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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모임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소개

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5-04-08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소개 (1)

 

 

“특히 젊은 대학생들의 신앙이 생각만큼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가톨릭 학생들은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하기야 초등학교 5학년 전후해서 배운 첫영성체 교리가 지식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다. 그렇게 대학생이 될 때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 냉담자(요즘은 ‘쉬는 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이다. 무늬만 가톨릭 신자이지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에 반해 개신교 학생들은 열성적이고 아는 것도 많다.”(「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10-11쪽) 

 

‘무늬만 가톨릭 신자이지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치부를 들킨 것 같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생기 없는 얼굴로 답답한 듯 무료한 듯 주일미사 시간을 때우는 신자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다가 입시와 취업의 압박에 잠깐 절박해지기도 하지만, 길거리의 타로점이나 혼기를 앞둔 연인들의 사주보다 호감을 받지 못해서 퀴퀴한 냄새나는 헌옷처럼 구석으로 내팽개쳐지고 마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은 시간이 흘러도 자라지 못하고,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썩은 물처럼 악취를 풍겨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도움도 기쁨도 되지 않는 신앙을 위해 그 오랜 시간 신학 공부를 하고 사목을 해왔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부끄럽고 허탈합니다. 그것이 지난 30년의 제 생활이었고, 짧다면 짧은 8년간의 교단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라는 책을 보면, 어린 왕자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른들은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고 연봉이 얼마며 얼마나 큰 집에 살고 어떤 차를 굴리는지 묻는다는 겁니다. 가진 재산이나 직업이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인격의 깊이를 나타내준다고 보시나요? 그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 하고 소리친다.”(「어린 왕자」중에서) 

 

이제 저는 ‘어린 왕자’식(式)으로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것은 이 단체(앞으로는 ‘공동체’라 부르겠습니다)가 숫자화하기에 빈약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가톨릭교회에는 없다는 청년들이, 그것도 무려 연간 3천 명 정도가 청년성서모임 연수에 다녀옵니다. 서울대교구에만도 100여개 본당에서 그룹공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수도권에만 50군데가 넘습니다. 한국 십여 개의 교구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청년들에 의해 운영되는 ‘성경공부’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고요. 그런데 이런 외적인 모습은, 이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비교한다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 저 역시 워낙 어른들의 설명 방식에 길들여진 탓에 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제가 아끼는 이 공동체를 최대한 잘 표현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어린 왕자’식을 견지하려 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9,16-18)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무로 한다는 거야. 아니면, 직무로 한다는 거야?’ 이 공동체에 온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미사를 드리면서 이 구절을 독서로 듣는 순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금 복음 선포를 자신의 의무이자, 원의(願意)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였구나! 마치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이나 사명과도 같아서 이것을 하지 않고는 안 되는 일로 여기시는 동시에 스스로가 너무도 원해서 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계시는 거야!’ 그렇게 이해하니까, 당신이 받아야 할 삯조차도 복음을 그냥 거저 전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일 뿐이라는 말의 뜻도 확연해졌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너무 좋고 행복하고 기뻐서 복받치는 가슴으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열정적으로 마구 쏟아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보수나 임금, 이득이나 수지타산 등 구차하고 번잡스러운 논쟁일랑 끼어들 틈새조차 없을 만큼 말입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한다거나 힘들어 보이는 어르신의 짐을 들어드린 후에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해야 하고, 좋아서 하는 일인데 무슨 보수를 바랄 수 있겠어? 그냥 그걸로 충분해!’ 바오로 사도는 이런 의미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감(感)이 마음에 통(通)했을 때, 희한하게도 제 가슴 역시 덩달아 쿵쾅쿵쾅 요동치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바오로 사도가 감격에 겨워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저 역시 함께 감격하고 흥분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선적으로 제게 너무 큰 의미라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잠깐만 판단을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요즘은 은총을 너무 세속적으로만 셈하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왜냐하면 현재 저는 성대결절, 안구건조증, 전립선염, 천식, 치루, 통풍, 허리디스크 등으로 고생하고 있고, 제가 받는 생활비의 대부분을 병원치료비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이 공동체에 와서 새로 생긴 것이고, 몇몇은 이전에 앓던 병이 더 심해진 것입니다. 분명히 몸은 은총 운운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점점 더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만, 저는 하나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이곳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프지만 이전처럼 의기소침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과 함께, 이런 기회를 통하여 제게 필요한 것들을 베풀어 주고 계심을 느끼며 너무너무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0-21)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하냐고요? 글쎄요… 자신은 없지만, 다음 글(7월호)에서 잘 설명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물론 ‘어린 왕자’식으로요. [길잡이, 2015년 4월호, 유인창 안사노 신부(가톨릭 청년성서모임)]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소개 (2)

 

 

「길잡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4월에 이어 이번호에도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냥 ‘청년성서모임’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이라고 길지만 분명하게 표현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개신교회에서 ‘성서모임’이라는 명칭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에서 우리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의 자료를 임의로 복사하여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친숙한 자료를 이용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을 꾀어내려는 속셈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한편으로는 우리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이 그 정도로 탐을 낼 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반증(反證)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누군가 다가와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권하면 그것이 ‘가톨릭 성서공부’인지 꼭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년층은 ‘가톨릭 성서모임’으로, 청소년 · 청년들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두시고요. 

 

제가 지난 호에서 우리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어린 왕자’식(式)으로 소개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시는지요? 간단히 말해서 제가 맡고 있는 이 공동체를, 기존의 단체소개처럼 이념이라든가 구조, 과정이라든가 활동 내용, 성과라든가 전망 등등을 나열하면서 건조하게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대신에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이라는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말한 ‘어린 왕자’식 소개의 정의(定義)가 되겠습니다. 

 

잠깐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1994년 1월, 사제서품을 앞두고 저는 30일 대침묵 피정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미사와 성무일도 바칠 때를 빼고는 말 그대로 대.침.묵.이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산책을 할 때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피정에 참여하는 동료 부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대침묵은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30일을 지내면서 하루에 1시간씩 다섯 번 성경을 묵상하고, 묵상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신부님과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정말이지 먹고 자는 시간 말고는 철저하게 봉쇄수도원의 수도자들처럼, 사막의 은둔자들처럼 지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주님의 빛 안에서, 내가 나 자신을 대면(對面)하는 일이 정말로 어렵다는 사실을. 

 

일주일째 이어지는 면담에서 지도신부님은 제가 잘못하고 있다고,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지도신부님을 향해 저는 거꾸로 당신이 저를 잘못 지도하고 있다고, 당신이 제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저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남보다 뒤처지지 않았고, 신학교 생활에서 규율을 어겨 반성문을 쓴다거나 경고를 받는다거나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많은 신자 앞에서 성직을 수행해야 할 사제가 흠잡힐 만한 짓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착실히 살았고 그런 자세로 지금도 대침묵 피정에 임하고 있는데, 칭찬을 받기는커녕 도리질을 당하고 있는 게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신학교에서 덜 열심하고, 지금 대침묵 피정에 들어와서도 덜 성실한 동료들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데 왜 나만 붙잡고 못살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 묵상에 하루 다섯 시간 이상을 들이고, 일곱 시간 이상을 정리와 기록에 할애하고 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지도신부님을 바꿔 달라고 할까?’ 마음은 불만과 원망, 조급함과 시기로 복잡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까, 오늘 하나만 더 묵상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갑시다.” 피정 열흘째 되는 날 마주한 지도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지체할 수가 없으니까…라니?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수 없이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는 소리잖아?!’ 무표정한 듯 미소를 짓고 계시는 건지 아니면 비웃고 계시는 건지 잘 모를 지도신부님의 얼굴을, 차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쳐다보았습니다. “유 부제님, 아담의 죄가 뭐예요?” 지도신부님이 질문을 끝내기가 무섭게 저는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가장하여 맞받았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천사의 죄는 무엇입니까?” ‘??%#@#Σ!?!…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천사가 무슨 죄를 짓는다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지 못 하고 있는 저에게 지도신부님은 묵상과 정리 시간을 갖고 다시 한 번 면담을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경당에 앉아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정답은커녕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아니, 그런 기괴한 질문으로 괴롭히는 지도신부님의 속셈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다시 마주 앉은 자리에서 저는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고, 천사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지도신부님이 입을 열어, 느릿느릿 말씀하셨습니다. “유 부제님… 아담의 죄는 교만이지요. 뱀이 아담을 유혹할 때 그러잖아요. ‘너희가 이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아져서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될 줄 알고…’라고요.” “…네!? 그러면 천사의 죄는요…?” 엉겁결에 튀어나온 저의 두 번째 물음에 대답하시는 지도신부님은 분명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천사가 교만해지는 순간 악마가 되는 거죠.” 자리를 물러나와 다시 경당에 가서 앉았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져서… 천사가 교만해지면 악마가 된다…’ 멍한 머릿속에서 신부님의 대답이 계속 울리고 있는데, 경당 정면에 걸린 커다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흘이나 보았던 십자가가 달리 보였습니다. 더 크고 무겁게, 더 힘들고 아프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제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다인들이, 로마 군인들이 아니라 바로 제가요… 저는 참 교만합니다. 그 교만이 못이 되어 지금도 주님을 아프게 합니다… 주님…”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펑펑 울고 있는 이유나 원인은 그 순간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 저는 태어나서 처음 껍데기가 벗겨진 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받고, 일그러지고, 모나고, 가시 돋친… 그리고 그런 흉함을 가리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소개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20년 전 흘렸던 그 눈물을, 저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에서 다시 흘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 청년들이 저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길잡이, 2015년 7·8월호, 유인창 안사노 신부(가톨릭 청년성서모임)]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소개 (3)

 

 

「길잡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4월과 7월에 이어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소개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음을, 두 번째 글에서는 사제 수품 전 30일 동안 피정하면서 체험했던 내면의 움직임을 바로 이곳에서 자주 경험하고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소개의 글을 정리하면서 우리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의 주인공인 청년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2012년 2월 중순에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으로 발령을 받고 사무실로 출근하고는 있었지만, 저는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2012년 겨울연수가 끝난 직후였고, 사무실이 있는 혜화동 가톨릭 청소년회관에는 청년들(대부분 청년성서모임 봉사자였지만 그때는 그런 사실조차 알 리가 없었습니다)로 북적였는데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겁니다. 아기가 막 태어난 직후 눈은 뜨고 있지만 실제로는 형체를 뚜렷하게 보는 게 아닌 것처럼, 매일 업무는 하고 있었지만 혼자 허공에다 맨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 꼴이었습니다. 

 

3월 4일, 논현동 성당에 행사가 있어 가야 한답니다. ‘우리’ 행사였고, 제가 대표였는데 저는 감조차 못 잡고 있었습니다. 그 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저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큰 성당이 청년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고, 그들 모두가 뜨거운 찬양과 기도로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성당이 아냐. 성당은 좀 냉랭해야 하거든. 신자들이 그것도 청년들이 이렇게 열심히 성가를 부르고 큰 소리로 경문을 따라 하는 건 가능하지 않아.’ 이런 상념들 속에 빠져 현실인 듯 꿈인 듯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그날 이후 많은 청년들을 회관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는 청년이 없다’더니, 그 청년들이 여기 다 모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센터 봉사자, 그룹 봉사자, 연수 봉사자… 각종 이름으로 불리는 봉사자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요? 저는 원래 성당이나 교회에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청년 신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무리 사제여도 그렇지, 화살처럼 지나가는 이 복잡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성당에서 봉사한답시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청춘들은 현실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자세히 살펴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놀란 점은, 이들이 대개 직장이 있고 대학에 다니며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봉사를 하기 위해 시간을 더 규모 있게 쓰게 되었다는 대학생들의 얘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고, 그룹봉사나 연수봉사를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의 각박한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나눔을 들을 때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이번 학기 받은 장학금의 일부라며 예쁜 봉투에 담은 ‘정성’을 책상 위에 두고 가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 사고가 나서 받은 보험금을 몽땅 들고 오는 청년,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겼다며 큰 금액을 선뜻 내놓는 청년들이 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습니다. 결혼 자금에서 조금 떼었다고 하면서 놓고 간 정갈한 편지를 읽으면서는 ‘뭐, 이런 경우가…’라는 황당함마저 들었습니다. 천주교 청년신자들 이러지 않는데… 제가 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정 기간 성경그룹공부를 마치면 연수에 들어가는데, 그 전에 노트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인내심이 신앙심만큼이나 바닥인 그룹원들을 모아서 성경공부 봉사를 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들의 노트를 모아 검사를 받기 위해 혜화동을 방문하는 일 역시 녹록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기쁘게 찾아오는 봉사자들의 행렬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입니다. 어떤 봉사자 자매님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사무실에 들어서서 여는데, 그 안에 노트가 열다섯 권입니다. 그것도 한 번에 다 받아온 것이 아니라, 몇 개는 오는 길에 지하철역에 내려서 건네받았다고 하면서 해맑게 웃는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자동차 트렁크 한 가득 노트를 들고 나타나셨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학생은 연수봉사를 하기 위해서 학기말 시험을 미리 치르고 왔답니다. ‘형님이 결혼을 해서 빨리 귀국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거짓말 하면서 봉사하는 건 안 된다 하니까 실제 결혼은 하고 날짜만 앞당겨 말한 것이니 ‘부분의 진실’이랍니다. 헐…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천주교 신자 젊은이들이 성경 공부를 통해 주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앙의 침체기가 길어진 까닭에 아직 체험하지 못한 다른 젊은이들에게 전하고자 많은 것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님과의 더 깊은 친교에 들어가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갑니다. 

 

2013년 2월 3일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513차 겨울 연수를 마치고 파견미사를 하는 동안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서울에는 16cm, 연수가 진행된 의정부 한마음청소년수련원에는 26cm. 여름에는 폭염과 폭우, 겨울에는 혹한과 폭설이라는 험난함이 있지만, 그날만큼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었습니다. 200명이 훌쩍 넘는 연수생들도 그렇지만, 그들을 축하해주러 온 그 정도 숫자의 봉사자들까지 합치면 대략 400명 정도가 산속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그리고 눈을 치우면서 자가용들을 산 아래까지 끌어내리고, 짐을 이고 끌고 하면서 눈에 막혀 멈춰 선 버스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의 피난민 행렬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3.5km를 걸어서 버스를 탔습니다. 연수생들의 불만도 불만이지만,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사고 한 건 없이, 불만은커녕 모두가 기쁘고 행복하게 무사히 귀가했다는 것입니다. 연수생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먼 길을 걸었다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넘어지고, 웃고, 얘기하고, 찬양하고… 마치 놀이하는 어린이인 듯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그렇게 빠져 나왔습니다. 독수리 날개에 태워 이집트에서 빼내 오신 이스라엘이 그랬을까요? 과거 신종 플루나 조류독감, 사스가 전국을 강타할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올여름 메르스 사태 속에서도 연수는 멈추지 않았고, 아픈 사람 없이 은총 속에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지난 봄 연수를 마치고 한 연수생이 저에게 보낸 문자로 글을 마칩니다. “어떤 시련이 오려고 할 때 원래는 하느님을 원망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하느님께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기대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게 참… 신기한 경험이네요.” 성경은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된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연구하고 나눌 때 우리의 삶은 ‘신기한 일’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끝> [길잡이, 2015년 10월호, 유인창 안사노 신부(가톨릭 청년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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