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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산책30-32: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주님 성탄

109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8-13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0)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주님 성탄


성자께서 인간으로 오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 (작품 1) 주님 성탄: 16세기 초 베네치아 미술관 작품, 모작. 69 x 58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성탄 (구원의 서막)

 

시작이 없으신 당신께서는

시간의 강물을 흐르게 하시고

순리의 배를 띄우셨습니다.

 

수많은 별의 자리를 밤하늘에 잡아 주시고

온갖 만물을 당신 마음에 흡족게 만드신 하느님.

그러나

언젠가 시간의 끝 속으로 그 모든 것 사라지게 두실지라도

우리만은 잊지 못하고 사랑하시는 주님,

스스로 당신이 지으신 시간 속을

걸어오시면서 부서진 마음을

낫게 하시고,

외진 이를 인도하시며(시편 146,7)

당신 모상을 외면치 않으시나이다.

 

받으실 고통도, 그 높으신 이름도

접어 두시고,

더 크신 사랑 때문에 이곳에 오시니

감사드릴 뿐이옵니다.

거룩하신 그 이름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1. 기원

 

313년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탄생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그리스도의 탄생은 중요한 쟁점이 되었습니다.

 

동방에서는 유다의 달력인 니산 달로 계산해 성모님께서 4월에 천사의 알림을 받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님은 그로부터 9개월 후 1월 5일 밤에 탄생하셨다고 했습니다. 한편 주님 탄생 예고를 3월 25일1)로 계산한다면 1월 1일에 해당한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처럼 의견이 분분해 주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탄생보다는 세례 때의 ‘사랑하는 아들’(마태 3,17), ‘내가 낳은 아들’(시편 2,7)에 관심을 두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12월 25일은 이미 태양신 미트라(헬리오스)의 축일이었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미트라의 신앙은 점차 약화되었고, 미트라의 빛의 의미가 어둠으로부터 하느님의 빛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와 연관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로마력으로 354년부터 12월 25일을 ‘주님 성탄’ 축일로 정하고 장려하였습니다. 동방 교회는 오늘날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또는 동방박사의 방문으로 축일을 지냅니다.

 

 

2. 구성과 상황

 

성탄에 관한 이콘들은 구원을 위한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그것은 드높은 산 정상에서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장관을 내려다보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비밀에 싸여있는 구원의 역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갈래 금이 간 거울을 들여다보듯, 어설픈 대로 한눈에 비밀의 정원을 훔쳐보는 듯한 흥분을 자아냅니다.

 

구약을 읽다 보면 많은 부분에서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흐름이 ‘구원의 계획과 구원의 준비와 구원이 곧 도래하리라, 그것도 하느님께서 몸소 오시리라’라는 구세사로 모입니다. 산골짜기 작은 물줄기들이 낮은 곳으로 흘러 한줄기로 합쳐져 강을 이룬 뒤,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리라는 것을 예측게 합니다.

 

오늘날까지 지켜져 내려오는 주님 성탄 이콘의 기본 무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틀을 갖췄으며 점차 확정된 것입니다. 즉 산을 중심으로 동굴·구유·별 등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성모 마리아·요셉·천사·짐승·목동·동방박사·산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이어 내려오면서 그리스도교의 전파 지역에 따라 주요 인물들의 위치는 다를지언정 주된 구성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의 영성 사상과 외경, 성전(聖傳)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악기와 변주로 아름답게 꾸미는 음악에 비유할 만합니다.

 

구세사를 서사시로 꾸민다면 주님 성탄은 서막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부분만을 요약해 어떻게 하느님께서 무대에 올리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성탄 이콘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요약하여 표현한 가장 기본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큰 틀은 ‘성자께서 인간으로 오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돌아가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를 뼈대로 구성하고 영성의 색깔을 입혀 드러냅니다. 이러한 서막은 하늘과 땅이 연출하는 드라마를 통해 각 부분마다 어떤 의미를 관객에게 전합니다.(작품 1)

 

 

산, 천사, 목동

 

산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 제일 높은 곳은 산입니다.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이자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위에 등장하시며, 산은 하느님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가시어 기도하셨다는 것은 실제로 산으로 가셨을 것이지만, 상징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 성탄 이콘에서 산은 마치 높고 커다란 바위 모양으로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2-5)

 

또는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9) 그리고 생각만 하여도 즐겁고 풍성함을 느끼는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이사 25,6-9)라고 노래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주님의 빛나는 산은 모든 산과 인간과 천사들 위에 솟아오릅니다.

 

그 산은 메시아의 산으로 명백히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산을 둘로 갈라 그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상으로 오신 인성과 하느님으로서의 신성을 표현합니다. 중앙 부분의 반원형 천체는 이 세상 저 너머를 향해 열리고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고 하면서 하늘과 땅을 향해 노래하는 천사를 등장시킵니다. 그들의 표정은 이 커다란 사실에 기쁨과 흠숭을 드리면서, 그중 일부는 이 사실을 알리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주 1) 밤과 낮이 같은 날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날 6일을 합한 날이 3월 25일이 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8월 11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1)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주님 성탄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 (작품 1) 착한 목자 : 프레스코, 270년경, 코에메테리움마이우스, 무덤 천장화 일부, 로마, 이탈리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방의 들판에서 밤을 새워가며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루카 2,8-10)

 

목자들? 왜 목자들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모든 고관대작을 제치고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목자, 또는 목동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까?

 

여기서 목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밤을 새워가며 양을 지키는 그들은 새벽이 오기를 누구보다도 기다립니다.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하는 그들의 처지에서는,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어둠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족도, 또 수천 년 동안 구세주를 기다리며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예언자들 모습도 연상됩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 ‘주님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에게 오시는 빛, 밝은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물가로 양들을 이끌어 마른 목을 축이게 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들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착한 목자의 전조처럼 보입니다.(이사 40,11; 요한 10,11-16)(작품 1)

 

그들에겐 이 복음을 알려야 할 의무도 주어집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합니다.(루카 2,17) 이들에게 주어진 의무에서 훗날 사도들의 모습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작품 2)

 

천사들은 목동들을 진정시키면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알아볼 수 있는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실제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눕히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구유에 눕힌 것은 ‘표징’의 의미로서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 이콘에는 피리를 부는 목동과 짖어대는 개를 등장시켜 이 기쁜 소식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는 하늘의 노래와 지상의 기쁨을 대치시키는 모습입니다.

 

 

- (작품 2) 사도들을 보내심 : 템페라, 76,5 x 51cm, 1600년경, 레클링하우젠 이콘 박물관, 독일. 예수님께서 제자를 보내시는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의 약간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이 보인다.

 

 

- (작품 3) 라자로를 살리심: 템페라, 24 x 19cm, 15~16세기 초, 노브고로드 박물관, 러시아.

 

 

동굴 · 성모 · 아기 · 동물

 

이콘의 중앙에 있는 산에는 열린 동굴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는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었다.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다’(루카 2,7 참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이 없어 구유에 눕힌다는 것은 절박한 상황임을 드러냅니다. 근처에 아무도 살지 않는, 즉 목동들이 양을 치는 외진 곳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관 밖에 자리한, 여행객들이 타고 온 말들을 관리하는 외양간일 수도 있고, 투숙객이 가축 냄새를 피할 수 있도록 한 외진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동굴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콘에서는 사실적 표현보다는 관계된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아마도 이 이콘에서는 외양간을 동굴로 상징화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콘에서 성모 마리아는 동굴 밖에 등장합니다. 몸을 반쯤 구부린 채 피곤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성모님은 아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 쪽으로 향해있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급박한 상황에서 임신한 몸으로 겪은 힘든 여정, 목동들의 천사 목격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천사의 알림 등을 떠올리는 듯합니다.

 

또 아드님의 초라한 탄생의 의미, 무언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요셉의 표정 등 많은 것을 생각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 관한 생각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본인에게 다가왔던 하느님의 섭리와 주변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습에서 기쁨만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인간적인 고뇌, 슬픔 등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산 중간 아기 예수 곁에 있습니다. 산은 앞서 말한 대로 하느님을 의미하기에, 아기 예수와 가장 가까운 분임을 드러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까이 그릴 수는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가까우신 분’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의 눈은 하느님의 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자색 겉옷(마포리온)의 머리와 양어깨에서는 상징적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완전한 은총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으로서 탄생 이전이나 임신 기간이나 탄생 이후에도 영혼 안에서, 육체에서도 영원한 동정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낳으신 분은 하느님이셨기에 그 본성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찬양하였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염할 때에는 먼저 온 몸을 깨끗이 씻기고 얼굴을 곱게 다듬은 뒤 정갈한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옷과 주변 매무새를 잘 정리하고 탄탄하게 묶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정녀와 동굴 입구 사이의 아기를 보면 흡사 시신을 묶듯 포대기로 차곡차곡 감아서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이 표징이라는 말을 전합니다.(루카 2,12)

 

금방 태어난 아기를 구유에 눕힌 것이 어째서 ‘누구인지 또는 무슨’ 표징이 될까? 현실은 마땅히 쉴 만한 방이 없어서 구유에 눕혔을 터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하신 의도가 함께하심을 알게 됩니다. 구유는 ㅡ ‘돌아가심을 그리고 동굴 밖에 내어놓으므로 부활하심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ㅡ 시신을 담는 관(棺)을 의미합니다. 죽은 사람처럼 천으로 십자형으로 또는 엮듯이 감아놓은 모습은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요한 11,34-44)의 모습과 같습니다.(작품 3)

 

동굴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교부들의 찬미 노래와 복음서 일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 성 요한은 복음을 인용하여 “동정녀에 의해서 영광의 왕이 나셨습니다. 그는 자주색 옷을 두르시고 억눌린 자를 찾아보시며 어둠 속에 갇혀있던 그들의 해방을 알리십니다”(루카 4,18-19 참조)라고 하였고, 예루살렘의 키릴(315-387)1)은 “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고 그의 몸은 죽음이라는 용을 유혹해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쓰였습니다. 그 용은 그를 삼키러 나왔으며 삼켰다고 자만했지만, 다시 토해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동굴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동굴은 아기를 삼키려고 열려있는 괴물의 아가리이며, 죽음이고, 무덤 속입니다. 

 

각주 1) 예루살렘의 주교, 성 키릴루스 또는 치릴로. 이단을 단호히 배척하고 성삼교리 확립에 대한 공헌과 성체성사에 참된 현존을 명확히 가르침.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8월 18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2)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주님 성탄


천사가 나타나 의심을 풀어주었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았다

 

 

 

- (작품 1)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 22 x 15cm, 템페라, (12세기 채색 삽화, 바바리아 도서관, 뮌헨, 독일) 수사본을 이콘화한 작품. 이콘 마오로, 안성, 한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에 익은 자색 옷에 긴 포목 형태의 청색 겉옷을 두르시고 등장합니다. 청색은 하느님의 색깔입니다. 물·청결·고요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육화’, 다른 말로는 청색을 겉에 입으심으로써 ‘밖으로 드러나신 하느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콘에서 자주색 옷에 청색 겉옷은 예수님만, 청색 옷에 자주색 겉옷은 성모님만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흔히 동굴 안에 소와 나귀가 그려지는데, 어둠 속에서 동굴 밖 아기 예수님을 향하여 공경하는 이 짐승들은 다른 나라 민족(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 1,3)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방인인 동방 박사의 경배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이스라엘 백성보다 이방인들에게서 강한 믿음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10-13; 마르 7,24-30 참조)

 

 

요셉

 

요셉은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는데, 무엇인가 생각하고 고민에 차있는 듯합니다. 그 앞에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털옷을 입은 노인이 무언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콘에 따라 여러 형태로 등장합니다. 즉 성모님의 동정성을 요셉이 의심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사탄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상징합니다. 또는 천사로부터 듣고 본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는 양치기라든지, 계획된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알리기 위해 이사야 예언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해당 성경 구절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로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천사가 꿈에 그 의심을 풀어줘 그는 천사가 시킨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마태 1,18-25)(작품 1)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갈등없이 완전히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는 요셉만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신앙인이 믿음 안에서 해결해야할 모서리 돌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우리 인간으로서 의심·고민·갈등하는 삶을 드러내는 각본으로 꾸며집니다.

 

요셉의 뒤에 있는 작은 나무는 이사이의 나무로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 1-2)라는 구절에서 나온 나무인 다윗 가문의 자손을 상징합니다.(작품 2)

 

아기를 비추는 세 줄기의 빛은 삼위일체를 나타냅니다. 성자는 살아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그분을 통해 그 안에 계신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요한 8,19; 10,30 참조) 요한 사도는 복음에서 그분이 아버지임을 알고, 아버지에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 (작품 2) 이사이의 나무, 성탄 이콘의 한 부분



- (작품 3) 동방박사를 깨우는 천사: 프랑스 오툉의 성 라자로 대성당 기둥머리 조각을 이콘화한 작품, 15x 22.5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 (작품 4) 성탄: 15 x 15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아기를 씻김과 산파

 

왜 주님 성탄 이콘에서 아기를 씻기는 장면이 나올까요? 우선 아기를 씻기는 의식은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으로, 구원으로 가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즉 구원의 순서로서 깨끗이 하려면 씻어야 한다는 것, 물로 씻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 이를 통해 영혼을 씻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외경에 의하면(야고보 원복음) 여기에 나오는 여인은 살로메라는 산파입니다. 그녀는 아기가 성령에 의해 동정녀에 잉태되었고, 구세주로 오시게 되었다는 요셉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그 여인이 손으로 임신부를 만지자마자 손이 불에 덴 듯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믿지 못한 잘못을 빌며 울면서 애원하였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아기에 손을 대어라’라고 하자 아기 예수님에게 손을 대었고 다시 낫게 되었다는 여인입니다.

 

못 미더워 웃는 살로메는 그 당시 요셉이 산후조리를 위해 필요로 했던 산파로서, 여기서는 믿지 못했던 하와(Eva)를 상징합니다. 아기를 씻기며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하와로 인한 원죄에서 벗어나게 됨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하와의 교만에 의한 불복종으로 죽음이 왔지만, 동정 마리아를 통해 구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씻기는 의식은 순수한 인간적 행동을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그것으로 세례의 전조를 보여 줍니다.

 

 

별, 동방박사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중략)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1-3)

 

공중에 나는 천사는 별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별에 빛을 주는 원천적인 빛이 오신다며, 우리에게 오실 메시아를 환상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별을 따라 새로 태어난 왕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라고 놀라운 소식을 헤로데 왕에게 물었습니다. 동방박사는 하느님의 계약에서 제외되었던 사람, 구세주를 찾는 이방인들을 대표합니다.(작품 3)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민수 24,17), 그 별을 따라가야 하지만, 유다인은 그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보았던 그 길로 따라가야 아버지를 뵐 수가 있을 것입니다.(요한 14,6 참조) 그들이 보기를 원하고 기다리던 메시아, 인간의 눈으로도 볼 수 있었던 하느님을(요한 14,9-10 참조) 이스라엘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립니다. 황금은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고, 유향은 하느님께 특별히 올렸던 신성을, 몰약은 인성을 드러냅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구세주의 모습은 다분히 오늘날 기쁨만이 아닌, 깊은 묵상 거리이기도 합니다. 먼저 삭막한 성탄의 모습은 당시 광야를 연상케 해주며, 그때 육신적으로 굶주린 이스라엘을 위해 광야에 내렸던 만나처럼(탈출 16,31 참조) 이제는 우리에게 오신 살아 계신 빵(요한 6,35.48 참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숙소를 찾아 헤매야 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산모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방을 내주지 않았던 인색함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 것은(루카 10,36-37 참조) 마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이사 29,13)”라는 이사야 예언처럼 훗날 메시아를 버리는 이스라엘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작품 4)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은 그분의 백성은 유다 나라였지만, 오늘날 그분의 백성은 누구일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8월 25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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