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 일본의 천주교 순교 성지3: 순교터, 순교비, 순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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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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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주교 순교 성지 3] 순교터, 순교비, 순교공원
11. 히로시마 고이히가시 & 미하라시 시로마치
고이히가시(己斐東) 기리시탄 순교비히로시마시 니시구 고이히가시(西区 己斐東) 1-2-13, 노틀담 청심학원 입구・JR 니시히로시마역(西広島駅) 도보 6분
히로시마 지역은 일찌감치 1559년부터 그리스도교 포교가 시작되었지만,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으로 히로시마에서도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다. 1616년 히로시마의 순교자인 도밍고 호시노 가조(星野嘉蔵)가 십자가형으로 첫 순교를 한 후에도 박해가 계속되었고, 신원이 파악된 순교자만 22명에 이른다. 베드로 기베와 187인 순교복자 중에는 5명의 히로시마 순교자가 포함되어 있다. 매년 2월 11일에는 순교비 앞에서 ‘히로시마 기리시탄 순교 기년제(祈年祭)’와 도보순례 및 기념미사 등이 실시되고 있다.
미하라시(三原市) 시로마치
히로시마현 미하라시 시로마치(三原市城町) 2-14・JR 미하라역(三原駅) 도보 3분
일본 26 성인인 순교자 미겔 고자키(小崎)는 직업이 목수로 아들 토마스 고자키와 함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를 따라 교토에서 성당 건립을 돕다가 체포되어, 1597년 2월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순교했다. 함께 순교한 아들 토마스 고자키는 16세의 나이로 1월 엄동설한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950 킬로미터를 걸어서 이송되는 가운데, 이곳 히로시마 미하라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겼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십자가 형틀을 받으러 나가사키로 가고 있지만 아버지와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천국에서 곧 모두 만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 남겨진 두 동생이 이교도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든 힘을 다해 동생들을 지켜주세요.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전해주십시오.’
1993년 미하라 성당에서는 아버지 미겔과 아들 토마스의 동상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12. 나가사키 시마바라 순교터
나가사키 시마바라 반도 남부지역은 기리시탄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의 보호 아래, 1573년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가 아리마(有馬)와 구치노즈(口之津)를 일본 포교의 거점으로 삼고 주변 지역에 성당과 함께 수련원과 세미나리오를 세우는 등 일본선교의 중심에 위치했던 지역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영지를 이어 받은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와 그의 뒤를 이은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의 폭정 아래, 여러 차례 박해와 순교가 거듭되는데, 특히 세 곳의 순교터가 기록에 남아 있다.
아리마쵸(北有馬町/南有馬町) 아리마가와(有馬川) 순교터
나가사키현 미나미 시마바라 기타 아리마쵸(北有馬町)・나가사키 공항 또는 JR 나가사키역 버스, 미나미 시마바라시(南島原) 택시
1613년 10월 7일, 아리마 나오즈미는 자신의 기리시탄 가신에게 배교를 강요했지만 끝내 배교를 거부한 3명의 가신과 가족 5명(12살 소년 포함)을 8개의 십자가에 매달아 영주민 2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에 처했다. 이들의 유골은 신자들에 의해 나가사키로 운반되어 해외로 추방되는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반출했다가 1995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2008년 시복되었다. 아리마 지역에서는 그 후에도 마쓰쿠라 시게마사에 의한 무자비한 기리시탄 탄압이 계속된다. 1614년 11월 22일 17명의 신자가 철봉으로 모진 매질을 당하고 팔각 각목으로 양다리를 비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를 거부하자 참수형으로 처형했다. 박해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아리마 지역에서만 44명이 순교했다.
아리에(有家) 순교터
나가사키현 미나미 시마바라 아리에쵸(有家町) 1・나가사키 공항 또는 JR 나가사키역 버스, 미나미 시마바라시(南島原) 택시
마쓰쿠라 시게마사의 폭정 아래, 1614년 12월 시마바라 아리에(有家) 지역 신자 조직의 지도적 인물인 기도 한우에몬(城戸半右衛門)이 코와 손가락을 잘린 채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절명했다. 이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고, 1628년 5월 19일~31일에 걸쳐 아리에 지역의 신자 250명이 고문을 받고, 그중 50명이 절명했는데 순교자 대부분은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7일~21일에도 신자 207명이 고문을 받다가 신자 조직의 지도자 7명이 처형당했다. 미나미 다카기군 아리에쵸(南高木郡有家町)의 순교터에는 기념비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구치노즈(口之津) 순교터
나가사키현 미나미 시마바라 구치노즈쵸(口之津町)・나가사키 공항 또는 JR 나가사키역 버스, 미나미 시마바라시(南島原) 택시
구치노즈의 순교는 아리마와 같은 날, 1614년 11월 22일 16명을 시작으로 1615년까지 밝혀진 인원만 총 22명이 갖가지 형태의 모진 고문 끝에 참수형으로 순교하는데, 이를 ‘아리마와 구치노즈(有馬/口之津) 대순교’라고도 칭한다. 순교자 중에는 미겔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43세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와 나가사키에서 세례를 받고 구치노즈에 정착하여 살면서, 나병환자를 돌보는 등 신심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베드로라는 조선인은 종살이를 하면서 세례를 받고 스스로 신자임을 밝히고 출두해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당시 구치노즈 성당이 있었던 자리가 순교터로 추정되는데, 현재 구치노즈 항구에서 가까운 미나미 시마바라시 구치노즈쵸(南島原市 口之津町)가 그곳이다.
13. 야마구치 하기 & 가메야마
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県萩市)
야마구치현 하기시 호리우치(萩市堀内) 1-3・하기성터 시즈키공원(萩城跡 指月公園) 입구 도보 5분
도요토미의 가신으로 아키(安芸) 영주였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도쿠가와에 대항하다가 멸문의 위기에 처했으나, 야마구치 하기(萩)로 영지를 옮기면서 힘겹게 가문을 유지하게 된다. 이에 모리는 기리시탄 가신인 구마가이 모토나오(熊谷元直)와 구마가이의 사위였던 아마노모토노부(天野元信)에게 하기성 건설을 명한다. 하지만 공사가 지연되자 그 책임을 물어 엉뚱하게도 기리시탄인 두 사람을 엄벌에 처해 처형했다. 1605년 7월 구마가이에게 자결(切腹自殺)을 명하지만, 구마가이는 기리시탄으로서 자결을 거부하다가 결국 참형 당한다.
동시에 가족 전부가 기리시탄이었기에 그의 처자, 손자, 사위인 아마노까지 최소한 11명이 전원 처형된다. 하기 기리시탄 순교공원에는 순교복자로 시복된 구마가이와 아마노의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야마구치시(山口市) 맹인 비와법사(琵琶法師) 다미안의 순교터
야마구치시 가메야마쵸(山口市 亀山町) 4-1, 하비에르 기념성당・JR 야마구치역(山口駅) 도보 15분
일본의 초기 선교 역사에서 맹인 비와법사 다미안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다. 다미안은 1560년경 오사카 사카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방랑 중, 1586년 야마구치에서 예수회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1605년 야마구치 후시노가와(椹野川)에서 순교할 때까지 선교사들을 도와 포교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맹인 특유의 독특하고 예민한 감각과 어휘구사, 뛰어난 기억력으로 선교사를 대신해서 신자들에게 일본어로 교리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불교 승려들과의 종교논쟁에도 탁월했다. 심지어 악마를 몰아내고 성수로 병자를 치유했다는 기적도 전해지고 있다. 선교사가 없는 경우에도 규슈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초기 일본 그리스도교의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하기에서 구마가이가 처형된 4일 후 모리 데루모토의 명을 받은 형리들이 자신의 명을 어기고 신부를 대신해서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선교 활동을 하는 다미안을 체포하여 배교를 강요했지만, 배교를 거부한 다미안은 결국 참수 당한다.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져 강물에 버려졌다고 한다. 다행히 목과 한쪽 팔이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나가사키의 선교사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비와법사 다미안은 2008년 시복되었다.
14. 구마모토현의 순교터
구마모토시(熊本市) 하나오카야마(花岡山) 순교비
구마모토시 니시구 가스가(西区春日) 4・구마모토 전철 기온바시역(祗園橋 電停) 도보 40분, 또는 택시
구마모토시 하나오카 산의 중턱에 위치한 육군묘지 앞에는 1636년 1월, 젠조인(禅定院)에서 참수로 순교한 오가사와라 겐야(小笠原玄也) 일가족의 묘가 있다. 오가사와라와 부인(미야), 자녀, 그리고 주변 식솔을 합쳐 15명이 순교했다. 미야 부인은 오구라에서 순교한 디에고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隼人)의 딸이다. 가가야마 가족도 오구라(小倉), 히지(日出), 구마모토(熊本)의 세 군데에서 순교했다. 이러한 오가사와라 일가족의 묘가 기리시탄 순교자로 알려진 것은 1900년대 이후이며, 1978년 구마모토 교회에 의해 ‘하나오카야마 순교자기념비’(花岡山殉教者記念碑)가 건립되었고, 매년 4월에는 순교제(花岡山殉教祭)가 열리고 있다.
야츠시로시 후루시로 아동공원(古城児童公園) 기리시탄 순교비
야츠시로시 후루시로마치 무기시마 단지(古城町麦島団地)・JR 야츠시로역 버스 무기시마 단지, 도보 10분
지금은 주택지로 개발되어 공공주택단지가 들어선 한가운데에 후루시로 아동공원이 있는데, 이곳이 기리시탄 박해 시대에 무기시마(麦島) 처형장이 있던 곳으로, 야츠시로(八代) 지역의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로 추정된다. 현재, 공원 한구석에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아마쿠사시 아마쿠사 순교공원
아마쿠사시 후네노오마치(天草市 船之尾町)・아마쿠사 공항에서 택시 15분, 또는 혼도항(本渡港)에서 택시 5분
아마쿠사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언덕에 혼도 성터가 남아있고, 그 성터 자리에 순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평화상을 비롯하여, 일본 선교 초기에 왕성한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기반을 닦은 루이스 알메이다 신부의 기념비 및 도미오카(富岡)에서 순교한 아담 아라카와의 순교비와 함께 기리시탄의 묘지가 있다. 근처에는 시마바라 아마쿠사 농민 봉기의 전사자를 합사한 천인총(千人塚)도 찾아볼 수 있다.
아담 아라가와(荒川) 순교터
아마쿠사군 레이호쿠마치 도미오카(苓北町富岡) 도미오카 성터・아마쿠사 공항 택시 30분, 도미오카항 도보 5분
아담 아라가와(荒川)는 1552년 시마바라 아라가와에서 태어났다. 아라가와는 기리시탄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의 영지에 속하고 아리마의 히노에성에서 멀지 않은데, 이 지역의 유력자 집안으로 추정된다. 아담은 청년 시절 중죄로 처형을 당할 상황이었으나, 아리마의 예수회 신부 도움으로 처형을 면하고, 이후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성당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1600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교토에서 처형 당한 후, 새로 아마쿠사의 영주가 된 데라사와 히로다카(寺沢広高)는 도미오카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1614년 기리시탄 금교령이 내려지자, 선교사들의 추방과 신자 색출 등 박해를 시작했다. 이 당시 아라가와는 유아세례를 주고 병약자를 돌보는 교회의 중심적인 존재였다. 데라사와는 끈질기게 아라가와의 배교를 강요했지만 이미 60살이 넘은 아라가와는 배교를 거부하고, 벌거벗긴 채 조림돌림을 당하고, 9일 동안이나 나무 기둥에 매달리는 고문을 견뎌냈다. 그래도 배교를 거부한 아라가와는 60일간 유폐 당한 후, 1614년 6월 결국 도미오카에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면서 참수로 순교했다. 현재 순교터에는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15. 가나자와 우다쓰야마(卯辰山) 순교자 비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시 우다쓰야마(卯辰山) 공원・가나자와역(金沢駅) 버스 25분
마지막으로 시대가 다르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1867년 기리시탄 박해와 탄압으로 나가사키 우라가미(長崎浦上)의 기리시탄 516명이 가나자와로 유배되어, 그중 100여 명이 극심한 고문, 기아, 질병으로 사망했다. 가나자와 교회는 감옥터가 있던 우다쓰야마에 순교자비를 건립하고 순교자를 추모하고 있다. 가자나와는 일본교회의 복자 기리시탄 영주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끝)
보다 자세한 일본교회 역사 및 문화에 대해서는 필자의 인터넷 카페를 참조 바란다.
https://cafe.naver.com/nagasakidiary
[교회와 역사, 2025년 8월호,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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