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콘산책33-35: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수님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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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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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3)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수님의 세례
둘로 갈라진 큰 바위 사이로 생명의 물이 흐른다
- (작품 1) 예수님의 세례: 템페라 (14세기, 오흐리드, 클레멘스 교회의 이콘 미술관 작품의 모작), 63 x 50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1. 기원(起源)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초대 교회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는 빛이 드러나심(Epiphaneia)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이 드러나심(Theophaneia)입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349-407)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탄생 때보다는 세례를 통해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이콘에서 제일 위쪽에 어두운 반원형의 성부와 빛나는 검은 원형의 성령과 중심에 세례를 받고 계신 성자로서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를 드러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통해 많은 사람 앞에서 공적의 인정을 받으시며 그분의 인성과 신성이 드러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공생활의 출발점으로 삼아 빛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작품 1)
2. 민족들의 빛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면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선택하신 분을 빛으로 세워 말씀하십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이사 8,23─9,1)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이사 42,6)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눈먼 이들을 그들이 모르는 길에서 이끌고 그들이 모르는 행로에서 걷게 하며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리라. 이것들이 내가 할 일. 나는 그 일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이사 42,16)라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신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고 요한복음은 그분이 빛이심을 처음부터 전합니다.(요한 1,5; 1,9)
이스라엘 백성이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탈출 13,21 참조) 인도받아 바다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새로 태어난, 새 삶의 과정으로 세례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빛 안으로 들어가는 새 삶이라고 말합니다. 세례받는 사람들은 새 삶에 대한 기쁨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에 빛납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라는 구절과도 연관됩니다.
세례 이콘이 강조하는 것은, 그분은 말씀이지만 인간으로 낮추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회개와 함께 죄 사함의 과정이지만, 그분은 본인 스스로 죄와는 무관하실지라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씻으려는 의지와 행동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시겠다는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다만 빛의 축일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정신과 영성을 이끄는 신학적 의미가 더 크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작품 2) 예수님의 세례: 템페라 24 x 19,5cm, 1500년경, 노브고로드 박물관, 노브고로드, 러시아
3. 구성(構成)과 상황
세례 이콘은 수백 년 지나는 동안 성경을 바탕으로 전례에 따라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더 강조하거나 추가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가장 전형적 형태는 커다란 바위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골짜기 사이로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여러 인물·강·나무 등이 등장합니다.
가운데에 옷을 벗은 예수님이 요르단강 안에 서 계시고 요한 세례자의 손이 머리에 얹혀 있는 형태의 이콘은 여러 의미를 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 세례자가 성령을 바라보고 있는 구성입니다.(요한 1,34 참조) 당시에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받으러 오는 많은 사람 앞에 성령께서 오심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성령으로 충만하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연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이사 35,1-2)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이사 35,1-2.8)
자연은 거칠고 바위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부분으로 크게 갈라져 있습니다. 이 갈라진 형태는 인간의 깊은 죄의 결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상징합니다. 이 구렁텅이는 너무나 커서 간격을 좁힐 수 없었고 영원히 합쳐질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무너진 빈자리를 메워 다시 연결할 수 있는 누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느님’만이 해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무너진 골을 메우시고, 사람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이것은 그가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하느님이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바위산은 네 개의 산봉우리를 이루며 조화롭게 윗부분의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 시각적 구성은 많은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신비를 증언한 네 복음이 이콘에서는 네 개의 봉우리로 상징화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안으로 구부러진 정상은 네 번째 복음서를 상징합니다.(요한 복음서) 그것은 다른 복음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면들을 우선하여 설명한 데 비해 어떤 일·사실·사건 등을 통해 숨겨져 있는 영성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기록함으로써,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오신 그리스도를 드러나 보이려 합니다.(작품 2)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골짜기에는 생명을 주는 원천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삭막한 사막과 같은 그곳에 생명의 물이 흘러 꽃을 피우고 나무가 자라서 맛있는 과일들이 열리고, 아름다운 새와 곤충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에덴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이는 네 복음을 통해 무한한 생명을 주는 생명수가 흘러나옴을 상징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며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중략)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하며 본인은 길을 닦는 사람의 역할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리려 했습니다.(요한 1,29-34)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1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4)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수님의 세례
골짜기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은 생명수이자 말씀
- (작품 1) 빛이 드러나심: 템페라, 18세기, 리보르노, 이탈리아.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으로 강물을 축복하시고, 요한 세례자는 손을 예수님 머리에 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당신과 비슷한 생명체를 만들고 그를 사람(아담)이라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은 나체였고 죄 없는 순수한 몸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이 벌거벗은 줄 몰랐다가 죄를 지은 후에야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끄러움 때문에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낙원에서 내치십니다.(창세 3,21-22참조)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복된 사람이었다가 그분의 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하느님의 영을 되찾아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인류를 구속(救贖)해 주시기로 하십니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사람은 먼저 새로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요한 3,1-5참조)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밤중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것으로 보아 바리사이파 사람들 몰래 왔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등을 눈여겨봤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이콘 가운데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분은 옷을 벗고 있는데, 이는 죄의 가죽옷을 벗는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새로이 나야 하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아담과 유사성을 띠어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한 모습대로 사람’(창세 1,26)을 만들기 원하시고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몸으로 인성을 취하셨으며, 낙원에서 내칠 때 만들어준 가죽옷을 벗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첫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선택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분도 인간이었기에 모든 약점과 감정이 있었습니다.(루카 22,42; 요한 11,35,38) 죄가 없는 그분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배려하신 구원 계획에 동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배려하신 구원 계획과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그의 두 발은 ‘가다’(去)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 계획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유 의지’로 요한에게 가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오른손입니다. 그는 물을 축복합니다. 축복받은 물은 이제부터 생명수가 된 것입니다.(에제 47,1-9) 손가락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검지와 장지는 예수님의 인성과 천주성을, 약지와 새끼손가락과 엄지를 구부려 합하여 삼위일체이심을 표현합니다.
그는 세례를 통해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심으로써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승리해 나오는 기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자(略字) ‘IC XC’로 표현되어 있고 성령께서 그분 위에 강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후광(Nimbus) 안의 글자는 그리스 문자로서 ‘있는 나’라는 뜻으로, 이것은 탈출기에서 연유되었습니다. 모세가 “제가 당신께서는 누구시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여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셨고,(탈출 3,14 참조) ‘있는 나’는 하느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작품 1)
- (작품 2) 예수님의 세례: 모자이크, 5세기 말, 아리안 세례 성당, 라벤나. 이탈리아. 요르단 강을 의인화한 노인이 놀라 뒤편에 있는 병에서 물을 쏟아내고 있다.
요르단 강과 바다
요르단 강물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항아리를 들어 물을 쏟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요르단 강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는 물러서며 물을 쏟아내는데, 그 물은 생명의 물과 비교해 아주 적은 양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물은 사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상징합니다.
이에 관한 축일의 노래 중에 “바다야, 어찌 도망치느냐? 요르단아, 어찌 뒤로 돌아서느냐?”(시편 114,5)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찬미가는 “강이 대답하기를 나는 태워 버리듯 강한 물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물러서서 특별한 뜻을 따르려 하는 분을 보고, 떨고 있다. 나는 아직도 순수한 분을 씻고 닦는데 익숙지 못하고, 죄 없는 분을 닦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다만 항아리의 지저분한 것을 쏟아버리는 것만 알고 있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물은 요르단 강이지만, 큰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말씀)은 동시에 바다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시간 사막에서 방랑한 것은 속죄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끝난 후 그들은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건너야 했던 홍해는 세례의 전조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요르단 강의 물 안에 동물이 있는데, 이것은 “너는 사자와 독사 위를 거닐고, 힘센 사자와 용을 짓밟으리라”(시편 91,13)를 연상케 합니다. 당시 주변 국가들의 토속적 신과 이방인 문화가 이미 퍼져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물에는 나름대로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이콘에서는 그들이 숭배하는 뱀이나 용들을 짓밟아 그들보다 위대한 분임을 은연중 나타내려는 듯합니다. 이 이콘에는 무늬가 있는 덮개를 쓰고 붉은 천이 있는 큰 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작품 1,2)
나무
왼편의 요한 세례자 아래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도끼가 걸려 있는데, 이를 ‘요한의 도끼’라 합니다. 그 나무는 작아서 아직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경고가 따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그러나 회개를 한다면 잘려나간 가지도 회생시킬 기회가 주어지고, 하느님의 사랑이 보일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로마 11,17-24)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이사 6,13) 여기서 그루터기는 새로운 삶을 싹 틔울 나무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 그 새싹은 만인이 쳐다볼 깃발이 될 것을(이사 11,10)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라버릴지라도 새싹이 나올 그루터기만을 남기는 사랑을 보이십니다.
이곳의 나무는 이미 잘리고 새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으로 자라난 나무를 말합니다. 앞서 성탄의 이콘에서 요셉 뒤에 있는 나무는 이사이의 나무였는데, 그때는 작은 나무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생명의 나무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시작 단계이므로 이 나무는 아직 작은데다 열매를 맺지 않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두 가지로 자라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으로 오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미리 안 것 때문일까? 교활해서일까?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모습을 보고 요한 세례자는 경고합니다.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바리사이나 사두가이 사람들, 경우에 따라 율법학자들이 당시 위선자의 표본으로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이 꼭 위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행실이 위선적인 모든 사람을 대신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를 칭찬하시는 예도 있고(마르 12, 34), 요한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는 유다인으로 대부분 대신하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8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5)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수님의 세례
요한 세례자의 고백 “그분은 더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작품 1) 성 요한 세례자: 97.5 x 66cm, 템페라, 크레타, 17세기, 아테네 비잔틴 미술관. “보십시오. 말씀이신 하느님, 헤롯은 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저를 처벌하였습니다”라는 글이 쓰여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분수(分數), 요한 세례자
독일 유학 시절,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의사 진단으로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라는 건선이 생겼습니다. 피부병이 일 년에 몇 번씩 온몸을 빈틈없이 휩쓸고 지날 때는 보리 까끄라기 더미를 이불 삼아 자는 것 같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 어려움이 겹치는지, 하느님께서 나의 처지를 알아주셨으면 하고 원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왜 그리 낯선지, ‘나’를 넣어 한 폭의 풍경화를 내가 그린다면 주님과는 달리 내 마음에 들 그림을 그렸을 터인데⋯. 당시 내 바람과는 다르게 내 모습을 그리셨지만, 내게는 낯설어도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나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옹기가 옹기장이더러 ‘왜 나를 이렇게 작게 만들었느냐?’고 투정을 한다고 해서 그 소원대로 맞춰주다 보면, 그릇들은 모두 커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릇은 각자 모양이나 크기대로 쓸모가 있어서 음식을 담다 보면 골라 쓰기 마련입니다. 간장은 간장 종지에 담겨야 쓰기에 편하고 어울리는 것처럼, 모든 그릇은 각자 정해진 대로 쓰일 것입니다.
그릇조차 쓰임새에 맞춰 빚어졌는데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느냐?”(이사 29,16)하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어찌 감히 우리가 탓하랴! 나는 요한 세례자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말한 것에서 그의 겸손을 느낍니다.
마태오 복음서(마태 3,1-6 참조)에 의하면 요한 세례자는 유다의 광야에 살며 낙타 털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온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가로 와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며 주님께서 오시게 된다는 것을 알렸으며,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오시기로 된 주님을 성령을 통해 알아보고 그분이 주님이라고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 3,1)하고 하느님께서는 길을 닦을 사람을 미리 보내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사제와 레위인들을 보내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본인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찾아가자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오?”하면서 그분의 세례를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4-15)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예수님 머리 위에 비둘기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 후부터 요한 세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콘에서 요한 세례자의 왼손은 하늘 쪽으로 향하고, 성령을 보았다는 표시를 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3-34)라고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요한 세례자의 모습을 날개 달린 천사로 표현한 이콘이 있습니다. 그의 삶이 거룩해서 천사 같은 삶을 살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앞서 오기로 한 사자(使者, 보내진 사람)란 내용에 따라 요한 세례자에게 날개를 그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임을 나타냅니다.(작품 1)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스스로 부끄러워 숨어있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그와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십니다.(창세 3,21) 이처럼 요한 세례자는 낙타 털가죽으로 만든 옷에 가죽끈을 둘러매어(마태 3,1-6) 죄지은 이후의 아담을 상징하려 했습니다. 낙타 가죽옷은 광야에서 필요하나, 일반적인 옷은 아닙니다. 즉 가죽옷 입은 아담처럼 스스로 죄인으로서의 고행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누구라고들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어떤 이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이는 예언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씀드립니다.(마태 16,13-16)
요한 세례자는 스스로 훌륭하게 요약해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 들은 증인들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고 고백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본인의 역할이 직접 ‘말씀에서 빛’으로 오신 분을 알리는 하느님의 사자(使者)임을 알고 행동한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갈수록 작아져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그의 자리는 새로운 아담, 즉 이제 막 옷을 벗은 아담, 가죽옷에서 해방된 사람, 하느님의 아들인 그에게 내주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섭리를 알고 분수(分數)를 아는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 (작품 2) 잠 못 이루시는 하느님: 70 x 65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시편; 121,4)라는 내용이다. 소년 예수님으로 표현한 하느님 뒤에는 생명의 나무가 서 있다. 옆에 성모님께서 청원의 기도를 드리고 있고, 미카엘 천사는 수난의 도구를 들고 있다.
천사
천사들은 예수님 탄생 때처럼 여기서는 그들의 주인이며 인간으로 낮추어 오신 주님을 흠숭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들고 있는 수건은 흠숭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세 천사를 등장시킴으로써 참나무가 있던 마므레의 아브라함에 발현했던 세 천사를, 네 분의 천사는 네 복음에서 나오는 말씀을 흠숭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등장은 죄 있는 인간을 대표로 하는 요한 세례자와 그에게 가는 그리스도의 위치를 들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 의해 만들어진 험악한 벼랑과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 사람과 하느님 간의 가교를 만들었음을 강조합니다. (작품 2)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15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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