp.15~16 ; 《치명일기》 115번), 이러한 증언은 잘못된 것이다.

 

54) 《포도청등록》 하, p.453.

 

55) 《포도청등록》 하, p.455 ; 《병인치명사적》 11권, pp.7~8, 64~65 ; 18권, pp.38~39 ; 23권, pp.17~18 ; 《치명일기》 225번. 《포도청등록》의 기록과 다리 교회측 기록에는 그가 아버지와 한가지로 붙잡혔다고 되어 있기도 하고, 그가 1867년 3월에 붙잡혀 4월에 순교했다고 되어 있기도 하며, 그의 순교 당시의 나이가 35세, 36세, 45세 등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증언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56)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92번, p.149 ; 《병인치명사적》 21권, p.103.

57) 《병인치명사적》 23권 pp.22~23 ; 21권 p.97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86번 p.143 ; 《치명일기》 728번.

 

58) 《병인치명사적》 23권 pp.23~24 ; 《치명일기》 649번. 그가 체포되어 순교한 시기를 1867년으로 본 기록도 있으나(《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8번, p.177 ; 《병인치명사적》 21권, p.144) 《병인치명사적》 23권 pp.23~24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삼촌 손 요안의 증언이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이므로 그의 증언과 《치명일기》 649번에 따라 1868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59) 《포도청등록》 하, p.453. 

60) 《포도청등록》 하, p.462 ; 《병인치명사적》 11권, pp.3~5 ; 《치명일기》 22번.

61) 《포도청등록》 하, p.468.

62) 《포도청등록》 하, p.468.

63) 《병인치명사적》 11권, p.60.

64) 《포도청등록》 하, p.468.

65) 위와 같음.

66) 《병인치명사적》 11권, p.61.

 

67) 그의 순교할 당시 나이가 교회측 기록에는 71세로 되어 있으나(《병인치명사적》 11권, p.61) 《포도청등록》의 기록에 따라 65세로 보는 것이 옳다.

 

68) 이사성은 뒤에서 다루는 이사성(요한)과 동일인물이 아닐까 의심되지만, 거주지가 거더리와 신리로 서로 다르고, 순교한 연도도 1868년과 1869년으로 서로 다르며, 순교한 장소도 홍주와 서울로 서로 다른 점을 고려하여 일단 서로 다른 인물로 간주하였다.

 

69) 《병인치명사적》 11권, p.58 ; 21권, p.145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8번, p.177 ; 《치명일기》 664번.

 

70) 《포도청등록》 하, p.455 ; 《병인치명사적》 11권, pp.1~3 ; 《치명일기》 221번. 그의 순교할 당시 나이가 교회측 기록에는 45세로 되어 있으나(《병인치명사적》 11 권, p.3 ; 《치명일기》 221번) 《포도청등록》의 기록에 따라 43세로 보는 것이 옳다.

 

71)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6번, p.175에는 ‘덕산 섬말’로 되어 있으나 ‘홍주 섬말’로 이해된다.

72)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06번, p.175.

73) 자료에는 ‘덕산 섬말’로 되어 있으나 ‘홍주 섬말’로 이해된다.

74)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63번, p.312 ; 《병인치명사적》 24권, p.13.

 

75) 《병인치명사적》 11권, pp.23~24 ; 22권, p.25 ; 《병인순교자증언록》 120번, p.207 ; 《치명일기》 667번 ; 《병인치명사적》 11권, pp.20~23 ; 23권, pp.49~50 ; 22권, pp.23~25 ; 《병인순교자증언록》 120번, p.206 ; 《치명일기》 666번.

 

76) 《병인치명사적》 22권 p.143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35번, p.256 ; 《치명일기》 257번.

77) 《병인치명사적》 22권, p.131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32번, p.253 ; 《치명일기》 258번.

 

78) 자료에는 이 안드레아가 살던 마을이 ‘덕산 거더리’로 되어 있으나 ‘홍주 거더리’가 덕산에 접해 있기 때문에 ‘덕산 거더리로’ 표기한 경우가 많으므로 ‘홍주 거더리’로 바로잡았다.

 

79) 《병인치명사적》 22권, pp.63~64 ; 《박순집증언록》, p.93 ; 《병인치명사적》 23권, p.89 ; 《치명일기》 450번.

 

80) 《치명일기》 259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32번, p.253 ; 《병인치명사적》 22권, p.131에는 ‘덕산 섬말’로 되어 있으나 ‘홍주 섬말’로 이해된다.

 

81) 《치명일기》 259번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32번, p.253 ; 《병인치명사적》 22권, p.131.

82) 《병인치명사적》 23권, p.149 ; 《박순집증언록》, p.108 ; 《치명일기》 361번.

83) 《병인치명사적》 23권, pp.20~21 ; 21권, pp.96~97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86번, p.143 ; 《치명일기》 691번.

 

84)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11월 21일로 되어 있다(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526 각주 40).

 

85) 김성태는 신리에 거주하던 손점수와 그의 자식들이 1785~1789년 사이에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나 응정리에 살던 원시장(베드로)을 통해 맨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았다(김성태, 앞의 글, pp.49~52).

 

86) 차기진, 〈신리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p.6. 김성태는 신리의 공소 설정 시기를 좀 더 끌어 올려 모방 신부의 방문 이전에 파치피코 신부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김성태, 앞의 글, p.52).

 

87) 《기해일기》, p.176

88)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423.

89)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p.423 ; 《기해일기》, p.176.

90) 서종태, 앞의 글, p.155.

 

91)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35. 형장의 모래밭에 묻혔던 이들의 시신은 5월(양력)에 이치문(힐라리오) 등에 의해 발굴되어 10리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다가 8~9월(양력)에 다시 남포 서재골(현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로 이장되었다(《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94번, pp.371~373). 그 뒤 1882년 3월에 블랑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11월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으며, 1894년 5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용산 신학교에 안치되었고, 1900년 9월에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가 1967년 10월에 다시 절두산순교기념관 지하 성당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방상근, [오메트르, 피에르],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p.6443).

 

92)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35. 《병인치명사적》 8권, pp.26~28에는 양자인 황천일이 부친의 시신을 찾아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209번, p.398에는 황석두가 순교한 뒤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하였으며,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220번, pp.423~424에는 4월 13일에 황석두의 시신을 본집으로 모셔와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다고 하였다.

 

93) 《병인치명사적》 7권, p.12, 10권, p.10.

94) 서종태, 앞의 글, pp.154~155.

95)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31.

96) 《승정원일기》 고종 3년 10월 15일(경자).

97) 위와 같음.

 

98) 유한영,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최양업 신부 탄생 185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2006.12.2, p.107 ; La lettre de M. Féron M. Rousseille, Sanmakkol, 28 juillet 1861, A-MEP, Vol. 579, f. 568.

 

99)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431.

100) 이에 대해서는 서종태, 앞의 글, pp.147~153.

 

101) 이 가계도는 증언록과 심문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김성태가 밀양손씨의 족보를 발굴하여 신리 ‧ 거더리 순교자들의 보명을 확인하여 가계표를 새롭게 작성한 바 있다(김성태, 〈신리 교우촌과 밀양손씨(1)〉, pp.49~52).

 

[학술지 교회사학 vol 7, 2010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서종태(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33236&Page=16&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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