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 일본의 천주교 순교 성지1: 동양의 작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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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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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주교 순교 성지 1] 동양의 작은 로마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1614년 1월, 일본 전국에 기리시탄 금교령을 포고했다. ‘그리스도교는 침략적 식민 정책의 첨병으로 인륜의 상도에 반하며 일본의 법질서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1600년대 전반 가혹한 기리시탄 박해와 탄압이 계속되었고 도처에서 수많은 순교 사건이 벌어졌다. 박해 시대 일본 교회의 3대 순교는 1619년 10월 6일 교토 쇼멘 가와라의 대순교(正面河原, 52명, 화형), 1622년 9월 10일 나가사키 니시자카겐나의 대순교(長崎西坂, 55명, 화형과 참수), 1623년 12월 4일 에도 후다노쓰지의 대순교(江戸札ノ辻, 50명, 화형)를 말한다. 하지만 일본교회의 순교 역사 속에는 3대 순교 이외에도 일본 전역에 걸쳐 많은 순교지가 확인되고 있다. 일본의 순교 성지에 관한 자세한 안내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을 감안하여 14곳을 간추려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필자 주
1. 나가사키(長崎) 니시자카(西坂) 일본 26 성인 및 겐나(元和) 대순교터
나가사키시 니시자카마치 7-8(長崎市西坂町7-8, JR 나가사키역[長崎]에서 도보 5분)
나가사키 니시자카는 일본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순교 성지다.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온 지 50년이 지난 1600년경 인구 약 3만 명 정도의 나가사키는 주민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로 ‘동양의 작은 로마’로 불렸다. 도심에는 최소 13개 성당이 세워졌고 신학원, 사제관, 병원 등 각종 교회 시설이 들어섰다. 그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이 세운 성 로렌소 성당도 있다. 하지만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는 기리시탄에 대한 경계심과 위기감에서 극악무도한 탄압과 박해를 강행했다. 특히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는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순교했는데, 일본 26 성인의 순교와 겐나의 대(大)순교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일본 26 성인의 순교는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에 의해 벌어진 순교 사건이다. 교토 지역에서 선교하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어린이를 포함한 남자 신자들을 체포하여, 왼쪽 귓볼을 잘라내고 시내를 조리돌림시킨 후, 엄동설한 오사카에서 나가사키까지 거의 1,000km의 거리를 한 달에 걸쳐 걸어서 이송해서 마지막 형장인 니시자카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26 성인은 처형 당일 도기츠(時津)라는 작은 포구에서 니시자카까지 마지막 10km 정도를 걷게 되는데 지금도 이 길은 순례 코스로 많은 신자들이 찾고 있다. 26인 순교자들은 1627년 시복(諡福), 1862년 시성(諡聖)되었고, 이들이 순교한 2월 5일은 일본교회의 대축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니시자카 언덕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일본 26 성인 자료관과 함께 기념성당이 세워져 있다.
겐나의 대순교에서는 1622년 9월 10일, 도쿠가와의 기리시탄 금교령과 박해로 인해 니시자카에서 선교사, 수도사,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신자 등 55명이 한꺼번에 순교했다. 악명 높은 오무라의 스즈다 감옥에서 니시자카까지 압송된 후, 20명은 화형으로, 35명은 참수로 처형당했다. 이들 중에는 조선인 신자도 포함되어 있는데, 현재 예수회 본부에 보관되어 있는 겐나 대순교도(圖) 오른쪽에는 상투를 튼 조선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순교자의 가족이거나, 아니면 형장의 형틀을 설치하고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자 55명은 1868년 전원 시복되었다.
2. 교토 가모가와(鴨川) 쇼멘 가와라(正面河原) 대순교터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가기야쵸(京都市東山区鍵屋町, 시치죠역[七条] 하차, 가모가와를 따라 도보 3분)
1614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기리시탄 금교령 이후 벌어진 겐나 3대 순교 사건 중, 그 첫 번째가 1619년 10월 6일, 교토 가모가와 쇼멘 가와라(현재의 쇼멘교 근처)의 미야코(都) 대순교이다. 형장에는 27개의 십자가가 세워졌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52명의 신자가 십자가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해졌다. 순교터에는 1994년 작은 비석이 세워졌고 순교비 아래에는 52송이의 빨간 장미꽃 리본이 묻혀 있다. 성지 개발이 활발한 한국의 순교 성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소박함이다.
이예야스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선교사의 해외 추방은 물론 전국 각지의 기리시탄 박해와 탄압를 본격화했다. 후시미(伏見) 등 교토 지역의 모든 성당을 불태워 파괴하고, 교토 치안과 감찰의 총책임자인 이타쿠라 가츠시게(京都所司代 板倉勝重)를 시켜, 1619년 1월부터 4월, 그리고 7월 신자들을 색출해서 투옥시켰는데, 이미 옥중에서 2살 어린이를 포함하여 8명이 순교하는 가혹한 환경이었다. 마침내 10월 6일, 배교를 거부하고 살아남은 52명의 신자를 9대의 마차에 태워 교토 시내를 온종일 조리돌림시킨 후, 쇼멘 가와라 처형장으로 끌고가 저녁 무렵 화형을 집행했다. 남자가 26명, 여자가 26명으로,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11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화형 집행은 십자가 하나에 여러 명을 묶고 매달아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는 세 아이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요한 하시모토 다효에(橋本太兵衛)의 부인과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형장을 지켜보고 주검을 수습한 디에고 유우키(結城) 예수회 신부가 남긴 순교 기록에 의하면, 가타리나 13세, 토마스 12세, 프란치스코 8세, 베드로 6세, 루이사 3세가 있었고, 여기에 더해 처형 당시 하시모토 부인의 태중에는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1622년 나가사키의 순교자들은 이른 시기에 시복,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지만, 교토의 순교자 52명은 자세한 순교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시복 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가, 2007년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승인을 받아, 2008년 베드로 기베(岐部)와 187인 순교자로 전원 시복되었으며, 일본교회는 7월 1일을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3. 도쿄(江戶) 시바구치 후다노쓰지(芝口札ノ辻) 대순교터
도교 미나토구 미타 3-7-8, 스미토모 미타(住友三田) 트윈빌딩 서관 북쪽 광장(東京都港区三田3-7-8, JR선 다마치역[田町] 도보 5분, 지하철 미타선 미타역[三田] 도보 3분)
1623년 12월 4일, 에도(江戶, 도쿄) 시바구치 후다노쓰지에서 예수회 안젤리스(Girolamo de Angelis) 신부, 프란치스코회 갈베스(P. Francisco Galvez) 신부, 엔보(遠甫) 수도사, 신자 하라 몬도(原主水) 등 50명이 순교했다. 사제와 수도사 3명은 1896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일본인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신자 중 유일하게 요한 하라 몬도만이 2008년 베드로 기베(岐部)와 187인 순교자에 포함되어 시복되었다.
에도시대 시바구치 후다노쓰지는 오사카와 나고야 방면에서 에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막부의 경고문이나 훈령(高札)이 내걸리는 중요한 장소였다. 에도 후다노쓰지 대순교에서도 50명의 순교자들은 조리돌림 당한 후, 에도시대 가장 중죄인에게 가해지는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또한 12월 2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순교자들의 가족과 순교자들을 숨겨준 신자들까지 화형과 참수로 처형당했고, 이후에도 후다노쓰지에서는 1624년(18명), 1630년(1명), 1632년(7명), 1639년(20명), 1640년(프란치스코회 사제 2명) 순교가 계속되었다. 순교터에는 지후쿠지(智福寺)라는 사찰이 세워졌다가 도시재개발로 사찰이 다른 장소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대형 오피스 빌딩이 들어섰고 순교터 근처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서울의 절두산 성지와 같은 중요한 순교지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한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전혀 성지로 개발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지후쿠지에는 1956년 가톨릭 신자가 세운 대순교 기념비(元和大殉教記念碑)가 있었는데, 현재 이 기념비는 근처에 있는 가톨릭 다카나와(高輪) 성당으로 이전되어 보관되고 있다.
일본인 신자 중에서 지도자격 인물인 요한 하라 몬도는, 1587년 치바현의 유력 무사 집안에 태어나 1600년 세례를 받은 후 도쿠가와 막부의 가신으로 산 인물이다. 1612년 막부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가신단 중 53명이 기리시탄인 것이 밝혀졌고, 그중에서 배교를 거부한 가신 14명이 투옥됐다. 중심인물인 하라 몬도는 모질게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거부하다가, 결국 얼굴에 불로 지진 십자 소인(十字焼印)이 새겨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린 채 추방당한다. 같은 시기 궁중에서는 조선에서 끌려온 오다 줄리아도 배교를 거부하다가 남쪽 섬으로 추방을 당했다. 하라 몬도는 에도 아사쿠사에 잠복해서 나병환자를 치료하면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신심활동 등 지도적 역할을 하다가 1623년 밀고로 다시 체포되었다. 악명 높은 덴마쵸(傳馬町) 감옥에 갇혀 있던 50명은 후다노쓰지 형장까지 끌려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조리돌림 당한 후, 1.5m 간격으로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에 처해져 순교했다.
4. 야먀가타현(山形) 요네자와(米沢) 혹쿠산바라(北山原) 순교터
야마카타현 요네자와시 가나이케 6-3(山形県米沢市金池 6-3, JR 요네자와역[米沢]에서 도보 40분, 택시 10분)
일본교회 역사의 겐나 3대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 순교터는 나가사키, 교토, 에도(도쿄)와 같은 큰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 지방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에서도 역사적인 순교 사건이 있었다. 바로 1629년 1월 12일에 있었던 혹쿠산바라(北山原) 순교다. 순교자 57명 중 53명이 2008년 베드로 기베(岐部)와 187인에 포함되어 시복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기리시탄 탄압이 전국적으로 가혹해지는 가운데 에도에서 먼 센다이를 비롯한 동북 지방의 여러 지역에서도 기리시탄 감시와 박해가 심해졌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요네자와 영주 우에스기 가게가쓰(上杉景勝)는 막부의 금교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영지 내에는 기리시탄이 없다고 거짓 보고하는 등 종교에 매우 관용적이었다. 이 때문에 근린 동북 지방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요네자와에 몰려와 거주하면서 신자 수가 1만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특히 아마카스 가게쓰구(甘粕景継) 집안은 이 지역 기리시탄의 중심적 존재였는데, 둘째 아들 루도비코 아마카스 우에몬(甘粕右衛門)은 성모회와 성체회 등 신자활동의 총책임을 짊어진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동료 가신은 물론 하급 무사들까지도 그를 따르는 신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에 관용적이었던 영주가 죽은 후 요네자와에서도 본격적인 기리시탄 박해가 시작되었고, 가신단 중 막부의 금교령을 엄중히 지킬 것을 주장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내부 분열과 대립이 심해졌다. 이를 발단으로 결국 기리시탄 가신과 신자들을 색출해서 배교를 강요했지만, 끝내 거부하는 신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1629년 1월 요네자와 혹쿠산바라와 요네자와에서 2km 떨어진 누카야마(糠山), 신토가다이(新藤台), 하나자와(花澤)에서 남자 30명, 여자 23명(5살 이하 9명 포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4명을 포함하여 57명이 순교했다. 신토가다이와 하나자와의 순교지는 현재까지도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요네자와 순교에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다른 순교지와 달리 모든 순교자가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고 조리돌림도 없었으며, 중죄인에게 처하는 화형이 아니라 참수로 처형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혹쿠산바라에서는 성인 남자들이 순교했는데 형리들은 물론 구경꾼들까지도 오로지 믿음 때문에 순교한 이들에 대한 예우를 갖춰 모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누카야마와 신토가다이에서는 주로 가족(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참수당했다. 실제 순교자는 57명인데 로마에 보내진 보고서에는 신원이 파악된 53명만이 기재되었고, 그들 모두 시복되었다. (계속)
[교회와 역사, 2025년 4월호,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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