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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영화 군함도 - 꼭 성찬이어야 성찬인가

104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7-10-18

[영화 속 인간과 세상] 영화 ‘군함도’ - 꼭 ‘성찬(盛饌)’이어야 ‘성찬(聖餐)’인가

 

 

드라마, 2017.07.26.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132분, 감독 류승완.

 

 

참으로 많은 것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어느 하나 잊을 수 없다. 강제징용, 위안부, 친일 앞잡이, 그리고 배신자들. 일제치하의 고통과 치욕, 고통과 분노의 역사는 여전히 살아있다. 역사와 기억이 아니라, 현재이고 실재이다.

 

잘못된 역사, 아픈 역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은 어렵고도 괴롭다. 그래도 외면하거나 감추려 하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그 역사를 직시하면서 치유해야 하는 이유는, 상처를 준 자와 상처를 입은 자 모두 다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직시와 반성과 사죄가 용서로 이어진다. 주님도 진실로 참회하는 자는 기꺼이 용서하신다.

 

역사는 그 역사 속을 지나온 사람들의 것이다. 때문에 누구 한 사람, 아니면 몇몇의 어설픈 합의로 그 진실이 바뀌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 역사는 허구가 아니기에 함부로 상상해서도 안 된다. 역사의 진실을 감추고 속이려는 것도 온당하지 못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역사라고 하더라도 제멋대로 바꾸거나 과장하는 것도 위험하다.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은 ‘지옥’을 겪었다. 학도병과 위안부들, 징용자들이 그랬다. 우리가 군함도로 부르는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하시마 탄광에 끌려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군함도가 어떤 섬이고, 일제가 그곳에서 조선인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는 증언으로, 남아있는 사료로 이미 알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는 그들의 이야기다.

 

패망을 앞둔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했던 1945년 2월, 한 무리의 조선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아니면 돈 벌게 해준다고 해서, 아니면 속아서 지옥의 섬 ‘군함도’로 간다. 이미 그곳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 지하 1,000미터가 넘는 곳까지 들어가 석탄을 채취하고 있다.

 

<군함도>는 시작부터 이렇게 고백했다. 실제 사실에 영감을 받은 ‘창작’이라고.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허구란 얘기다. 군함도란 모티프를 가지고 마음껏 과장해 일제의 잔학성을 고 발하고 조선인들의 참상과 불굴의 정신을 마음껏, 그리고 생생하게 한번 그려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인물부터 다채롭고 호화롭게 짰다. 경성 반도호텔 악단장인 강옥(황정민)과 일곱 살 난 그의 외동딸 소희(강수안), 종로 일대를 주름잡던 깡패 최칠성(소지섭), 강제위안부였던 말년(이정현)이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한 배를 탔다. 경성제대 학생도 끼워넣었다.

 

영화는 무자비한 폭력과 인권유린, 끔찍한 탄광 안의 풍경을 통해 이곳이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지옥, 죽음의 섬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린다. 지옥의 폭군인 일본인 소장과 그 지옥을 더 지옥으로 만드는 일본인보다 더 악랄한 조선인 앞잡이 또한 빼놓지 않았다. 같은 조선인 징용자이면서 일본의 ‘개’ 노릇을 하는 송종구, 거물 독립투사였지만 변절해 일본인 탄광소장과 짜고 동포들을 속이며 고혈을 빨아먹는 윤학철이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또 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윤학철을 구하려고 나중에 인부로 가장해 섬에 침투하는 광복군 OSS대원 박무영(송중기).

 

이 정도면 한바탕 활극을 펼칠 진용은 충분히 갖춘 셈이 아닌가. 배우들 면면은 어떤가. 역시 성찬(盛饌)이다. 아니나 다를까. <군함도>는 일본인들의 극단적 가학과 그에 대한 저항, 치를 떨게 하는 반민족적 행위와 고통의 끝자락에서도 피어나는 동족애로 분노와 안타까움, 통쾌함과 뜨거움의 극단적 감정을 자극하는 화려한 활극을 펼친다.

 

최칠성이 보기 좋게 주먹으로 송종구를 눕히고 작업반장이 되고, 일본인 유관으로 간 어린 소희가 아슬아슬하게 악단에서 부르던 노래와 춤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강옥은 일본인 비위 맞추기로 막장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윤학철은 태연하게 독립지도자 행세를 해 조선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신분을 숨기고 잠입한 박무영은 예리한 감각으로 윤학철의 정체를 밝혀낸다.

 

인물들을 통한 감정의 극대화도 아끼지 않았다. 말년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위안부 동원에 앞장선 조선인 앞잡이들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고, 춘화와 어린 여자아이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통해 일본인들의 변태적 정서를 고발했다. ‘희망가’를 함께 부르는 강옥과 소희를 통해서는 극한 상황 속에서 애절한 가족사랑을 느끼게 했다.

 

그런 다분히 감정적 공감을 가지고 거쳐 <군함도>는 영화의 궁극적 목적이 한판의 거대한 승부에서의 통쾌한 승리인양 복수와 탈출극을 벌인다. 강옥은 딸을 위해 용기 있게 나서고, 박무영은 변절자를 처단하고 일당백의 불사조로 조선인 탈출의 선봉장이 된다. 깡패 최칠성은 말자에게 순정을 보여주고, 조선인들의 탈출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의리의 사나이’가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강옥, 박무영, 말자, 송종구, 최칠성, 윤학철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과 이미지 그리고 그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들이. 일제만행을 고발한 온갖 영화들, 액션영화, 심지어 오래된 서부영화 <황야의 7인>까지 떠올리게 한다.

 

<군함도>는 욕심이 과했다. 영화 한 편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고, 너무 많은 것을 보려주려 했다. 일제의 강제징용의 잔학성 고발에 만족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와 친일 앞잡이와 변절자의 존재까지 한꺼번에 한 상에 올려놓으려다 보니 남이 만든 요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영화 <군함도>에서 만나고 싶었던 것은 허구의 멋진 탈출성공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조금은 착잡하고 답답할지라도 그곳에서의 진실과 일본이 그것을 숨기려는 이유이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만 받은 ‘창작’이라 하더라도 일본인들이 숨긴 진실의 ‘장부’의 표지만 보여주지 말고 한 번이라고 펼쳐 읽었어야 했다.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도.

 

역사도 얼마든지 활극이 되고, 오락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실’은 명백히 살아있어야 한다. 허구와 상상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어야 하지 사실 자체를 바꾸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화려한 재료들로 만든 온갖 요리로 가득한 ‘성찬(盛饌)’이 꼭 ‘성찬(聖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서툴고 작은 것이지만 정성을 다해, 진심을 담아, 내 솜씨로 맛을 낸 음식이야말로 ‘성찬(聖餐)’이다.

 

[평신도, 2017년 가을(계간 57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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