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신학자료

sub_menu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거룩함과 사제 성화: 내 마음의 예수와 제자 됨의 길

110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06-18

[경향 돋보기 - 거룩함과 사제 성화] 내 마음의 예수와 제자 됨의 길

 

 

사제 성화의 날 특집으로 부탁받은 주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르고자 하는 사제에게 요청되는 성화의 길’이다. 사제가 성덕을 쌓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이다. 특히 교회 내 성폭력 사건을 사죄하며 이를 근절하고자 사제 영성의 강화와 사제 교육, 사제 관리 제도의 보완과 개혁에 대해 논의하며 대응책을 마련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사제의 인간적 나약함과 한계까지 함께 다뤄 주면 좋겠다는 부탁도 받았다. 쉽지 않은 주제다.

 

사제 성화의 길은 전통적으로는 ‘영성 신학’의 주제임에도 ‘성 윤리’를 전공한 이에게 이 글을 부탁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하늘의 뜻을 찾는 길’이라는 ‘영성’과 땅을 기반으로 ‘좋은 삶을 추구하는 여정’인 ‘윤리 · 도덕’이 다른 목표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범이 예수님의 삶에서 드러났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교구 사제의 성화라는 주제도 예수님께서 열쇠를 쥐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신 예수님

 

신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큰 도전이었던 체험이라며 한 신학생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신학교에 갓 입학하고 ‘영성의 해’를 지내던 첫 학기에 담당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먼저 여러분 마음에 품고 있는 ‘예수님의 상’(像)을 다 깨뜨려 버리시오!” 예수님에 관한 나름의 생각들을 먼저 내려놓고,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삶을 처절하게 고민해보자는 말이었지만, 당시 자신에게는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예수님에 관한 생각들이 모두 틀렸다는 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굴라 신부의 대답은 이렇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동의할지 몰라도 각자가 지닌 하느님의 이미지가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차이는 하느님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하여’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지 구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사제 성화의 길도 사제가 어떤 하느님과 어떤 예수님의 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사제 직분으로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가 아니라, 저마다 하느님 체험의 자리가 다르고, 시각에 영향을 준 체험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다. 사제 성화의 길을 묻는 질문은 이제 ‘사제의 상’에 관한 질문으로 바뀌고, ‘예수님의 상’을 먼저 점검해 보라는 도전으로 바뀐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하고 물으셨다. 사제 성화의 길을 궁금해하는 이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에게 나는 누구인지’를 물어보실 것 같다.

 

다음은 굴라 신부의 「The Good Life」(좋은 삶으로의 초대)라는 책에 등장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에 관한 다섯 가지 진술이 있다.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해 보며, 과연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삶의 어려움이 전혀 없으셨다. 삶에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언제나 확신하셨다.

· 예수님의 사랑에도 성(性)의 다양한 차원이 있으셨고, 성장기를 거치시면서 당신의 인성과 타인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 안에 성의 다양한 차원을 통합해야만 하셨다.

· 예수님께서 한 사람으로 성장하실 때 부모의 돌봄과 친구들의 사랑이 도움이 되었다. 

· 예수님께서 사막에서 받으셨던 유혹은 사명을 포기할 만큼 실질적인 유혹이었다.

 

이 질문을 여러 그룹과 함께 진행해 보았다. 작업한 결과는 흥미로웠다. 교우들과 수도자, 신학생의 구분 없이 대답은 다양했다. ‘우리는 과연 같은 교회에서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질문이 믿을 교리를 묻는 질문은 아니다. 여러분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지닌 ‘예수님의 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마음에 품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면, 우리 안의 예수님의 상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의 행동과 성품에 영향을 미친다. 성인과 성녀들처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삶을 영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 예수님에 관한 간접적인 체험과 이미지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각기 추구하는 성화의 길이 다른 까닭도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의 상’이 다르고, 각자 마음에 품은 ‘영성’의 상태와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화의 길에 대한 질문도 다르게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사제의 행동 지침이나 강령에 대한 교육보다 더 절실한 부분은 지금껏 하느님에 관한 간접적인 체험이 왜곡시켜 놓았을지도 모르는 나름의 ‘예수님의 상’과 ‘하느님의 상’에 대한 점검을 말이다. 그분은 늘 같은 분이시지만 바라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려는 나의 ‘욕심’과 ‘해석’이 내 ‘시선’을 가렸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급히 점검해야 할 ‘사제의 상’

 

한 신부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자에서 ‘視’(시)와 ‘見’(견)은 다르게 사용하며, 그래서 빛의 에너지가 눈의 망막을 자극하여 일어나는 감각 능력은 견각(見覺)이라 부르지 않고 시각(視覺)이라 부른다고 한다.

 

‘視’는 겉으로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고, ‘見’은 내면의 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이자 전통 태교 연구자인 김수용 교수도 「대학」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비슷하게 말한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심부재언이면 시이불견하고 청이불문하며 식이부지기미니라.’ 하고 읽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려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니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視’와 ‘見’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겉으로는 보아도[視] 깊은 뜻을 보지[見] 못함을 탓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문제는 ’봄‘의 한계를 점검하는 문제이며, 요한 카시아노 성인의 말처럼 보지 못하는 ‘마음의 흔적’을 점검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따라서 사제의 성폭력에 대한 대응책과 예방을 위한 점검으로 이를 근절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하느님의 상’, ‘사제의 상’을 점검하는 문제가 더디더라도 시급히 해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새로 만난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군주 같은 하느님 상’이 우리 신앙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비판한 적이 있다. 제자 됨의 길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공통으로 ‘유비적 상상력’의 훈련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반대로 군주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살아간다면 군주와 같은 사제의 모습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셨다. 친구와 친해지려면 그 친구가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함께 진지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친구와 달리 상상한다면 삶의 방향도 그 친구와 다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자 됨의 삶이란 단순히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이를 있는 그대로 따르는 삶을 뜻하지 않는다. 당시에 적용되던 예수님의 말씀을 유비적으로 상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 ‘재창조’되는 과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다. 예컨대 예수님 시대에는 인공 지능과 유전자 조작을 비롯한 다양한 윤리적 문제가 없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당면한 시대의 어려움을 지혜롭게 풀려면 그분의 방식으로 생각하되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사제 성화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질문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생각하되 다르게 적용할 수 있느냐가 성패의 열쇠라면 우리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성화의 길을 위해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떤 사제 생활을 하셨을까?’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삶에서 하느님께 헌신의 노력을 다하셨듯이, ‘나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헌신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제 ‘사제 성화의 길’에 대한 고민은 ‘사제 관리 제도의 보완과 대응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행동의 규범적 차원도 중요하지만 ‘사목자로서 완덕에 이르려면 어떤 덕목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

 

「The Way of Goodness and Holiness」(좋은 삶과 거룩한 삶에 이르는 여정)라는 책에서 굴라 신부는 “나의 은퇴식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묘사할 것 같은지를 물어보자.”고 제안한다.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동료로서, 가족으로서, 교우로서 자신을 어떤 사람이었다고 말할 것 같은지를 세 가지 덕목의 형태로 작성해 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사제 생활에 제안할 수 있는 덕목은 다양할 것이다. 감사와 겸손, 신의, 자기 배려, 지혜, 정의, 자비, 용기, 환대 등 이미 많은 경로를 통해서 접했던 성품으로 목록을 작성할 수 있겠지만, 이 질문에서 각각의 덕목이 객관적으로 어떤 뜻을 지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 질문의 요지는 덕목의 개념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웃에게 어떤 사람으로 불리고 싶은 바람이 내 안에 있는지, 그리고 그 실천의 동력과 의지를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성화의 문제에서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까닭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천의 동력을 찾지 못해서일 때가 많다. 하느님과의 사랑이 다소 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 사랑이 드러나는 자리인 가까운 이웃들과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캐나다 주교회의가 제안했던 다섯 가지 관계의 범위(교육, 동료, 교회,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를 따라 스스로 윤리 강령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곧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사목할 교우들, 동료 사제들, 자기 자신)과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지역 사회와 세계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 안에서 도덕과 영성 생활의 실천 동력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제 생활의 성화를 위한 이러한 노력은 기존의 ‘도덕 지침서’와 달리 관계적 차원을 고려하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실천 동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전문직 윤리에서 말하듯이 사제가 성범죄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먼저 교우들과 맺는 모호한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힘의 차이’를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미성년자들과의 ‘경계 유지’에 힘쓰고, ‘전이와 역전이 현상’에 대한 예비 신호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성폭력의 범위와 행동 강령을 지식으로 인지하는 것과 구체적인 사목 현장에서 살아가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의 상을 먼저 점검해 보고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왔는지를 고민해 보는 노력이 성화의 길에 좀 더 실질적인 방향타가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그분은 나에게 누구이신가?’를 먼저 자문해 보는 예수 성심의 유월이었으면 좋겠다.

 

*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번역서로 리처드 M. 굴라의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가 있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0 1,902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