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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96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04-14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 수원교구의 설정과 윤공희 초대 교구장의 착좌

 


신앙의 터전이요 한국 천주신앙의 뿌리인 경기 남부지역에 수원교구가 탄생하다

 

1963년 10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칙서 ‘최고 목자’(Summi Pastoris)를 발표하여, 수원교구를 서울대교구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리 설정하였다. 아울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총무 윤공희(빅토리노) 신부를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새로 설정된 수원교구의 주교좌는 수원시에 위치한 성요셉 고등동성당에 두도록 했다.

 

교구장으로 임명된 윤공희 신부는 로마로 가서, 10월 20일(주일)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다른 주교 13명과 함께 바오로 6세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다. 이후 윤공희 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제2회기에 참석했으며, 12월 14일에 귀국했다. 12월 21일(토), 초대 수원교구장 착좌식이 고등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사목 표어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로 정했다.

 

수원교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작했지만,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신앙선조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설정 당시 총 신자는 ‘42,548명’으로, 교구 소속 본당은 24개, 공소는 200여 개였고, 기존의 서울대교구에서 수원교구로 입적된 사제는 모두 28명이었다.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의 사목 방향 – 새 교구로서 기반을 튼튼히 하며 열정을 쏟다

 

착좌식 이후 윤공희 주교는 기본적 사목 방향을 ‘수원교구 설정에 즈음하여’라는 지침을 통해 공표했다. 윤 주교는 ‘수원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 설정된 것은, 교회 안으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교회 밖으로는 비신자들에 대한 전교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윤 주교는 수원교구 내 주민 전체에서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약 3.2%]은 아직 미약하기 때문에 전교를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설 교구인 수원교구는 인적 자원과 물질적 재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우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본당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을 권고했다.

 

윤공희 주교는 신설 교구의 현황을 파악하고 교구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1964년부터 매년 4월 경에 교구 내 본당을 모두 순시하면서 신자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마련했고, 본당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보고받았다. 또한 정기적인 신부회의를 통해 다급한 현안 문제를 함께 논의해 나갔다.

 

1966년 10월 7일 수원교구 설정 3주년을 맞이해서 윤공희 주교는 새로 3개년 계획을 세워 신자들이 실천할 항목을 제시했다. 이 조항들에는 ‘교회 출판물 보급, 전교활동 목표 제시, 교무금 책정과 헌금 권장, 성미운동을 통한 신학생 양성, 신앙생활 격려’ 등 구체적인 사안이 제시되어 있으며, 윤공희 주교 재임기 동안 지속적으로 홍보되고 실천되었다.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수원주보 7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 순교신심 계승과 순교자 현양운동

 

 

수원교구의 순교신심 계승과 순교복자 서둔동 성당 건립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수원교구를 치명자들의 발자취로 다져진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곳으로 인식하고, 교구 신자들이 갖고 있는 순교신심을 더욱 확산시키고 뿌리내리는 것을 사목활동의 주요 지침으로 삼았다. 즉 교구적 차원에서 성직자 및 신자에게 순교신심을 함양시키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 복음화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1966년은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는 해로, 한국천주교회는 각 교구별로 순교복자 기념성당을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수원교구는 1968년 5월, 서둔동에 성당부지를 매입하여 본당을 신설했다. 서둔동 성당은 교구 내 본당의 성금과 교황청의 원조금을 받아 시공 약 1년 만인 1969년 9월 16일에 완공되었고, 1970년 12월 24일에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교구 차원에서 진행된 순교복자 기념성당 건축 사업은 순교신심을 교구 신자 내면에 각인시키고, 성직자, 신자들의 노력과 성당 건축의 외면을 통해 지역사회에 천주교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 현양대회 개최와 성지 성역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묻혀 있던 미리내는 수원교구 설정 이전부터 순교자 현양과 순례의 대상이었다. 교구 설정 직후부터 교구장을 위시한 성직자,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신심을 수원교구의 유산으로 인식하면서, 현양운동과 미리내 순례가 1964년부터 교구차원에서 개최되었다. 특히 196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20주년 현양대회를 계기로 독지가의 후원이 이어져 미리내 성지의 성역화가 시작되었다.

 

양지 본당에 속한 골배마실에도 수원교구 설정 이후 교구적 차원으로 김대건 신부 현양대회가 개최(1967~68년, 1972년)되었다. 골배마실은 1960~1970년대 미리내와 함께 많은 신자들이 찾는 순례성지이자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수원교구에서 순교자 현양운동이 발전하면서 현양의 대상은 김대건 신부 외에 다른 순교자에게도 확산되었다. 안양(현재 중앙)본당에 속한 수리산은 1965년 순교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최경환 순교자를 현양하는 성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또한 북수동 본당에 속한 손골은 1968년에 도리 신부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해 ‘복자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신앙선조들의 순교신심을 신앙유산으로 이어받은 수원교구는 교구적 차원에서 순교자 현양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이를 계기로 순교자와 관련된 성지 성역화를 시작했다.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3) 평신도 양성을 통한 교구의 기초 구축

 

 

수원교구의 평신도 사도직협의회 조직과 평신도 사도직 활동

 

신설 교구인 수원교구는 ‘평신도 사도직 강화’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충실히 따르면서, 동시에 교구의 기초를 구축하기 위해 평신도 사도들을 양성하고 그 활동을 활성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교구 차원에서 신자 단체를 조직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1969년 3월 23일 ‘수원교구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이하 ‘교구 평협’)가 창립되었다. 이후 평신도 조직이 아래로부터 재결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커지면서 1973년 8월 7일에 잠정적으로 교구 평협 활동이 정지되고, 대신 그해 연말까지 각 본당마다 사목협의회(줄여서 ‘사목회’)를 조직하게 했다. 사목회는 본당의 평신도 지도자와 단체를 총망라하게 되었고, 본당 사목 전반에 참여하면서 각종 활동을 해 나갔다.

 

 

교구 차원의 평신도 교육 실시와 그 성과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인식 확산과 평신도 조직화를 위한 체계적인 평신도 교육이 주요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구 기획관리실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1972년부터 ‘평신도 교육 3개년’ 과정을 실시했다. 이 교육과정의 목적은 첫해인 1972년도에 평신도 지도자 교육과 사제연수를 동시에 실행하고, 1973년도에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다시 일반 신자를 재교육하여 평신도의 역량을 강화한 다음, 1974년도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신자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전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1972년에는 제1차에서 제6차에 걸쳐 본당 신자 대표와 남녀회장을 대상으로 ‘평신도 사도직활동에 관한 교령’, 기초신학과 실천사목, 교회사 등을 내용으로 한 ‘평신도 지도자 교육’이 실시되었다. 특히 제2차 교육은 교구를 5개 지역으로 나눠 순회하면서 진행되었고, 제3차 교육은 교리교사 교육을 겸하여 전문 교리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교구 차원의 교육과 더불어 본당 차원에서도 다양한 평신도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본당 차원을 넘어서 지역 단위로 평신도 교육이 실시되기도 했다. 1973년도에도 ‘평신도 지도자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1972년 교육과정을 통폐합하여 2차 과정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1972년부터 1973년까지 평신도 교육이 교구적 차원에서 실시되었고,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평신도 교육 운동은 교구나 본당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전교 활동의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수원교구 교세는 교구 차원의 평신도 교육이 실시된 1972~1973년 시기에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4) 초대 교구장 재임기 교구공동체의 조직화와 교구 기반 확립

 

 

교세 성장과 본당의 신설, 교구청 조직 정비

 

교구 설정 이후 10년간 꾸준히 교구의 기반을 구축하고 전교활동을 한 결과, 신자 수가 설정 당시 42,648명에서 1973년 연말 67,990명으로 약 1.6배의 증가율을 보였고, 세례자 수도 매년 평균 3,823명에 달했다. 이와 함께 본당도 24개(공소 200여 개)에서 31개(공소 348개)로 늘어났다. 성소 증가와 사제양성 운동으로 사제는 28명에서 61명으로 늘어났다.

 

설정 이후 수원교구는 임시 교구청을 사용하다가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 1966년 5월에 부지(수원시 화서동 100번지)를 확보하고 교구청사를 건립하여 1967년 10월 20일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또한 1967년 12월 28일, ‘천주교수원교구유지재단’을 설립했다.

 

교구 행정이 복잡해지고 각종 사업이 추진되면서 교구청 조직이 확대 · 정비되었다. 그 결과 교구장, 부감목(총대리), 사무국 아래 사목부, 경리부, 비서실을 두는 1국 2부 1실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1973년 7월에, 3개(동부 · 남부 · 중부) 지역(지구)을 설정하였다.

 

 

수도회 진출과 사회사업 전개 및 교구 언론활동

 

신설 교구인 수원교구는 재정과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전교활동과 사업사회에 종사할 수도회의 진출이 시급했다. 그에 따라 설정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외에 독일의 ‘성빈센트드뽈자비의수녀회’(성빈센트병원 운영), 스페인의 ‘프란치스코작은형제회’(세류동 본당 사목), 국내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이천 분원), ‘파티마의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용인 농장운영), ‘인보성체수도회’(본당사목, 탁아사업),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최초 교구설립), ‘성가소비녀회’(본당 사목), ‘노틀담수녀회’(오산 분원),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용인 분원)가 교구에 진출했다.

 

설정 당시 농촌을 기반으로 한 수원교구는 교세 성장과 교회 발전이 농촌사회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농촌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양 본당의 간척사업, 발안 본당의 ‘요한비안네 농장’ 운영, 용인 본당의 발전기 설치와 주택 건립 사업이 대표적이다.

 

도시화와 공업화라는 시대 흐름 속에서 노동자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신장과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1969년 9월에 기숙사 시설을 갖춘 안양 ‘근로자회관’를 설립하고 노동자 대상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런가 하면, 수원교구는 효과적인 정보교환과 전교사업 수행을 위해 1971년 12월 1일자로 월보 『수원교구 사목』을 창간했다. 이와 함께 교구 내 본당이나 지역별로 ‘월보 소식지’가 발간되어 교회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2018년 4월 29일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5) 교구 설정 10주년(1973)과 초대 윤공희 교구장의 전임

 

 

교구 설정 10주년 순교자현양대회

 

1973년은 교구 설정 1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교구의 형편과 실정을 감안하여 따로 기념행사를 가지지 않고 미리내 순교자 현양대회에 10주년의 의미를 더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9월 30일에 열린 순교자 현양대회에는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루이지 도세나(Luigi Dossena) 주한 교황대사, 윤공희 주교, 노기남 대주교, 지학순 주교가 공동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윤공희 주교는 “교구 설정 10주년을 맞은 우리 신자들은 순교선열들을 본받아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헌신할 각오를 새롭게 하자.”고 당부했다. 또한 윤공희 주교의 선창에 따라 참석한 신자들이 오른손을 들고 신앙선서문을 함께 낭독했다.

 

교구 설정 10주년 순교자 현양대회를 마친 후, 윤공희 주교는 《수원교구 사목》의 지면을 통해 교구 설정 10년간의 성과를 평가하고 부족했던 점을 반성했다. 윤공희 주교는 여러 가지 부족한 여건 속에서도 교구 성직자와 신자들이 노력해온 것을 치하했다. 동시에 ‘지역 인구에 비해 천주교 신자의 비율이 낮고 냉담자와 판공성사 불이행자가 높아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고 활동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윤공희 주교의 전임과 정덕진 신부의 교구장직무 대리(1973~1974)

 

제4대 광주대교구장 한공렬 대주교가 1973년 3월 7일에 선종하자 교황 바오로 6세는 그해 11월 7일, 윤공희 주교를 대주교로 승품하고 동시에 광주대교구장으로 전임 발령했다. 그에 따라 윤공희 주교는 11월 29일, 광주에 부임하고 이튿날 광주대교구장에 착좌했다.

 

11월 30일에 개최된 교구 참사회에서 정덕진 신부를 교구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여 임시로 교구를 운영하게 했다. 정덕진 교구장 직무대행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기보다 기존의 교구 체제를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한 가운데 교구청 조직의 변화(사목국장이 사무처장을 겸함)와 직책명 개정, 화서동 교구청사의 증축(가톨릭센터-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후원)이 이루어졌다.

 

10년간의 윤공희 주교 재임기에 수원교구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신학생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평신도 사도직을 홍보하여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를 바탕으로 각종 사회사업을 벌이고 전교활동에 나서 교세의 확장과 교구 기반 구축이라는 성과를 냈다. 윤공희 주교의 광주대교구 전임 이후 1년간의 교구장 공석 기간을 지난 후 제2대 김남수 안젤로 주교가 교구장에 착좌하면서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6)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착좌와 교구체제 정비

 

 

제2대 수원교구장 착좌와 사목지침

 

1974년 10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석 중인 수원교구장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신부를 임명하였다. 김남수 주교의 서품식 및 교구장 착좌식은 11월 21일 주교좌 고등동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수원교구장에 착좌한 김남수 주교는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UT SINT UNUM)를 자신의 사목표어로 내걸고, 취임사를 통해 화해와 일치의 교구공동체 구현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즉 교구장을 중심으로 온 교구민이 하나로 뭉쳐, 전임 윤공희 대주교가 다져 놓은 교구 기반 위에서 더욱 성장하는 교구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것을 밝힌 것이다.

 

김남수 주교는 1979년 1월 사목지침을 발표하면서 교구의 중점 사업과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신자들의 기도생활 강조와 교육 실시, 사제 양성, 청소년 사목(교리교육), 지속적인 본당 신설, 성지 성역화 등 주요 사목지침은 김남수 주교 재임 내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 건립(1977년)과 교구체제 정비

 

본당 신설과 교세확장이 두드러지는 상황 속에서 ‘교구의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주교좌성당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1976년 6월 28일, 조원동 성당 기공식이 수원시 조원동 675번지에서 개최되고 이날 조원동 본당은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1977년 5월 18일 성당이 준공·축성되던 날에 ‘평화의 모후’가 수원교구의 공식 주보로 선정되었다. 또한 증축 공사 관계로 교구청이 1975년 1월 30일자로 영화동의 임시 교구청사로 옮겼다가, 1976년 4월 1일에 다시 화서동 청사로 이전했다.

 

김남수 주교 취임 이후, 해체된 수원교구 평협은 1977년 4월 5일에 고등동 성당에서 재결성 총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평신도 교육을 강화하면서 1978년 11월 10일에 한국가톨릭 농촌여성회와 발안의 농민교육원을 흡수하여 교육원으로 통합했다. 1978년 3월 8일에 공식적으로 ‘교구 신부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신부평의회(사제평의회)는 교구 본부와 지역 본당을 연결하고 지구별 사제위원회에서 논의된 안건을 교구에 보고하며 신설된 본당의 지구 편입과 구역 재조정 등을 수행했다.

 

윤공희 초대 교구장이 기본 틀을 마련한 교구 조직은 김남수 교구장이 취임한 이후 교세의 증가와 교회사업 증대에 맞물려 새로 정비되고 확충되었다. 이를 통해 교구와 지구 조직체계가 자리를 잡게 되고, 사제와 평신도들의 협의체 기구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유기적인 교구 체제를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전교활동이 전개되었고, 수원교구는 발전의 도약을 마련하게 되었다. [201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7) 신자 배가 운동과 행복한 가정 운동의 전개

 

 

교육 및 전교 활동의 본격화와 신자 배가 운동(1981년)

 

1976년, 수원교구는 조원동 주교좌성당을 착공하고 교구청사를 증축한 후 본격적인 교육 및 전교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동시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 ‘어린이 전교회’ 가입을 권장하고, 학생연합회, 본당, 단체별로 청소년을 위한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1979년부터 한국천주교회는 200주년 5개년 계획과 200만 신자 확보 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수원교구도 호응하여 기초공동체 및 반조직 강화(‘반기도회’ 개최)에 힘을 기울이면서 전교활동에 매진했다.

 

1981년 ‘이웃 전교의 해’를 맞이해 수원교구는 ‘신자 배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교구 차원의 교육과 행사가 진행되는 것과 더불어 본당에서도 반기도회를 활성화시키면서 전교활동에 매진했으며, 그 결과 교세 성장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수원교구는 “새로운 본당상을 정립하고 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제들의 영성”이라고 판단하여, 사제 특별 연수회(아조르나멘또, Aggiornamento)를 1982년 4월 19일부터 5월 8일까지 3주간에 걸쳐 부산 성 베네딕도회 ‘명상의 집’에서 실시했다.

 

 

행복한 가정운동의 전개

 

1960~70년대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그 전제 조건으로 인구 조절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한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그에 대해 한국천주교회는 낙태와 비(非)그리스도교적 피임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낙태 허용과 불임 수술을 명시한 ‘모자보건법’(1973년 시행)이 시행되자, 천주교 차원에서 가족계획과 생명보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75년 4월 1일에 ‘행복한 가정 운동 전국협의회’를 설립하고 그해 5월 28일에는 창립 총회를 개최했다.

 

수원교구는 1976년부터 ‘행복한 가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행복한 가정 운동’은 무조건 산아 제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한 인간 생명을 직접 간접으로 살해하지 않도록 하고 자연법에 합당한 가족계획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교구는 교구 차원의 ‘행복한 가정 지도자 교육’을 실시했으며, 전담 유급 가족계획 지도원을 두고 신자들에게 생명 존중 정신과 자연법에 맞는 가족계획을 확산시켜 나갔다.

 

김남수 주교는 교구장 임명 전부터 정부의 경제성장 위주의 보건정책을 비판했는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명 경시 풍조를 바로 잡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교회의 미래는 산아 장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구 증가와 성소 계발을 연결시키면서 적극적인 생명수호 운동을 벌여 나갔다. [2018년 5월 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8) 교구 설정 20주년 선교대회와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운동

 

 

교구 설정 20주년 선교대회(1983년)

 

1983년은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앞둔 해이고 수원교구 설정 20주년이기도 했다.

 

1983년 5월 8일, 수원교구 설정 20주년 선교대회가 ‘이 땅에 빛을’ 주제로 하여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약 3만 5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교구 사제들의 공동 집전으로 미사가 봉헌되었고, 선교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선언문은 2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자취를 성찰하면서, 북녘교회를 위한 관심과 기도, 이웃과의 사귐과 나눔, 제4 대신학교(현재 수원가톨릭대학교) 건설을 통한 본격적인 성직자 양성 등에 주력하자고 호소했다. 수원교구는 설정 20주년 선교대회를 통해, 교구의 20년을 성찰하고 교구민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고취시켜 교구의 발전과 민족복음화의 기반을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다.

 

 

수원교구의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운동 전개

 

수원교구는 200주년 기념운동을 수원교구 설정 20주년 기념과 연계하여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기념회의와 정신운동, 기념행사, 기념사업을 기획했다.

 

기념회의[교구 사목회의] : 전체 한국교회의 결의에 따라 수원교구는 1983년 9월 9일에 200주년 사제, 수도자 및 평신도 합동 연수회를 개최했다. 연수회를 통해 교구 사목회의가 개막되었으며, 교구 산하 단체, 수도회, 6개 지구와 본당 별로 사목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회의를 바탕으로 1984년 1월 23일에 200주년 교구 사목회의록 최종 정리 회의를 개최했다.

 

정신운동 : 수원교구는 신자들의 200주년 기념운동 동참과 신앙 쇄신을 위해,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도문’과 ‘200주년 어린이 노래’ 보급 운동을 벌였다.

 

기념행사 : 1983년 한국교회에서는 전국적으로 시성시복 추진을 위한 순교자 유해 본당 순회 기도회를 개최했다. 수원교구에서도 2월 16일부터 9월 30일까지 조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시작하여 2개 노정에 따라 6개 지구별로 순회 및 기도회를 가졌다.

 

기념사업 : 수원교구는 1983년 4월,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신학교 설립과 성지 성역화, 교구사 편찬을 추진하기로 했다. 제4 대신학교는 1983년 말에 ‘수원가톨릭대학’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고, 천진암 성지와 미리내 성지의 성역화 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교구사 편찬은 뒤로 미루어졌다. 한편 왕림 본당의 옛 한옥 사제관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원래 자리에 복원되었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5월 3일 한국에 도착했고, 5월 6일에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의 시성식을 집전했다. 수원교구에서도 56개 본당에서 4만 7천여 명의 신자가 시성식에 참석했다. 수원교구는 시성 후 첫 성인의 축일을 맞아 9월 30일에 미리내 성지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했다. [2018년 6월 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9) 수원가톨릭대학교 설립(1984) - 수원교구의 성소 못자리

 

 

신학교 설립 이전 교구 사제 양성

 

1970년대 후반부터 수원교구는 수도권 인구 증가 추세와 교구 성직자 및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 노력에 힘입어 신자 수가 급증한 데 비해, 매년 배출되는 사제의 수는 적어 교구 사목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해 교구 차원에서 사제양성 후원회가 결성되어 체계적으로 사제양성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김남수 주교는 사제 충원을 위해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대책으로 수원에 교구 대신학교 건립을 구상했다.

 

1980년대 전반 신자 수 증가에 비해 사목자 수급이 시급했던 것은 수원교구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 전체의 과제가 되었다. 가장 신자 수가 많은 서울관구가 더욱 사제 양성이 시급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구 내 별도의 대신학교를 세우는 방안을 구상하게 되었다.

 

 

수원교구, 수원가톨릭대학교 설립

 

1982년 5월 25일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수원지역에 제4 대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안이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그해 7월, 편리한 입지 조건과 유서 깊은 교우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왕림’이 제4 대신학교 건립의 최적지로 결정되었다.

 

수원교구는 1982년 8월 1일자로 대신학교 건립 추진을 발표하고,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983년 3월 14일, 교황청으로부터 학교설립 인준을 받았고, 4월 7일에 대신학교 본관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그해 9월 8일에 문교부(옛 교육부)에서 ‘수원가톨릭대학’ 신설을 승인하고, 12월 7일에 설립 인가(신학과 40명 정원)를 했다. 그에 따라 1984년 3월 2일 첫 신입생 52명이 입학했다.

 

수원가톨릭대학이 본격적인 건립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서 재정 확보가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수원교구는 교구민에게 신학교 건립 비용과 마련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세대마다 매년 일정한 금액을 봉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교구의 호소에 본당과 신자들은 적극 호응하여 각지에서 건축 기금을 마련했고, 자발적인 노력봉사도 이어졌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를 시작한 지 4여 년 만인 1987년 9월에 전체 공정을 끝내고, 1988년 5월 6일에 김남수 주교 집전으로 축성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수원가톨릭대학은 1987년 정원을 40명에서 60명으로 증원한 후 대학원 설립인가도 받았다. 1989년 10월에는 기존의 신학과 외에 철학과(정원 40명)도 신설하였다. 수원가톨릭대학 출신의 첫 사제 11명은 1990년 11월 23일 조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서품을 받았다. 1996년 3월 1일에는 수원가톨릭대학을 ‘수원가톨릭대학교’로, 학장을 ‘총장’으로 변경했다.

 

한국천주교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수원가톨릭대학교로 인해 수원교구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사제들을 양성해 냄으로써 교구 내 사제 인력의 충원은 물론이고 해외에 파견될 사제들까지 배출하는 기반이 갖추어졌다. [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0) 수원교구의 교육사업 - 광암학원(1983~) 운영

 

 

광암학원의 설립

 

수원교구는 ‘수원가톨릭대학’ 설립을 결정한 후 교구 차원에서 교육사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83년 5월 16일자로 학교법인 ‘광암학원(曠菴學園)’을 설립했다. 광암학원 이사장은 교구장이 맡았다. 설립 당시 광암학원에 속한 교육기관은 수원 소화국민학교, 왕림 광성국민학교, 평택 효명중학교, 효명종합고등학교, 안성 안법중학교, 안법고등학교로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였다.

 

 

수원교구 광암학원 운영 교육기관의 변천

 

왕림 본당 제2대 주임 알릭스 신부가 설립한 ‘삼덕학교(三德學校)’에 기원을 둔 ‘광성국민학교’는 개항기 교회의 지역주민 계몽과 선교 차원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 두 차례나 교육을 일시 중단하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에도 교회가 운영하는 초등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이후 광성국민학교는 1970년대 중반에 와서 재정적자의 누적과 농촌 취학 아동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난제에 부딪혔다. 각종 재정 확보 사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근 지역에 공립 국민학교가 설립되면서 결국 1981년 2월 28일부로 폐교되었다.

 

1909년 안성 본당 초대 주임 공베르 신부가 설립한 ‘안법학교’는 1936년 6년제의 ‘안법보통학교’로 개편했다. 해방 후 1947년 중학교로 개편되었고 1949년 6월 안법국민학교는 폐교했다. 그리고 1951년 8월 학제변경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1980년대 중학교 의무교육이 확대 강화됨에 따라 안법중학교는 1985년 2월 28일자로 폐교되었다. 반면 안법고등학교는 지역의 우수학교로 자리잡게 되었고, 신자 학생교육과 성소 계발에도 힘을 쏟았다.

 

1953년, 서정동 본당 주임 유수철 신부가 설립한 ‘효명고등공민학교’는 가난으로 진학하지 못한 농촌 청소년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1957년 2월 중학교 외에 공업고등학교 인가도 받았다. 이후 효명공업고등학교는 종합고등학교로 변모했으며, 1979년에는 학칙을 변경하여 보통과(인문계)를 증설했다. 효명중·고등학교는 1981년 3월 중학교가 분리되어 현재까지 평택 지역 인재양성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1934년 설립한 ‘소화강습회’가 1946년에 승격한 소화국민학교는 수원교구 설정 이후 초등교육의 질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명문초등학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적자를 면치 못해 광암학원이 여러 번 폐교를 검토하기도 했다. 결국 1993년 3월 1일 소화국민학교(1996년 3월 1일부터 ‘초등학교’로 개칭)의 운영을 살레시오 수도회에 위탁했고, 2002년 1월 17일에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에 학교를 신축하고 북수동에서 이전했다. [2018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1) 신앙선조 시복시성운동의 전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추진

 

1974년 제2대 수원교구장에 취임한 김남수 주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일원으로서 신앙선조의 시성 추진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김남수 주교는 한국천주교회의 ‘창설 주역’들을 포함한 1801년 ‘신유박해’까지의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운동을, 103위 복자의 시성운동과 함께 추진할 것을 1976년경부터 주장했다. 1980년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이벽’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을 추진하면서 수원교구 신자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김남수 주교는 1982년에도 신앙선조들에 대한 현양과 시복 추진 의지를 재차 표명했으나, 103위 복자의 시성 추진과 상충될 소지가 있어 일단 중단했다.

 

 

수원교구 차원의 시복시성운동 전개

 

1983년 9월 27일에 103위 순교복자의 시성이 교황청에서 완전히 결정된 후에, 주교회의 200주년 기념사업위원장 김남수 주교는 ‘창립선조 시복시성운동’이 다음 추진 사업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에 따라 초기 순교자들의 역사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것이 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1984년 6월 24일에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인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와 그 동료 순교자 및 증거자들의 시복 추진 심사’ 착수가 선포되었지만,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1984년 12월 31일부로 해산되자 시복 추진 업무는 전례위원회 소관이 되었다.

 

이후 주교회의에서 시복 추진을 해당 교구별로 분리하여 추진하기로 함에 따라, 1985년부터 수원교구는 창설 주역 5위 순교자 시복에 전념했으나 1988년 103위 성인 신심의 위축을 이유로 보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순교선조들에 대한 수원교구의 시복 추진 의지는 어느 교구보다 적극적이었다. 1996년 1월 김남수 주교는 윤유일 바오로 및 7위 순교자(주문모 신부, 윤유오 야고보, 윤점혜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 정광수 바르나바,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의 시복 추진을 허락했다. 그리고 2월에 역사위원 및 조사위원을 임명하고 5월 말 ‘시복 추진허가 청원서’를 작성하여 6월 7일 주교회의 사무총장의 허가를 얻은 후 교황청에 제출했다. 그해 11월에 교황청으로부터 시복 추진 허가 공문(10월 1일자)과 시성성 차관의 ‘교령과 장애 없음’ 공문(10월 24일자)을 접수했다. 이를 계기로 시복 추진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1996년 11월 30일에 자료집 제1집을, 1997년 4월 15일에 자료집 제2집을 발간했다.

 

이와 같이 1984년 103위 시성식과 그 이후 전개된 초창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운동은 신자들의 순교신심을 함양하고 성지 성역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기폭제가 되었다. [2018년 7월 1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2) 신앙선조 시복시성운동의 전개

 

 

교구 차원의 성지 성역화 사업 추진

 

김남수 주교 재임기 동안 진행된 신앙선조들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은 신자들의 순교신심을 함양하고 성지 성역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성지 성역화 사업은 1976년 무명순교자 묘역 조성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는데, 용인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을 발굴하고 그 유해를 수습하여 미리내 성지에 무명순교자 묘역(2018년 현재 16기)을 조성했다. 또한 교구 차원의 성지 성역화를 추진하기 위해 1976년 12월 8일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교구 내 성지 성역화는 뜻있는 성직자나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 교구 및 지구 차원의 협조와 지원을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성지 성역화 사업의 전개 – 기존 성지 및 새로운 성지의 성역화

 

1976년 9월 김남수 주교는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의 설립을 승인하고, 미리내 성지의 효율적인 성역화와 관리를 위해 그해 10월 12일 미리내 본당과 성지를 맡도록 했다.

 

순교자 김성우(안토니오, 1984년 시성)의 묘가 있는 구산 공소는 1979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성지 성역화에 힘썼고, 1980년 6월 11일 김남수 주교와 교황 대사에 의해 성지로 축성되었다.

 

1978년부터 성남 지역 본당들은 남한산성 순교지의 성역화를 추진했으며, 1998년 9월 30일에 남한산성 순교 성지가 선포되었다.

 

‘한국천주교 발상지’로서 천진암 터를 주목한 변기영 신부는 1978년부터 성지 성역화를 추진하였고, 1981년 6월 24일에 천진암 성지와 사제관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1985년 2월 5일 천진암은 준본당으로 설정되었고, 1992년에 천진암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987년 윤유일(바오로, 2016년 시복) 일가의 묘역을 중심으로 어농리 일대의 성역화가 시작되었다. 어농은 주문모 신부(야고보, 2016년 시복) 등의 의묘를 조성한 다음 그해 9월 15일 성지로 선포되었다.

 

순교자 정은(바오로, 하느님의 종)의 묘가 있는 단내는 인근 어농과 함께 이천 지역 성지로 성역화되었고, 1987년 9월 15일 김남수 주교에 의해 성지로 축성되었다.

 

1983년부터 추진된 남양 순교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은 1989년에 교구 내 성모성지 성역화와 맞물려 진행되었고, 1991년 김남수 주교와 교황대사는 성모성지로 선포했다.

 

죽산 순교지 성역화 사업은 1992년부터 본격화되었고 1995년 1월 15일에 순교성지로 선포되었다.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 재임기부터 성역화가 시작된 수리산, 골배마실, 손골 성지도 김남수 주교 재임기에 지속적으로 현양사업과 성지 성역화를 추진했다. [2018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3) 수원교구 은경축(25주년)과 30주년(1993) 행사

 

 

수원교구 25주년(1988) –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

 

1980년대 후반, 수원교구는 선교 활동과 사제 양성(수원가톨릭대학교 설립과 성소국 신설)에 힘썼고, 1987년에 일어난 거국적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러한 가운데 1988년 교구 은경축을 앞두고, 교구는 1987년 6월 16일에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25주년 관련 사업으로 ‘교구 공동체가 작사 및 작곡, 25주년 기념 심볼마크 공모’를 실시했다. 1988년 1월부터 교구는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정신운동의 하나로 ‘성서읽기 운동’을 전개했으며, 중·고등학생과 어린이, 청년의 신앙대회를 2월 29일과 5월 8일, 9월 10~11일에 수원 실내체육관과 남양 성지에서 개최했다.

 

1988년 10월 9일에는 ‘빛이 되어’를 주제로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수원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개최되었다. 교황대사, 초대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해 각 교구 주교와 성직자, 수도자 및 교구민 수만 명이 신앙대회에 참석했다.

 

김남수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교구 설정 이후 25년간 교구의 성장과 발전을 언급하고, 향후 추진해야 할 교구의 사명으로 ‘이웃 전교 강조’를 제시했다. 또한 교구 재정의 자립을 바탕으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신해야 함을 언급하면서, 밖으로는 아시아를 비롯한 해외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하며, 안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을 찾아가 도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구 설정 25주년을 맞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신앙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아 이웃에게 전교하고, 조국통일과 해외선교에 앞장서서 ‘아시아의 빛’의 역할을 담당하며, 가정성화와 사제양성(신학교 후원) 등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교구 30주년(1993) 행사 – 지난 역사의 고찰과 미래 방향의 조명

 

1993년, 수원교구 설정 30주년을 맞아 수원교구는 그해 9월 26일에 천진암 성지에서 순교자 현양대회와 아울러 천진암 100년 계획 한민족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했다. 이날 정초식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작성한 정초문을 새긴 머릿돌을 축복했다. 김남수 주교는 미사 강론을 통해, 수원교구가 이제는 전국 교회와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더 나아가서 세계교회의 부흥을 위해 참여하고 기여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11월 4일, 고등동 성당에서 ‘교구 설정 30년의 역사적 고찰을 통한 미래 방향 조명’을 주제로 3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교구 설정 30주년을 맞아 30년사 편찬실은 1992년 3월부터 교구사 편찬 작업을 시작했고, 교구 내 구성원의 협조로 1993년 12월 8일에《수원교구 30년사》를 간행했다. [2018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4) 해외 선교와 동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노력

 

 

한국외방선교회의 설립과 해외 선교사 파견

 

1975년 주교회의의 결의로 ‘한국외방선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9년 제2대 총재로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취임하면서 수원교구는 해외 선교 사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84년부터는 수원가톨릭대학교가 한국외방선교회 소속 신학생들의 교육을 위탁하면서 한국외방선교회 총재는 수원교구장이 맡게 되었고, 이 관례는 2004년 제3대 총재 최덕기 주교까지 지속되었다.

 

1981년 11월, 한국외방선교회의 선교사 해외파견이 최초로 있었다. 한국외방선교회 출신 첫 사제로 수품된 네 명의 선교사(수원교구 방구들장 신부 포함)가 파푸아뉴기니에 파견되었다. 이후 대만(1990년)과 홍콩(1996년)에도 선교사를 파견했다. 한편 한국외방선교회는 1987년 7월에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원’을 수원가톨릭대학교 인근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990년 2월에 개원했다.

 

 

북방선교 노력과 통일성금 및 북녘 형제 돕기 운동의 전개

 

교구 설정 25주년(1988)을 맞아 수원교구는 조국 통일과 해외 선교에 앞장서며,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김남수 주교를 비롯한 한국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선교에서 한국교회의 사명을 자각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해외 선교방향을 동아시아로 전환하고 더 나아가 북한 선교를 지향하게 되었다. 동시에 세계 곳곳 한민족이 퍼져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교포 선교사목’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였다.

 

수원교구는 현실적으로 당장 선교사를 파견하기 어려운 북한 대신, 그 교두보 역할을 할 중국에 선교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1993년 6월, 김남수 주교가 중국을 방문한 데 이어, 1994년 7월에는 북방선교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수원교구와 중국 길림교구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1995년 김남수 주교는 사순절 담화를 통해 ‘북방선교야말로 한국교회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선언했고, 교구 차원에서 북방선교를 위한 ‘통일성금 통장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되자 1997년 수원교구는 ‘북녘 형제 돕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적극적으로 성금 모금 운동을 실시했다. 성금 모금과 관련해서 ‘1세대 1가정 돕기 운동, 매주 금요일 단식을 통한 봉헌, 본당 내 모금함 설치, 단체별, 구역반별 가두모금 전개’ 등의 방안이 제시됐다. 실천사항으로 ‘가정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기, 매주 금요일 절식의 날로 정하여 실천하기,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기, 주변 사람들에게 이 운동을 널리 알리기’ 등으로 정했다. 또한 본당 차원에서는 예산으로 책정된 자선비 중 일부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등, 북한 주민 원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8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5) 생명 · 환경운동과 출산 장려

 

 

수원교구의 생명·환경운동 전개

 

1970~8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는 물질주의, 경제중심주의의 온갖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90년대 도시화, 공업화로 인해 환경 파괴와 생명 경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에 한국천주교회에서는 낙태 반대와 환경 보호 등을 ‘인권·생명 운동’ 차원으로 확대하여 전개해 나갔다. 수원교구는 이에 호응하면서, 특히 낙태 방지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강구했다. 수원교구는 젊은이들을 위한 혼인전 교육인 ‘가나교육’을 강화하고, 행복한 가정 운동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교구 사목국과 평협은 각종 자료를 만들어 본당을 통해 배포하며 신자들에게 적극적 참여를 권유했다.

 

수원교구의 생명운동은 환경 보호와 농촌 살리기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94년 12월 16일에 농촌 살리기 교구본부가 발족되었고, 본당의 농산물 공급장을 통해 무농약 농산물을 보급하면서 다각적인 교육과 활동을 했다. 1995년 9월 12일에는 교구 ‘환경위원회’를 설치하여 각종 환경단체와 연대하여 교구 내 환경문제를 진단하고 올바른 정책이 실시되도록 노력했다.

 

수원교구는 사형제도 폐지운동에도 나섰는데, 사형제도는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관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반생명정책이기 때문이다.

 

 

김남수 주교의 다자녀 출산 장려

 

김남수 주교는 경제제일주의를 외치며 산아제한 등 온갖 생명경시 풍조를 조장해 온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인간 중심, 생명 우선의 가치를 강조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경제 활성화와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인구 증산이 시대의 중요한 흐름임을 직시했다. 그에 따라 수원교구장으로서 재임 중에 수시로, 특히 견진교리 때마다 신자들에게 ‘자녀 많이 낳기’를 강조했다.

 

전체 신자 수에서 차지하는 유아 세례자의 비율이 수원교구가 전국에서 가장 높았으며, 서울대교구의 두 배 정도라는 사실은 그간 김남수 주교가 신자들에게 강조한 산아 장려와 수원교구의 생명존중운동이 매우 유효하였음을 입증해준다. 김남수 주교는 신자들만이라도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새 생명을 알뜰히 길러낸다면, 한국 사회의 인구감소를 막을 수 있고 국가 번영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 천주교 신자들의 모범으로 국민과 국가 지도자들도 결국 천주교회의 생명존중운동에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남수 주교가 일관되게 강조해 온 낙태 반대와 다자녀 출산 장려는 기본적으로 생명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교회의 발전과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더 많은 성직자, 수도자의 양성이 필요하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2018년 8월 5일 연중 제18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6) 3대 신심운동의 전개와 부교구장 최덕기 주교 임명

 

 

3대 신심운동의 전개

 

1990년대 후반 수원교구는 그 동안의 성장을 발판으로 외적으로 해외 복음전파(북방선교)에 힘쓰면서, 동시에 내적으로 신앙의 성숙을 꾀했다. 이를 위해 수원교구는 1996년에 ‘성체, 성모, 순교자 신심’ 등 ‘3대 신심운동’을 전개했다.

 

수원교구는 성체 신심을 고양하기 위한 ‘성체 현양대회’를 1996년 6월 28일 미리내 성지에서, ‘지속적인 성체조배회’가 주최하는 ‘성체 신심 1일 대피정’을 11월 4일 조원동 주교좌성당에서 개최했다.

 

성모 신심 운동은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이 주도했는데, 1996년 10월 18일에서 20일까지는 파티마 순례 성모상이 수원교구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2월 9일에는 화서동 성당에서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주최로 ‘성모 신심 대림 특별피정’이 개최되었다.

 

1996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이었으므로 수원교구에서도 순교자 신심운동과 맞물려 김대건 신부 현양사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기념관 후보지로 은이 공소터를 선정하여 토지를 매입했다.

 

수원교구는 ‘김대건 성인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고, 그 내용을 반모임 교재인 ‘나눔의 소공동체’ 1996년 9월호에 게재하여 배포했다. 그리고 그해 4월 21일에는 죽산 성지에서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및 병인박해 130주년 순교자 현양대회’가 열렸고, 7월 5일에는 ‘미리내 성요셉 성당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되었다. 9월 16일에는 은이 공소터에서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사제단 합동미사가 개최되고, 은이 공소-미리내-양지 성당으로 이어지는 도보 성지순례가 실시되었다. 9월 22일에는 수원교구가 주최하고 남부지구가 주관하는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대회’가 미리내 성지에서 개최되었다.

 

 

부교구장 최덕기 주교 임명

 

교구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1990년대 초에 교구장을 보좌하면서 유사시 교구장직을 승계할 수 있는 ‘부주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남수 주교의 교구장 취임 20주년을 맞이한 1994년부터 본격화되어 1995년에 부주교를 임명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했다. 그리하여 1996년 1월 25일자로 최덕기 신부의 부주교 선임이 공표되었다.

 

1996년 2월 22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한국 주교단과 수원교구 사제 200여 명, 내빈 및 교구민 6,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최덕기 주교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교회법에 따라 최덕기 주교는 3월 1일부터 총대리를 겸하면서 교구 행정업무를 대리했다. [2018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7) 2대 교구장 재임기(1974~1997) 교구의 성장과 교구체제 정비

 

 

교세 및 본당의 증가와 지구 조직 개편

 

김남수 주교의 재임기 약 23년을 통하여 수원교구는 비약적인 교세 성장을 이루었다. 신자 수는 6만8천 명에서 42만 명으로 증가했고, 사제 수는 62명에서 248명으로, 본당은 31개에서 100개로 증가했다. 반대로 공소는 1985년 이후 급속히 줄어들어 1997년에는 42개에 불과했다. 이는 1970~90년대 한강 이남 경기지역이 급속히 도시화하고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수원교구가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벌인 결과였다. 또한 농촌지역과 공소 중심의 신앙 형태에서 도 · 농 지역 및 본당 중심(구역·반 조직)으로 변화, 정착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김남수 주교 재임기에는 본당 신설과 교세 증가로 지구도 재편, 확대되었다. 윤공희 주교 재임 말기인 1973년에 3개 지구가 조직되었는데, 이후 지구가 늘어나다가 1988년 7월에 7개 지구로 개편되었다. 7개 지구 체제는 김남수 주교가 퇴임하는 1997년 6월까지 유지되었다.

 

 

교구청 조직의 확대와 개편

 

김남수 주교의 재임 동안 교세의 증가와 교회사업 증대로 교구체제가 새로 정비되고 확충되었다. 1977년 4월 교구청 편제를 1처 2국 1원 1실(사무처, 관리국, 사목국, 교육원, 비서실)로 개편했는데, 실제로는 관리국장이 사무처장을, 사목국장이 교육원장을 겸임하는 체제였다. 1978년 4월 이후 비서실은 관리국으로 흡수되었다(1처 2국 체제).

 

수원교구는 교구 신자들의 신심 함양과 전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83년 2월 22일, ‘교육국’을 신설했다(1처 3국 체제). 또한 성소 계발과 신학생 양성을 효율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1987년 2월 19일 ‘성소국’을 신설했다(1처 4국 체제).

 

1990년 2월 16일, 이전까지 조직과 업무 분담이 명확하지 않았던 사무처와 사목국이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그해 12월 6일에는 교구 내 복지기관을 관리하고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복지국’이 신설되었다. 1991년 4월에는 관리국에 기존의 서무과, 경리과 외에 법인과가 신설됨으로써 수원교구청은 1처 5국 체제로 개편되었었다.

 

1996년 3월 1일, 부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교회법에 따라 총대리를 겸무하게 되자 총대리가 사무처장과 관리국장을 겸임하던 관례가 폐지되었다. 이후 사무처장과 관리국장은 별도로 임명되었다.

 

1997년 2월, 수원교구는 화서동의 교구청을 정자동 신청사(현 수원교구청)로 이전했는데, 이에 앞서 1월 1일부로 교구청 조직을 개편했다. 기존의 사목국을 ‘복음화국’으로 개편하면서 사회복지국을 흡수했고, 교육국을 ‘청소년국’으로 개편하면서 성소국을 통합했다. 개편의 결과 기존의 1처 5국은 1처 3국(사무처, 복음화국, 청소년국, 관리국)으로 편제되었고, 화서동 구청사에는 사회복음화원(사회복지국이 개편됨)과 가톨릭 청소년 문화원이 자리잡게 되었다. [2018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8) 사회복음화와 복지사업의 본격적인 전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한 수원교구의 사회복음화 지향

 

1970~90년대 경제 성장과 인구 집중으로 서울을 비롯한 인근 수도권 지역은 도시화가 크게 진전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심화되는 빈부 격차와 사회안전망의 부실로 많은 도시빈민과 소외계층이 발생했다. 특히 노인, 아동,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

 

교구의 자립 기반 확립과 교세 성장을 우선 과제로 삼은 수원교구는 인력과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신 복지기관이나 수도회를 교구 내에 유치하거나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까지, 교구 내 진출한 복지기관이나 수도회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수원교구는 설정 25주년(1988)을 맞아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교구가 성장했음을 확인하고, 교구 차원에서 인적, 물적으로 사회복음화(사회복지)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1989년 한국 성체대회를 기점으로 정식 시작된 ‘한마음 한몸 운동’을 수원교구에서는 ‘성찬의 신비인 나눔을 실천하는 생활운동’으로 전개했다.

 

 

복지사업의 본격적인 전개

 

수원교구는 사회복지 사목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90년 11월에 ‘사회복지국’을 설립하여 사회복지 업무와 사회사목 업무를 주관하도록 했다. 교구 차원에서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 · 운영하고 교구 내 각종 복지기관을 지도하기 위한 독립 기구가 필요하자, 사회복지법인인 ‘천주교수원교구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고 1994년 5월 10일에 경기도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1990년대 수원교구 지역에서는 교구의 체계적인 사회복지 사목 추진과 함께 노인, 아동, 여성, 장애인, 지역, 청소년 관련 복지사업이 전개되었다.

 

수원교구로 진출한 수도회는 교구의 요청이나 지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복지사업을 전개했다. 개인이나 본당에서 시작한 시설 중에는 복지법인으로 발전하거나 교구, 수도회에 이관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복지사업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수원교구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과 선교회를 설립했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시설도 이전의 ‘보호’ 일변도 방식에서 벗어나 ‘직업 자활’을 위한 작업장 설립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했다.

 

또한, 1990년대에 수원교구 지역에 이주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후에 ‘엠마우스 이주사목’으로 연결되었다. [2018년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19) 최덕기 주교의 교구장 승계와 ‘5대 중점 사목 목표’ 제시

 

 

최덕기 주교의 교구장 승계와 착좌식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사직 청원이 교황청에 의해 정식으로 수락되자, 1997년 6월 4일, 최덕기(바오로) 주교가 수원교구 제3대 교구장직을 계승하였다. 9월 25일,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최덕기 주교의 제3대 교구장 착좌 및 신 · 구 교구장 이 ·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제3대 교구장 착좌식에 이어 10월 3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젊은이 축제는 교구장 착좌 축하잔치를 겸했다.

 

새로 취임한 최덕기 교구장은 전체 교구민의 의견을 수렴해 공동 목표를 설정하는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 합동총회’를 10월 9일에 개최했다. 합동총회에서 최덕기 주교를 비롯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은 1998년도에 실천할 교구의 공동 실천 목표로 ‘① 성령의 힘으로 소공동체를 활성화하자. ② 성경 말씀을 읽고 쓰고 묵상하자. ③ 성령의 힘으로 복음화에 앞장서자.’ 등의 세 가지로 정했다.

 


‘5대 중점 사목 목표’ 제시(1998년)와 추진 방향

 

1997년에 국가 부도 사태가 일어나 IMF의 금융 구제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최덕기 주교는 1998년 7월 5일 ‘사목협의회 회장단 하반기 교육’의 강론을 통해, ‘교구장 5대 중점 사목’으로 ‘성경 중심, 소공동체 중심, 간부육성 중심, 지역사회 복음화 중심, 청소년 중심’의 사목 방향을 제시했다.

 

이에 앞서 1997년 합동총회에서 결의된 ‘3대 사목 목표’는 실제 시행된 성과를 바탕으로 5대 사목 중점 방향으로 확대, 정리되었으며, 이후 교구와 본당, 단체들은 ‘교구장 5대 중점 사목 방향’을 사목 목표로 설정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2000년 대희년을 마무리하고 교구 시노두스를 준비 중이던 수원교구는 2001년을 맞이하여 ‘5대 중점 사목 방향’을 정리하여 ‘사목 지침’으로 발표했다. 중점 방향과 구체적 실천 사항으로 정리된 5대 사목이 사목 지침으로 공식 제시된 것은 2001년이 최초였다. 이후 최덕기 주교가 퇴임한 2009년까지 5대 중점 사목 방향은 시노두스의 의제인 ‘소공동체 활성화’ 및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와 맞물리면서 교구적 차원에서 추진되었고, 실천 사항도 계속 정비되고 추가되었다.

 

‘성경 중심 사목’의 경우 성경 읽기와 교육이 가족과 청년 복음화의 주요한 지표로 설정되었다. ‘복음화 중심 사목’에서는 모든 복음화의 기초인 가정 복음화가 강조되었고, ‘지역사회 복음화 중심 사목’에서는 선교활동과 사회 복음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간부육성 중심 사목’은 본당,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청소년 중심 사목’에서는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성경 중심의 신앙교육, 청년지도자 육성 등이 강조되었다. [2018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0) 수원교구와 2000년 대희년

 

 

대희년을 맞이하는 수원교구의 준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4년 11월 10일, 교서 ‘제 삼천년기’를 반포하면서 2000년 대희년의 의미와 중요성을 일러주고 대희년을 위한 영적 준비를 갖출 것을 권고했다.

 

수원교구는 김남수 주교의 교구장 재임 시절인 1997년 3월, ‘2000년 대희년 기념위원회’를 구성했고, 최덕기 주교가 교구장직을 승계한 이후인 1998년부터 대희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5월 13일에 교구 목표를 ‘교구 쇄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로 정하고 ‘성화운동, 증거운동, 선교운동’ 등 3대 실천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수원교구는 1998~1999년에 대희년 준비를 위해 3대 실천운동과 함께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제기한 ‘새날 새 삶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이 외에 대희년 준비 관련 책자 등을 제작 · 배부하였으며, 제1회 교구 시노두스의 개최 또한 대희년 맞이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수원교구의 2000년 대희년 행사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수원교구는 대주제를 ‘예수 그리스도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시어라.’로, 교구 목표를 ‘교구 쇄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로, 추진 방향을 ‘선교로 새 생명을!’으로 정했다.

 

실천사항으로는 3대 실천운동과 ‘새날 새 삶 운동’을 종합 · 수정하여 제시했다. 또한 2대 복음화 목표로 주일 미사 참례율을 전년 대비 10% 높이고, 세례자 수를 본당 신자 수의 1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10 · 10 운동’을 전개했다.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1999년 12월 25일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대희년 개막 미사에서 2000년 대희년 개막을 선포했다. 교구 차원의 대희년 행사는 1년 동안 ‘수도자(2월 2일), 병자와 보건 의료인(2월 9~12일), 여성(3월 25일), 노동자(4월 30일), 장애인(5월 7일, 28일 빈자리축제), 신학생(5월 14일), 성체대회(6월 25일), 성직자(7월 5일), 교도소(7월 9일), 젊은이[청소년](10월 8일), 어르신[노인](10월 10일), 평신도(10월 22일), 연령과 연령회(11월 11일), 농민(11월 12일)’을 주제로 개최되었다.

 

대희년은 2001년 1월 5일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폐막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마무리하게 되었다. 수원교구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은 대희년을 맞아 다양하고 뜻깊은 행사에 참여했고,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성당과 성지를 순례했다. 또한 선교활동에 중점으로 두어 선교율, 미사 참례율 10% 올리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대희년을 마감한 후 한국천주교회의 상황은 냉담자 증가, 세례자 감소, 주일 미사 참례율 감소 등으로 나타났고, 수원교구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통해 선교에 대한 사명의식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자세로 냉담 예방과 냉담자 회두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과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18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1) 수원교구 시노두스(1997~2001) 개최와 성과

 

 

제1차 수원교구 시노두스의 목적과 준비 과정

 

교구장 김남수 주교는 1996년 사목교서를 통해 제1차 교구 시노두스(synodus, 대의원회) 개최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2000년 대희년을 잘 준비하고 21세기의 변화하는 세상에 부응하는 교구로 거듭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김남수 주교의 뒤를 이어 교구장직을 승계한 최덕기 주교는 1997년 10월 9일 열린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합동총회’를 통해 교구 시노두스 개최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98년, 교구 공동체와 교구민의 의견을 수렴한 후 ‘교회의 기초공동체’와 ‘젊은이의 신앙생활’이 시노두스 의제로 선정되었고, 그해 7월 2일, 시노두스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1998년과 1999년, 2회에 걸친 시노두스 준비위원 교육을 마치고 1999년 7월 17일에 시노두스 개막미사가 봉헌되었다. 이후 1999년 9월부터 10월까지 ‘본당 시노두스’, 10월 30일에 ‘성직자 시노두스’, 2000년 3월 22일에는 ‘수도자들의 시노두스’를 실시했다. 2000년 5월과 6월에는 6회에 걸쳐 교구 및 지구 시노두스 의안 작성을 위한 ‘본당 시노두스’가 개최되었다.

 

 

수원교구 시노두스 개최와 성과

 

2000년 8월 30일, 시노두스 대의원 임명식 및 1차 본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교회 기초 공동체 활성화’라는 의제 명칭이 ‘구역 · 반 공동체 활성화’로 변경되었다.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지구 단위 시노두스가 실시되었고, 2001년 1월 17일에 ‘구역 · 반 공동체 활성화’를 주제로 한 시노두스 2차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이어서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방안’에 대해 지구 단위 시노두스가 실시되었고, 같은 주제로 6월 6일에 시노두스 3차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2차와 3차 본회의를 통해 토의된 의안은 시노두스 사무국에서 수합해서 정리했고, 이는 10월 11일에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교구 시노두스 폐막미사 및 최종 문헌 반포식’에서 반포됐다.

 

시노두스 최종 문헌에서는 ‘구역 · 반 공동체’와 ‘청소년 신앙생활’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시행세칙이 제정되었다.

 

수원교구는 시노두스를 통해 교구민 전체가 실천해야 할 복음화의 중점방향을 ‘구역 · 반 공동체(소공동체) 및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로 설정하고, 2002년부터 본격적인 실행기로 들어갔다.

 

교구 차원의 노력으로 본당은 단체 중심의 생활에서 소공동체 중심 생활로 변화했고, 소공동체 봉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 활성화되었다. 반면 청소년 사목은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을 위한 사목’이 이루어졌을 뿐 ‘청소년들의, 청소년들에 의한 청소년 사목’이 이루어지지 않아, 청소년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야 한다는 과제가 부각되었다.

 

시노두스의 실현목표는 최덕기 주교의 후임인 현 교구장 이용훈 주교 시기에 더욱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추진되고 있다. [2018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2) 교구 40주년(2003)과 해외 선교 및 민족화해를 위한 노력

 

 

수원교구 설정 40주년

 

수원교구는 2002년 11월 12일에 4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3년 1월 3일 준비위원 임명장 수여식을 시작으로 40주년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40주년의 주제는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로 정해졌다.

 

수원교구는 설정 40주년을 맞아 교구청을 비롯한 각 본당과 성지, 기관 등에서 40주년 기념 식수를 하고 교구 역사 사진전, 음악회, 백일장, 도보 성지순례를 개최했다.

 

또한, 대내 · 외적 홍보를 위해 교구 안내도를 제작 · 배포했으며, 교구《규정집》 발간과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백내장 및 녹내장 시안수술’을 지원하는 한편, ‘수원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교구 설정 4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대회는 10월 19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됐다.

 

수원교구는 설정 40주년을 계기로 ‘순교자 신심 강화, 소공동체 ·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본당 신설, 교구 기반시설 확충’ 등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과 동북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민족화해 활동과 해외 선교

 

제3대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전임 김남수 주교의 북방(북한) 선교 방침을 계승하고, 이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확장 ·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해 1999년에 공식 출범한 ‘민족화해위원회’는 북한 동포 및 중국교회에 대한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2000년부터 선교 사제를 중국(요녕 · 길림 · 흑룡강 교구)으로 파견함으로써 북방선교를 본격화했다. 그리고 대북 지원 사업을 종합적으로 실행하는 동시에, 국내의 ‘새터민’ 지원에도 힘을 기울였다.

 

수원교구는 2002년, 전 인류를 비롯해 분단 국가인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북한을 방문했고, 25일에 평양 장충 성당에서 ‘남북 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했다. 또한, 교구 신자들의 성금을 모아 마련한 축구공 2002개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에 전달했다.

 

2008년에 수원교구는 기존의 해외 선교 체제를 정비하면서 3월 11일, 복음화국에 ‘해외선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해외 선교 활동을 준비했다.

 

또한, 수원교구는 2008년 4월 3일자로 선교 사제를 남수단 룸벡교구에 파견했다. 교구 최초로 남수단에 파견된 선교 사제들은 복음화의 기초 작업으로 의료 봉사와 학교 건립을 했는데, 단순히 물질적 나눔만이 아닌 수원교구의 사목적 역량을 나누며 남수단 현지인들의 이웃이자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현재 해외선교후원회 소속 ‘수단선교위원회’는 현지 선교사를 도와서 교구민의 지원금과 물품을 모아 제공하는 등 남수단 선교지 주민을 돕기 위한 후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8년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3) 대리구제도 실시의 배경과 시행

 

 

대리구제도 실시의 배경

 

수원교구는 ‘제1차 교구 시노두스’를 개최하여(1997~2001년)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의제로 선택했다. 이러한 의제를 실현하면서 봉착하게 된 과제는 40년간 유지해 온 거대한 교구 조직의 개혁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구장 지구 대리제도’(대리구제)가 논의되었으며, 2005년 11월 30일에 ‘대리구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준비위원회는 신자 수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대리구 분할을 발표했다. 6개 대리구는 ‘수원대리구, 안양대리구, 평택대리구, 용인대리구, 성남대리구, 안산대리구’이며, 수원교구는 2006년 5월 22일부로 각 대리구장을 임명했다.

 

 

수원교구 대리구제도의 시행

 

2006년 7월 14일, 수원교구는 ‘천주교 수원교구 대리구제도에 관한 교령’(Decretum) 반포 및 ‘대리구장 서임 미사’를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하였다. 그리고 최덕기 주교는 ‘대리구제 설정을 공포하고 이에 따른 시행지침을 알린다.’는 내용의 교령을 발표했다.

 

대리구제도는 기존의 지구제도와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다. 지구가 대략 7~15개 정도의 본당이 연합된 결성체라면, 대리구는 그러한 지구를 2~4개 연합한 조직으로써, 평균 30개 이상의 본당을 묶은 것이다. 또 기존의 지구제도 하에서 지구장은 본당 신부로서 다른 본당 신부들과 수평적 관계에 있던 대표자임에 비해서, 대리구장은 교구장의 위임을 맡아 대리구 내의 사제들과 수직적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대리구제가 시행되면서 교구청의 1처 5국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업무와 직원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복음화국과 청소년국, 사회복음화국은 상당한 업무를 대리구로 이관했으며, 교구청에서는 정책 연구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대리구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본당과 연계하여 교육과 행사 중심의 공동체 사목을 하는 형태가 되었다. 지구는 대리구와 본당 간의 중간 역할을 하며 지구 사제들의 모임을 통하여 본당 연합 사목이 이루어지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다.

 

수원교구는 2006년 9월 26일부터 대리구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했고, 11월 1일에 ‘교구 사제평의회’를 재편했으며, ‘대리구 사제평의회’도 새로 구성했다. 대리구장은 2007년부터 대리구 운영지침에 의거해서 본당과 성지를 사목방문하게 되었고,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수원교구는 교구 전체의 목표인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위해 대리구제 정착을 핵심 과제로 삼았고, 가정의 붕괴와 해체라는 사회적 현상에 맞서 교회의 기초인 ‘가정의 성화’에 교구민 전체의 역량을 쏟기로 했다. 이 사목 목표들은 최덕기 교구장이 퇴임하는 2009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제도는 오늘날 비추어 보면 수원교구가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10월 21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4) 성가정 운동의 목적과 시행

 

 

성가정 운동(2007~2009년)의 목적과 시행

 

성가정 운동은 수원교구가 시노두스를 통해 추구했던 ‘소공동체 활성화’ 차원에서 중요한 운동이며, 본당(구역·반 공동체) 활성화는 물론 교구공동체(지구, 대리구)의 활성화에도 가장 기초가 되는 운동이었다.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소공동체 활성화와 대리구제의 성공을 위해, 우선 평신도 교회인 가정 공동체의 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실천 사항을 네 가지로 제시했는데 ① 서로 사랑하고 대화하는 가정, ②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생활화하는 가정, ③ 성사와 전례에 참여하는 가정, ④ 사회복지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가정이다. 이러한 성가정 운동은 2007년 2월부터 전 교구 차원의 ‘3개년 계획’(2007~2009년)으로 시작되었다.

 

 

성가정 운동을 통한 가정사목의 활성화

 

성가정 운동 제1단계인 2007년에 수원교구는 ‘가족과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며, 사랑을 나누는 성가정을 만들어 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그리스도교적 가정의 모습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먼저 가정기도를 정례화한 후 가족 미사에 함께하고, 가족 미사를 통해서 가족 친교를 이끌어낸 후, 그 결실을 가족이 함께 하는 이웃 사랑(봉사활동)으로 승화시키도록 했다.

 

2008년 ‘제2단계 성가정 운동’의 주제는 ‘실천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로 정하고, 모든 가족이 ‘가족시간’을 가지도록 권고했다. 그리하여 ① 매일 한 번 가정기도 하기, ② 매주 한 번 가족사랑 실천하기, ③ 매월 한 번 가족미사 참여하기, ④ 매월 한 번 가족이 함께 사랑나눔 실천하기 등을 실천하도록 권장했다. 이 중에서도 가족사랑 실천은 매월 교구에서 그달의 주제와 실천사항을 전달했고 각 대리구와 본당에서는 주보를 통해 공지하여 실천하도록 했다.

 

2009년 ‘제3단계 성가정 운동’은 ‘성가정을 이끄는 힘은 기도입니다.’를 주제로 하는 ‘가정기도와 사랑실천, 청소년 기도생활’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가정 기도문 양식과 월별 바오로 서간 묵상 및 기도문 등을 제시하여 가정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가족사랑 실천하기 운동’은 주보와 《가톨릭신문》(수원교구판) 등에 게재되었다.

 

2008년 6월 29일에 개막된 ‘바오로 해’는 성가정 운동 제2단계 및 제3단계와 맞물렸다. 수원교구는 2009년 6월 28일 ‘바오로 해’가 폐막될 때까지 교구민 모두가 바오로 사도를 본받아, 선교활동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되어 사는 본당 공동체, 대리구, 교구가 되고자 했다.

 

이처럼 ‘3단계 성가정 운동’은 원칙론적 구호에 머물던 기존의 운동과는 달리,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고 점검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운동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사회적 환경으로 가족 간의 친밀감과 결속력이 약해진 만큼 더욱 ‘가정기도’가 강조되고 실천되어야 하며, 본당 차원에서 가족미사를 봉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또한 신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사회 안에서 봉사하도록 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졌다. [2018년 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5) 수원교구 신앙선조들에 대한 현양과 시복시성 운동

 

 

초기교회 신앙선조들에 대한 현양과 시복시성 운동의 본격화

 

수원교구는 1996년부터 초기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과 시복시성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는데, 순교자들에 대한 기초 자료 조사와 함께 ‘시복 추진 허가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1997년 최덕기 주교가 교구장직을 승계한 이후에도 시복시성 운동은 지속되었고,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6위에 대한 자료집 5권을 간행했다.

 

2001년 봄 주교회의 총회에서는 개별 교구들이 진행하고 있던 시복 운동을 통합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그해 가을 주교회의 총회에서는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이하 ‘시주특위’)를 설치하고 ‘하느님의 종’(시복추진 대상자)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시복시성 운동 전개와 수원교구의 ‘창설주역’ 시복 추진

 

‘시주특위’는 2002년 5월 20일에 ‘하느님의 종’ 124위를 최종 발표했다. 2003년 10월 6일에 교황청 시성성은 124위 순교자에 대해 ‘시복 법정을 개정하는 데 장애 없음’ 공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시복재판부가 2004년 7월 5일 공식적으로 구성되었고, 9월부터 시복 재판(예비심사)을 개정하여 2006년 1월까지 (총 16회차) 각 시복 후보자에 대한 순교 사실, 무덤 확인, 순교지, 관련자, 치명 사실 정황 조사 등을 다루었다. 시복 절차의 시복 대상자 수원교구 현장 조사(2006.3.19일자 가톨릭신문) 마지막 단계로 2006년 2월부터 현장조사가 실시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3월 8일에 최덕기 주교를 비롯한 시복 추진 관련자들이 남한산성 성지, 천진암 성지, 양근 성지, 여주 성당, 죽산 성지를 방문했다.

 

시주특위는 2009년 5월 20일에 국내의 시복 절차를 완료하고, 모든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다. 이후 시성성의 심사를 거쳐 교황의 시복 결정이 내려졌고, 2014년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하는 124위의 시복식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또한, 수원교구에서는 시주특위의 시복시성 추진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2002년 5월부터, 시복 추진이 보류된 ‘창설 주역’ 4위(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와 ‘박해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후기 순교자들에 초점을 맞춰 자료 수집과 연구에 들어갔다. 2002~2011년 4차에 걸쳐 창설 주역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발표된 논문들은 수정 · 보완하여 간행했다.

 

수원교구는 추가 시복 추진 사업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2007년 12월 24일에 ‘수원교구 순교자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위원회는 ‘창설 주역’과 ‘병인박해’를 중심으로 한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목적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3월 춘계 정기총회를 통해 주교회의 차원에서 시주특위가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과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계속 담당하기로 했다.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조사 절차가 진행 중이다. [2018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6) 수원교구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수원교구의 본격적인 성지 성역화

 

최덕기 교구장 재임기에 수원교구는 순교자 현양과 신자의 신심 함양을 위해 시복시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본격적으로 성지 성역화에 힘을 쏟았다.

 

천진암 성지는 매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성지자료집을 발행했다. 1999년에 성모경당, 2011년에는 천진암 박물관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남양성모 성지는 2002년 이후 매년 ‘청소년 로사리오의 밤’을 개최하고 있으며, 2009년 3월 17일자로 ‘로마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모 순례지’로 승인받았다.

 

1998년 1월 30일에는 죽산 성지가 죽산 성당에서 분리되었고, 전담 신부가 임명되었다. 교구는 죽산 성지 안에 ‘교구 영성관’을 건립하고 2013년 6월 6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수리산 성지는 2006년 6월 4일에 최경환 성인 고택 성당을 봉헌했고, 2008년 9월 20일에 최경환 성인 유해 안치식과 ‘순교자 현양비’ 제막식이 열렸다.

 

남한산성 성지는 1998년 9월 26일에 순교성지로 선포되었고, 2015년 4월 25일에 새 성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구산 성지는 2000년 4월 29일에 성지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고, 2006년 4월 23일에는 김성우 성인의 동상과 모방 신부 흉상 등의 축복식을 거행했다.

 

1987년 9월, 성지로 선포된 ‘이천 어농 · 단내 성지’는 2003년 1월 28일자로 어농 성지와 단내 성가정 성지로 분리되었다. 어농 성지는 2007년부터 ‘청소년 성지’로 발돋움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단내 성가정 성지는 ‘성가정 성지’로 특화하여 성역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미리내 성지에서는 올해부터는 교구 초창기의 전통을 살려 매년 9월에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한다. 손골 성지에서는 2007년 10월 17일에 국제심포지엄(성 도리 신부 주제)이 열렸다.

 

 

새로운 성지의 성역화

 

2003년 9월 30일에 은이 · 골배마실 성지 전담 신부가 임명되었고, 2016년 9월 24일에 복원된 복원된 김가항 성당(김대건 신부가 사제 수품을 한 성당. 2001년 중국 상해에서 철거됨)의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2000년 9월 20일에 수원 성지가 선포되었고, 2003년 9월 30일자로 성지 전담 신부가 임명되었다. 2006년 11월 21일에 ‘뽈리 화랑’(수원 성지 내 옛 소화초등학교) 개관식을 가졌다.

 

수원교구는 1998년 2월 5일 현지 탐사를 통해 1801년 당시 양근 및 여주 순교터를 확인했다. 이후 2003년 9월 30일에 양근 성지 전담 신부가 임명되었고, 2011년 5월 7일에 성지 성당 봉헌식 및 시설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장주기 성인의 고향인 ‘요당리’는 2006년 9월 26일에 성지 전담 신부가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성지 성역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0년 5월 11일에 이용훈 교구장 주례로 새 성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수원교구는 추가 시복 추진 사업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2007년 12월 24일에 ‘수원교구 순교자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창설 주역’과 ‘병인박해’를 중심으로 한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목적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7) 제3대 교구장 재임기(1997~2009) 교구의 성숙과 교구체제 개편

 

 

교세 성장과 본당 증설

 

약 12년에 걸친 최덕기 주교의 교구장직 수행 기간 동안, 신도시 개발로 인한 인구 증가와 교구 차원의 선교 활동이 주원인이 되어 교구 신자가 42만 명에서 72만 명으로 증가했다. 사제는 248명에서 450명으로, 본당도 100개에서 187개로 늘어났다. 반면 공소는 42개에서 23개로 줄어들었다. 수도회는 42개에서 54개로, 성지는 9곳에서 14곳으로, 사회복지시설은 66곳에서 106곳으로 증가하여 교구가 대내외적으로 성장했음을 보여 주었다.

 

매년 많은 본당이 증설되자, 교구는 효율적인 관할을 위해 지구체제를 개편했다. 1997년에는 지구가 7개에서 13개로 늘어났고, 2006년에 다시 17개 지구로 확대 · 개편했다. 2006년 대리구제가 도입되자 지구를 24개로 확대 · 개편하여 대리구에 편입했다(2007년 1개 지구 분할, 총 25개 지구).

 

 

교구청 조직의 개편과 대리구제

 

1997년에 교구청사가 수원시 정자동으로 이전하면서 수원교구는 교구청 조직을 1처 3국(사무처, 복음화국, 청소년국, 관리국)으로 개편했다. 화서동의 구 교구청사는 ‘가톨릭 청소년문화원’(2007년 리모델링)으로 개조했다. 2000년 대희년과 교구 시노두스 개최 이후, 교구 행정의 원활한 수행과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02년 1월 29일에 1처 5국으로 재편했다. 기존의 3국에 복음화국의 사회복음화분야를 ‘사회복음화국’으로, 청소년국 성소부를 ‘성소국’으로 각각 승격시켜 2개 국을 신설한 것이다. 사회복음화원에서 담당하던 교정 · 노동 · 농민 · 환경 사목 등은 사회복음화국의 전담 기구나 관련 위원회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관리국은 기존의 ‘부’를 없애고 ‘경리과와 법인과, 교구묘원(안성추모공원)’으로 재편(2007년 수익사업과 신설)했다.

 

2002년의 대규모 조직 개편 이후에도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교구의 행정 업무와 대사회 활동(사회복음화)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기구의 설치와 조직 재편이 이어졌다. 2003년 1월 28일 ‘사제평생교육실’을 신설하여 사제 교육을 전담하도록 했다. 그해 12월에는 사무처 관할의 홍보실과 전산실을 통합하여 ‘홍보 · 전산실’을 신설했다.

 

2006년 대리구제도가 시행되면서 교구청 조직도 개편되어 9월 26일자로 부서 업무 이관과 조직 변경이 확정되었다. 교구청 복음화국과 청소년국의 업무가 대리구청(산하 복음화국, 청소년국)으로 이관되었고, 법인 대건청소년회(1998년 설립)가 청소년국 산하로 편입되었다. 2008년에는 해외선교 업무를 전담하는 ‘해외선교부’(복음화국 산하)와 교구 내 건설사업을 지원하는 ‘건설본부’(관리국 산하)가 설립되었다.

 

교회공동체의 대형화와 비대화가 심해지고 교회의 미래를 담당할 청소년층의 참여가 저조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수원교구는 시노두스를 통해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실천 과제로 삼고 노력했다. 교구청 조직의 재편과 대리구제도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구 차원의 체제 개혁이었다. [2018년 11월 25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8) 제4대 교구장 이용훈 주교의 착좌와 3대 복음화 방향

 

 

이용훈(마티아) 주교의 교구장 승계와 착좌

 

2009년 3월 3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건강상의 이유로 최덕기 주교의 교구장 사임 청원을 받아들였다. 교회법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제4대 수원교구장직을 승계했고, 2009년 5월 14일에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 수원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이용훈 주교는 취임사에서 ‘대리구제를 정착,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교구 시노두스의 실천사항인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에 계속 역점을 둘 것이라고 했다.

 

 

교구의 큰 틀(3대 복음화) 방향 제시와 실천

 

2009년 10월 27일, 이용훈 주교는 사목교서를 공표하면서 중점 사목 방향을 ‘3대 복음화’로 정리했다.

 

① ‘새 복음화’는 과거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실을 새롭게 분석하여, 세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느님의 역사를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여 수용할 수 있는 복음적 언어로 전해야 하는 사명을 말한다. 시노두스의 과제인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시행된 ‘대리구제의 정착’과 ‘가정의 성화’가 중심축을 이룬다. ② ‘내적 복음화’는 ‘새 복음화’를 실현하고 세상의 복음화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③ ‘외적 복음화’는 세상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 안에 완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책임과 사명을 수행하는 삶을 말한다. 지역선교, 해외선교, 사회복음화와 사회의 정의와 평화 실현, 사회복지 분야에 더욱 관심을 갖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목표로 활동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새 복음화’의 사명 아래 수원교구는 교구청 차원에서 사목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대리구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구청과 대리구청의 편제를 개편했다.

 

그리고 교구민의 ‘내적 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성경 읽기, 쓰기 및 성경공부 활성화’를 실천해 나갔다. 또한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2012년 부활 시기부터 ‘잘 섬기겠습니다!’(‘하느님 사랑과 섬김’, ‘이웃 사랑과 섬김’, ‘생명 사랑과 섬김’)라는 영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수원교구는 ‘내적 복음화’와 함께 ‘외적 복음화’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교세 성장 이면에 적지 않은 수의 냉담자가 발생했는데, 이를 계기로 교구 차원에서 2012년 7월 1일부터 1년간 ‘냉담교우 찾기 운동’을 실시했다. 또한 해외 선교 시스템을 구축하고 새로운 선교지(아프리카 잠비아, 남미 페루와 칠레)를 확대해 나갔다.

 

수원교구는 사회의 여러 계층에 맞는 특별한 사회사목을 활성화하면서 사회정의와 사회복지를 추구해 왔다. 교구 내 늘어나는 새터민이나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교구의 특성 등으로 농촌(농민), 환경(생명) 등도 주요한 사목 과제가 되었다. [2018년 12월 2일 대림 제1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29) 교구 설정 50주년(2013) 기념 준비위원회의 활동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의 출범(큰 비전, 하느님 비전을 제시하다)

 

교구 설정 50주년의 의미는 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제시한 ‘새 복음화, 내적 복음화, 외적 복음화’의 사목 목표를 구현하고, 전 교구민이 새로운 결심과 희망으로 역동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교구 설정 50주년을 뜻있게 기념하고 100년을 향해 가는 교구의 목표와 전망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2010년 1월,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준비위원회는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그 산하에 기획 · 홍보분과위원회, 기념사업분과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위원회를 두고 구체적인 사업을 전개했다. 기획 · 홍보분과위원회는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기획 · 홍보에 관한 제반 사항을 다루었으며, 기념사업분과위원회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사업을 담당했고, 미래정책분과위원회는 수원교구의 미래를 향한 전반적인 분야의 분석과 연구를 통해 교구의 100년을 위한 전망을 제시하고 설계했다.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을 위한 준비 과정

 

2010년 5월 12일, 5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 제1차 총회가 소집되어 해당 위원회의 각 위원들에게 임명장이 수여되었다. 그해 7월 8일 제3차 상임위원회에서는 ‘수원교구 50년사 편찬 계획안’을 심의하여 승인했다. 10월 5일 제4차 상임위원회에서는 ‘50주년 기념 기도문’을 인준했고, 11월에 교구 50주년 기념 로고와 대주제의 당선작(희망의 땅, 복음으로!)을 발표했다.

 

2011년부터 50주년 기념 행사가 다채롭게 거행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삶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앗숨도미네’의 창작 뮤지컬 ‘Yes!’의 순회공연이 진행되었고, ‘아띠마루’ 청소년 축제가 개최되었다. 2011년 하반기부터 교구 희년 맞이 성경 특강도 진행되었는데, 상반기(6·7월)와 하반기(11·12월)로 나누어 개최되었다. 2012년부터 2013년에 걸쳐 교구 차원에서 냉담교우 찾기 운동(2012년 7월~2013년 6월 말)과 잘 섬기겠습니다! 영성 운동(2012년 4월~2013년 말)이 진행되었다.

 

2013년 3월 14일 제14차 상임위원회에서는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타 교구 돕기 사업으로 봉헌된 헌금을 안동 · 원주 · 춘천 교구에 4억 원씩 지원하기로 했다. 나머지 금액은 해외교구 지원사업 용도로 남수단 룸벡교구에 지원했다. 2013년 9월 5일 마지막(제16차) 상임위원회는 ‘신앙대회 및 감사미사’ 헌금을 희귀 · 난치병 어린이 환자를 돕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2018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30) 교구 희년 및 신앙의 해(2013) 기념행사와 교구 비전의 제시

 

 

교구 희년, 하느님 나라의 기쁨 그 모습으로(50주년 개막 및 기념 행사)

 

2012년 10월 5일,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및 신앙의 해’가 개막됐다. 이날 개막미사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사목교서 ‘교회와 신앙’(2013~2014)을 발표하면서, 교구의 첫 희년이 우리 교구와 사회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도약의 전환점이 되길 바랐다. 더욱이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인 2012년 10월 11일에 선포한 ‘신앙의 해’(2012. 10. 11. ~ 2013. 11. 24)가 교구 희년과 겹치게 되어, 교구 설정 50주년의 의의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개막미사로 교구 희년을 시작한 수원교구는 2013년까지 교구 희년 성경특강, 병자의 희년, 성소자의 희년, 이주민의 희년, 농민의 희년, 기념 음악회 등 여러 행사들을 진행했다.

 

 

희년을 넘어 더 큰 희년으로, 100년을 향한 교구 비전의 제시(신앙대회와 폐막미사)

 

2013년 10월 3일,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기념행사의 절정인 ‘신앙대회와 감사미사’가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4만여 명의 교구민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신앙대회 및 감사미사는 ‘희망의 땅 복음으로’라는 주제 하에 제1부 신앙대회, 제2부 기념식, 제3부 감사미사 순서로 진행되었다.

 

감사미사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교구민은 교황님의 말씀과 소박한 삶을 본받아 복음적 가난과 청빈의 삶으로 무장하고,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세상살이에 지친 이웃 형제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세상 모든 이의 기쁨과 희망, 고뇌와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교구장 재임 동안 이 점을 실천하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수원교구 하느님 백성의 비전선언문’을 통해 ‘소통, 참여, 쇄신’을 우리 교구 미래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고 밝혔다. 즉 교구 희년을 신앙 선조들이 교회를 이루고 순교자들이 선혈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희망의 땅’에서 선조들의 신앙을 물려받아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며 ‘복음으로’ 하느님 나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인 첫걸음으로 규정한 것이다.

 

교구 설정 50주년 희년은 ‘교구 설정 50주년 폐막미사’로 마무리되었다. 2013년 12월 29일 교구장 이용훈 주교와 총대리 이성효 주교가 각각 정자동 주교좌성당과 조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주례한 미사를 비롯해 교구 내 각 본당에서 봉헌한 폐막미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갈무리하면서 단순히 폐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 준비하며 시작하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2018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수원교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 (31) 50주년 이후 100년을 향한 교구의 실천과 현재

 

 

50주년 교서의 발표와 핵심 가치의 실천

 

교구 희년을 마무리하고 100년을 향한 첫해인 2014년 신년 미사(1월 7일)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50주년 교서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를 발표했다.

 

이용훈 주교는 교서를 통해, ‘기쁨’과 ‘희망’으로 교구의 100년을 향해 가면서 ‘소통, 참여, 쇄신’이라는 핵심가치를 교구의 다양한 미래 복음화 정책과 과제들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하느님 나라 구현이라는 교회의 본질적 소명을 실천해 나가자고 했다.

 

수원교구는 2014년 10월 8일에 《수원교구 비전을 위한 핵심 정책 과제 50》을 간행하면서 교육, 제도, 사목 육, 제도, 사목 (사회복음, 사회복지 포함) (사회복음, 사회복지 포함), 사업 등의 분야별 과제를 제시했고, 현재 교구 구성원은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미사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아픔에도 동참하였다.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의 현재와 미래(대리구 제도 개선과 교구 편제 개정)

 

2018년 6월 29일, 이용훈 주교는 교령 “새로운 제도”를 반포했다.

 

이는 소통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상황 속에서 교구를 다시 변화시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존 대리구 제도를 개선하고 교구 편제를 개정한 것이다. 기존의 6개 대리구를 2개로 통합하여 제1대리구, 제2대리구로 재편하고, 보좌 주교들(이성효 주교, 문희종 주교)을 각 대리구의 대리구장으로 임명했다.

 

교구청 중심이었던 사목 방식을 완전히 분리하여, 대리구 내 지구를 중심으로 주도적이고 연합 사목을 전개함으로써 본당의 활성화를 이루도록 각 대리구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목권을 부여했다. 각 대리구에는 사무처, 복음화국, 청소년국이 있고, 대리구 산하의 지구에는 지구장 본당이 정해졌다. 지구장 본당은 지구 연합 사목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리구 제도의 개선과 함께 교구청의 편제 또한 개정했다. 교구청의 주요 기구로서 사목을 주도했던 복음화국과 청소년국을 대리구로 이관했다. 교구는 대리구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고, 이를 위하여 ‘교구 사목연구소’를 신설했다. 또한 교구는 새로운 기구로서 ‘성직자국’과 ‘홍보국’을 신설하여,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교구 사제 관련 업무와 대내외 홍보(사회와의 소통 창구)를 담당하게 했다.

 

새로운 제도는 ‘소통’을 추구하면서 ‘작은 교구, 강한 대리구, 활기찬 본당’을 이뤄내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수원교구는 지역과 지역, 계층과 계층이 서로 연대하고 나누는 통합 사목, 연합 사목으로 새로운 활력을 도모함으로써 교회 안팎의 위기와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 나가고 지역의 복음화를 이루어내는 또 하나의 50년(100주년)을 향해 가고 있다. [2018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수원주보 3면,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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