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4일 (수)부활 제4주간 수요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신학자료

sub_menu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62년 교계 제도의 설정

93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7-10-16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62년 교계 제도의 설정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3월 10일 자 교서 「복음의 비옥한 씨」(Fertile Evangelii semen)를 통해 한국에 교계 제도를 설정하였다. 이 사실은 3월 24일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그에 따라 6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교계 제도 설정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한국에는 세 개의 관구(서울·대구·광주)가 생겨났고, 서울, 평양, 함흥, 춘천, 대전, 인천, 대구, 청주, 부산, 광주, 전주 등 11개의 대목구(代牧區, Vicariatus Apostolicus)가 교구(Dioecesis)로 승격되었다.

 

교계 제도(Hierarchia)란 신분과 직무상 서열화가 된 성직자들(주교, 사제, 부제)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교회의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는 교회의 통치 조직을 말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과 같은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은 교황과 주교에게 주어지며, 부분적으로 사제와 부제에게도 위임될 수 있다.

 

1962년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주교와 사제가 있었고, 주교의 재치권도 행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이전의 한국 천주교회는 정식 교구가 아니라 임시 교구인 대목구 체제였고, 교구장이 아니라 교황을 대신하여 다스리던 대목구장 체제였다. 따라서 교계 제도의 설정은, 한국 교회가 ‘임시와 대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교회법상 자치권을 누리는 완전한 개별 교회로 재탄생하는,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대목구란

 

대목구는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된 지역이 아니라, 교황청에서 임명한 주교[代牧]가 교황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선교지이다. 따라서 대목구의 책임자인 대목은 ‘교황의 이름으로’ 대목구에서 재치권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1962년 이전의 한국 교회는 왜 대목구 체제로 있었을까? 다시 말해 교황청에서는 왜 1831년에 조선 선교지를 정식 교구가 아닌 대목구로 설정하였을까?

 

대목구 제도가 실시된 것은 선교 보호권(padroado)과 관련이 있다. 보호권은 15세기 이래 교황청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부여한 포교상의 특권이다. 15세기와 16세기에 걸친 대항해 시대에 교황청은 해외의 포교 사업을 대부분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에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양국은 새로 발견된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의무와 함께, 선교 지역에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며, 교회를 감독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양국의 관할 구역은 1494년 6월 7일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항해권은 서경 43도 37분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보호권 제도는 선교의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의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거나, 식민지를 지배하려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이후 교황들은 선교에서 교황의 직할 체제를 이루고 보호권 체제의 폐단을 없애고자 했다. 그 결과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1622년 1월 6일에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을 설립했다.

 

포교성성은 교황청 중심의 선교 체제를 구축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정책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보호권에 따라 파견된 탁발 수도회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포교성성은 보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직접 선교 활동을 관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대목구 체제였다. 곧, 보호권 교구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지역에 대목구를 세우고, 교황의 대리자인 주교를 파견함으로써, 교황청에서 직접 선교 지방을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대목구의 설치도 보호권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로 인식되었다. 이에 포교성성은 1690년에 북경교구나 남경교구와 같은 보호권 교구를 설치하는 등, 보호권 세력과의 타협 속에 대목구 체제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11년 이래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던 조선 신자들의 노력과 포교성성의 선교 정책이 맞물려 1831년에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던 것이다.

 

 

교계 제도의 설정 배경

 

1831년에 설정된 조선대목구는 1911년에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된 이후 여러 차례 분할을 거듭했고, 그 결과 1961년에는 11개의 대목구가 한국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131년간 유지되던 대목구 체제가 왜 1962년에 정식 교구 체제로 변경된 것일까? 교황 교서 「복음의 비옥한 씨」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국은 복음의 비옥한 씨가 뿌리 깊이 박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열매가 풍성한 큰 나무로 자란 나라였다. 그리하여 포교성성에서는 한국에 교계 제도를 설정하고자 했고, 이에 요한 23세 교황은 포교성성의 추기경들과 주한 교황 사절이었던 사베리오 주피 대주교의 의견을 들은 뒤 한국에 교계 제도를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교황의 결정은 교계 제도를 설정할 정도로, 한국 교회가 성장했음을 인정한 결과였다. 실제 1962년의 통계를 보면, 한국의 신자 수는 530,227명이었고, 본당 수는 275개, 한국인 성직자 수는 296명, 외국인 성직자 수는 250명에 달하였다. 이 통계는 첫 번째 교구 분할이 있기 직전인 1910년의 신자 수 73,517명, 본당 수 54개, 한국인 성직자 수 15명, 외국인 성직자 수 47명과 비교할 때, 한국 교회의 성장 정도를 잘 말해 준다.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한국 교회의 ‘장한 역사와 신자들의 깊은 신심’도 교계 제도 설정의 배경으로 언급되고 있다. 곧,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설립되어 유지된 한국 교회의 역사와 오랜 박해 속에서도 순교로써 교회를 지킨 신자들의 신심이 인정된 결과라는 것이다.

 

아울러 주한 교황 사절 서리 무튼 몬시뇰이 말한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높은 평판도 교계 제도의 설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신자 총수 50만은 남한 전체 인구 2천5백만의 2%밖에 되지 못하지만, 신자들의 강한 신념과 열성, 신심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수적인 약점을 능가하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게 했다.”

 

이처럼 1962년에 설정된 교계 제도는 교세의 증가, 장한 역사와 신앙심, 높은 사회적 평판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곧, 100년의 박해 시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지켜 낸 신앙의 결실이 교계 제도의 설정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현지인 성직자단의 활동을 강조하던 교황청의 방침도 반영되어 있다.

 

 

청년기 교회의 책임과 역할

 

신자들은 교계 제도의 설정으로 한국 교회가 보편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은 단순히 긍지를 느끼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자만하지 않는 깊은 겸손과 새로운 책임에 대한 각성이 긍지 속에 포함되어야 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스스로 돕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외부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원조에만 의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의 전례 생활은 신자들의 영신적 성장을 위한 것이므로, 능동적인 참여를 촉구하였다. 아울러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왔다고 전제한 뒤, 신자들이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를 것을 당부하였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내용이 교계 제도의 설정에 함축된 의미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교계 제도의 설정은 한국 교회가 유년기에 있지 않음을 인정한 것이고, 교황의 이러한 판단이 지혜롭다는 것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은 한국 신자들의 할 일’임을 강조했다.

 

자조(自助) 정신을 기르고, 영신적 성장을 위한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당시의 시대정신을 읽고 실천함으로써, 교계 제도 설정의 정당성을 세계에 증명해 보이자는 것이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로 진입한 상황에서, 교회와 신자들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2017년의 한국 교회는 어느 단계에 와 있고, 이 단계에서 교회와 신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0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0 1,621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