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44: 신비로운 식별(묵시 1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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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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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4) 신비로운 식별(묵시 17,7-14)
짐승은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상징
- 1255~1260년경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트리니티 묵시록」 삽화 중 <큰 도성 바빌론의 여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요한 묵시록 17장 7절부터 우리의 시선은 대탕녀 바빌론이 아니라, 그녀가 앉아 있는 짐승으로 향한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그 짐승 앞에서 천사는 이것을 ‘신비’라 부른다. 그리스말 ‘신비’는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으로 ‘입을, 눈을 닫거나 감는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신비라는 말마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밀어내는 암흑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더 깊은 층위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부르는 하느님의 계시 방식이다.(로마 16,25-26 참조) 신비는 인식의 어둠이 아니라 깊이이며, 이성의 도피가 아니라 초대이다. 그러므로 짐승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
짐승은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다시 올라올 것”이라 소개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이미 명시되어 있다. 짐승은 멸망으로 방향 지어져 있다는 것. 요한 묵시록 13장에서 상처 입어 죽은 듯하였으나 다시 살아난 짐승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두려워하던 네로의 부활 전승이 이 서사에 스며 있겠지만, 성경은 특정 황제의 귀환보다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낸다.
짐승은 ‘그 옛날의 뱀’, 곧 세대마다 얼굴을 바꿔 나타나는 악의 원형이다. 그가 올라오는 자리가 죽은 자들의 심연, 곧 ‘아뷔소스(ἄβυσσος)’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악은 언제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지만, 마치 하늘의 것인 양 위장을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하나다. 짐승은 결국 무너진다. 악은 오래가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멸망 이전의 시간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 곧 “생명의 책”(묵시 17,8)에 이름이 없는 이들이 그 짐승을 보고 놀라워하며 경배한다. 악은 종종 추해서가 아니라, 찬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멸망할 줄 알면서도 끌려다니는 수많은 논리와 제도, 유행과 집착이 존재한다. 효율, 성과, 속도, 성공, 그 모든 것이 짐승의 빛나는 외피일 수 있다. 한 번의 클릭과 한 줄의 말이 마음을 흔드는 시대에, 짐승은 더 이상 붉은 괴물이 아니라, 합리와 관성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묵시록은 말한다. 이 상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하느님의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르는 식별력,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는 영적 민감함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자 일곱 임금이라 한다. 이는 고대 독자들에게 일곱 언덕의 도시, 로마를 즉시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동시에 “다섯은 이미 쓰러졌고 하나는 지금 살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묵시 17,10)는 표현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로 이어지는 제국의 연대를 상기시킨다. 여섯째는 요한 묵시록 시대의 로마이며, 마지막 일곱째는 그 제국의 연대가 다시 모습을 바꾼 짐승일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일곱 산의 소개는 역사적인 제국의 목록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악의 권력은 언제나 형태를 바꾸어 되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시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하느님 백성을 억압하는 힘의 구조는 본질상 같다.
열 뿔은 열 임금이다. 그들은 아직 왕권을 받지 않았으나 잠시 권세를 얻어 모두 짐승에게 바친다고 한다. 힘의 연합은 언제나 더 큰 힘을 섬기기 쉽다. 그것은 1세기 로마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은 여전히 짐승의 이름을 빌려 움직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이라 부르고, 그 현실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지혜’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응이지, 식별이 아니다.
묵시록이 보여주는 시선은 분명하다. 짐승의 마지막은 멸망이며, 어린양의 마지막은 승리다. 어린양은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이시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패배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초대교회는 황제의 권력과 부유함도, 죽음의 위협도, 세상의 논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도 초대교회가 살아낸 삶이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가.
따라서 짐승에 대한 이해는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짐승은 붉은 몸 대신 투자와 수익률, 조회수와 효율, 진영과 혐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성공과 성장의 언어가 은총과 회개의 언어를 밀어낸다. 믿음을 수치로 계산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이미 짐승의 문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무엇에 놀라고 있는가. 무엇을 멋지다고 여기며, 무엇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가.
짐승은 다시 올라오겠지만, 결국 사라진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경배가 어디를 향할지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할 일이다. 신비는 현실을 벗어나라는 부름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보라는 부름이다. 그 부름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맑아지기를, 세상이 아니라 어린양께 마음이 향하기를, 조용히 소망한다.
[가톨릭신문, 2025년 11월 16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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