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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8일 (목)부활 제3주간 목요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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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아름다움의 증거자

49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06-04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아름다움의 증거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늘 나라,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 온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땅,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흡족함, 자비로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자비,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을 보는 능력,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과의 유사함.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이루어지는 삶

 

행복을 원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행복을 얻고자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의 삶의 의미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때, 그분은 그런 인간을 만나 주십니다. 결국 우리는 행복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올라가는 여정에는 넓이, 길이, 높이, 깊이의 네 개념이 동반합니다. 넓이는 선한 행동, 길이는 너그러움과 인내, 높이는 무엇보다 우위에 있는 상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깊이는 마음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분 의지의 비밀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초대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 중에 사악한 말을 듣거나 모욕과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사악한 말을 듣기만 하면 복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조건을 다셨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말이 거짓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악한 일 때문에 욕을 먹는데 그 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복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역시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벌 자체가 아니라 벌을 당하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하며, “우리는 먼저 올바른 이유를 선택합시다. 그런 다음 불안에 떨지 말고 그 벌을 견딥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초대에 응답하며 어려움을 겪는 중에 예수님의 여덟 번째 행복이 선포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에 맞설 때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200년경의 순교자 펠리치타스(Felicitas) 성녀는 감옥 안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간수가 출산의 고통을 겪는 그를 멸시하며 “며칠 후에 짐승과 대전할 텐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지금은 내가 겪는 고통을 내가 견디지만 저곳에서는 내 안에 다른 이가 있어 그가 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 역시 그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성녀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사시고 자기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시련의 불가마 속에 놓인 데 대해 놀라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받는 것이 그분의 구원 수난에 참여하는 길이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1베드 4,12-14 참조).

 

 

영적 아름다움으로의 초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을 통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그분이 사람이 되신 자비로움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그분이 아름답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 왜 십자가 위에 그분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인간들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느님의 연약함이 인간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때, 곧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갈 때 사랑으로 걸어가는 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인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답게 되는가? 항상 아름다우신 그분을 사랑하면서이다.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만큼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고 그분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분을 따르고 본받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내적 현존이 밖으로까지 빛나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세상에 현존케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행복 선언의 여정에는 ‘복되다’라는 표현 외에 ‘기뻐하다’란 단어가 항상 동반합니다.

 

행복을 얻는 것은 일생에 걸친 노력입니다. 많은 난관과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신클레티카 암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처음에는 갈등도 많고 할 일도 많지만, 나중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건 마치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만, 나중에는 바라던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서 우리 자신 안에 거룩한 불을 지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교회에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준비할 때 자주 권고하는 행복 선언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마음의 가난을 포옹하는가? 아니면 재빨리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는가? 나는 누구를 위하여 슬퍼하는가? 나는 얼마나 온유하게 복음에 응답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의로움에 굶주리고 있는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가? 내 마음은 얼마나 순수하며, 무엇이 내 마음을 불손하게 유지시키는가? 나는 어떤 방법으로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하는가? 내 삶을 엇갈리게 만드는 분할점은 무엇이며, 평화 조성가로서 나는 이러한 분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는가? 나는 어떠한 원수들을 사랑하는가? 나는 어떠한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위협받고 있는 누구의 삶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가? 나는 박해를 복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에게 고통을 줄 것 같은 문제들을 피하는가?”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2월호(통권 465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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