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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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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특별 전교의 달 신앙의 증인 (하) 복자 8명

56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28

특별 전교의 달 ‘신앙의 증인’ (하) 복자(8명)


가난하고 병든 이들 섬기고 신앙 지키려 기꺼이 목숨 바쳐

 

 

자크 데지레 라발 신부.

 

 

특별 전교의 달을 맞아 교황청이 소개한 신앙의 증인 33인 가운데 마지막으로 복자 8명을 살펴본다.

 

 

모리셔스의 사도로 불리는 자크 데지레 라발(1803~1864) 신부는 원래 의사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의대와 신학대를 고민하다 의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는 사제의 꿈도 품고 있었다. 의사로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꼈지만, 마음은 왠지 모르게 공허했다. 고심 끝에 다시 신학대에 들어간 그는 35세에 뒤늦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사제라면 선교지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성령수도회에 입회했다. 이후 모리셔스로 파견됐는데 모리셔스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 출신으로 가난했고 글도 몰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제로서 의사로서 지역민들의 몸과 마음을 살린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 샤를 드 푸코 신부.

 

 

사막의 은수자로 알려진 샤를 드 푸코(1858~1916) 신부는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기숙 학교에서 퇴학당한 그는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에 입대했지만 역시 제멋대로 지내다 문제를 일으켰다. 제대한 뒤에는 무작정 모로코 사하라 사막으로 떠나 사막에서 생활했는데, 사막이 주는 고독함과 알 수 없는 영적 기운에 매료당했다. 고국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회심했고, 그때부터 기도와 금육의 삶을 시작했다. 관상 수도회인 트라피스트회에 들어가 시리아, 알제리 수도원에서 지냈다. 나자렛에서 수녀원 문지기로 살던 그는 파리로 돌아와 사제품을 받고 다시 사막으로 가서 미사와 성체조배, 관상의 삶으로 신앙을 사는 모범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사막에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그의 삶에 큰 영감을 받고 하느님을 체험했다.

 

안나 마리아 자부헤이(1779~1851) 수녀는 가톨릭 신앙을 탄압하던 프랑스 혁명기에 나고 자랐다. 사제들이 몰래 숨어 미사를 드리는 걸 보면서 자란 그는 자신도 사제들처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앙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10대 때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여러 수녀원을 다니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이들과 클루니의 성 요셉회를 설립,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에 매진했다. 프랑스 전역은 물론 아프리카에까지 선교 영역을 확장했다. 세네갈, 잠비아, 시에라리온 등지에 수도원과 학교를 세웠고, 현지인 사제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아프리카 청년들을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 사제가 되도록 지원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사제품을 받고 아프리카에서 사목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편견에 맞서 싸우며 흑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 안나 말리아 자부헤이 수녀.

 

 

이탈리아 출신인 마르코 안토니오 두란도(1801~1880) 신부는 어릴 때부터 선교 사제가 되고 싶어 했다. 집 옆 건물이 성빈센트선교회관이어서 선교사들을 자주 보며 자랐다. 중국 선교를 꿈꾸던 그는 빈센트회에 입회해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 중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 생활을 했다. 그는 다시 이탈리아 토리노로 발령받아 수녀원 영적 지도를 맡았다. 그리고 수녀들과 함께 가난하고 병든 이들, 특히 전쟁 중 다친 군인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전쟁터로 나가 부상당한 병사를 도우며 ‘야전병원’ 사목을 이끌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당한 알제리 순교자 19위는 2018년 12월 시복됐다. 시복식은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베치우 추기경 주례로 알제리 오랑교구에서 열렸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슬람교 사이에서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 중 7명은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로 영화 ‘신과 인간’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10년간 알제리 정부와 이슬람 과격 단체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지속됐다. 과격 단체 만행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사제와 수도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고 알제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오랑교구장 피에르 클라베리 주교도 그중 한 명이다. 시복식에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이슬람 신자들도 함께해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헌신해 온 화합의 결실을 확인하게 했다.

 

린달바 주스투 지 올리베이라(1953~1993) 수녀는 브라질 출신이다. 암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고 임종을 지키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도우며 한평생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빈센트수녀회에 입회해 수녀가 됐고 입회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아픈 이들을 돌봤다.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은 그의 삶에 감동했고 알코올중독자였던 친오빠는 그의 조언에 따라 술을 끊고 새 삶을 살았다. 친구 몇몇은 그를 따라 수녀회에 입회할 정도였다. 그는 요양원에서 아픈 어르신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항상 정성스럽게 성체를 모시고 친절한 태도와 기도하는 모습으로 말없이 신앙을 전했다. 올리베이라 수녀에게 반한 한 남성이 요양원에 거짓으로 입원해 그를 괴롭혔다. 올리베이라 수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은 남성은 어느 날 새벽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수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 메르세데스 데 헤수스 몰리나 수녀.

 

 

메르세데스 데 헤수스 몰리나(1828~1883) 수녀는 에콰도르 출신으로 에콰도르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일찍 고아가 된 그는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집 없이 지내며 고아 소녀들을 돌봤다.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에콰도르 아마존 정글로 들어가 원주민에게 선교했다. 당시 천연두가 퍼져 선교사들이 모두 정글을 떠났지만 몰리나 수녀만 홀로 남아 끝까지 원주민들을 돌보며 하느님 사랑을 실천했다.

 

스탠리 로더(1935~1981) 신부는 미국인으로 내전 중인 과테말라에서 사목하던 중 무장 괴한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사제품을 받은 그는 과테말라에 사제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테말라 선교를 자원했다. 그는 스페인어와 과테말라 원주민어 중 하나인 추투질(Tz’utujil)어를 배웠다. 그는 현지에서 가톨릭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고 학교와 병원 등을 지으며 원주민들 삶을 도왔다. 추투질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할 정도로 원주민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과테말라 공산주의자들 탄압에 미국으로 잠시 피신했지만, 고통받는 신자들을 버릴 수 없어 다시 과테말라로 돌아왔다. 그는 어느 날 밤 성당 사제관에 침입한 괴한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0월 20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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