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자료

[인물]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나발과 아비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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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42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나발과 아비가일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한마디의 말이 이처럼 다른 효과를 내는 것은 그 표현의 수려함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어떤 마음 밭에서 나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루를 갈무리할 때쯤에는 그날 하루 동안 자신이 뱉어놓은 말의 무게를 달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는지,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게 하는 것이었는지, 혹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서로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마음 밭을 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생각 없이 한 말, 안 했으면 더 좋았을 말, 비수 같은 말, 가시 돋친 말, 진실을 왜곡한 말, 근거 없는 말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달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에는 저와 같은 경험이 있는 모든 이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구약의 인물들을 통하여 생명을 주는 말을 하는 법을 조금은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구약의 인물은 부부입니다. ‘어리석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나발이라는 남자와 슬기로운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25장에 나오는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지혜라는 여인’과 ‘우둔함이라는 여자’를 대조시키는 잠언 9장의 이야기 버전을 보는 듯합니다. 나발은 그 이름처럼 어리석고 거칠며, 행실이 악하고 성미가 고약한 자였습니다(1사무 25,3.17.25 참조). 반면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슬기롭고 분별력이 있으며, 용모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1사무 25,3.34 참조). 이야기의 화자는 아주 훌륭한 방법으로 이 두 사람을 대조시킵니다.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헤매며 도망다니는 다윗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다윗이 끈질기게 추격해 오는 사울에게 쫓기면서 마온이라는 광야에 머무르던 때의 일입니다. 이 마온 광야의 카르멜이라는 곳에 큰 목장을 가진 부자 나발에게는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되었으니 이들을 돌보는 목자들의 수도 많았을 것입니다. 마온 광야에 머무르던 당시에 다윗은 홀몸이 아니라 이미 그를 따르는 육백 명의 무리와 함께였고, 이 무리들은 나발의 목자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가축들을 지킬 수 있도록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나발은 양털을 깎는 때가 되자 임금이나 차릴 만한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다윗은 젊은이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어 자신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나발의 목자들에게 베푼 호의에 대한 답례로 먹을 것을 좀 나누어 줄 것을 겸손되이 청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이름으로 온 그들 앞에서 다윗을 한껏 모욕합니다. 나발은 다윗이 한때는 사울의 군사령관이자 사위였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린 다윗의 현재 모습밖에 보지 않습니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윗을 두고, “주인에게서 뛰쳐나온 종”이라 말하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라고 말합니다(1사무 25,10-11). 그러고는 자기 일꾼에게 주려고 준비한 빵과 물, 고기를 그들에게 줄 수 없노라고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나발의 눈에는 다윗의 과거도, 그의 목자들을 충실히 돌보아 준 다윗의 현재도, 그리고 다윗의 미래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보낸 불행한 처지의 다윗만 보입니다. 그는 다윗을 모욕하고 부정하고 무시한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발의 말을 전해 들은 다윗은 무장한 사백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발을 치러 갑니다. 자신이 베푼 선을 악으로 되갚는 나발 집안의 모든 남자를 죽이겠노라고 하느님께 맹세까지 합니다.

 

아비가일은 달랐습니다. 나발의 한 하인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아비가일은 서둘러 다윗의 무리에게 건넬 음식을 준비합니다. 아비가일은 일꾼들에게 “빵 이백 덩이, 술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밀 다섯 스아, 건포도 백 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 개”를 준비하여 여러 나귀에 싣게 합니다. 순식간에 이런 음식을 준비한 것을 보면 나발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비가일은 음식을 실은 나귀들을 먼저 보내어 다윗을 만나게 한 후 자신도 나귀를 타고 뒤따라가 다윗 일행을 만납니다. 한껏 흥분해 있는 다윗을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말로 진정시킵니다. 한성경학자는 8절 길이에 해당되는 아비가일의 말을 두고 구약성경에서 수사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아비가일은 먼저 모든 탓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미연에 그 일을 방지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발은 어리석은 자여서 고약한 말을 하였으니 그의 말은 유념하지 말하고 합니다. 이어지는 아비가일의 말은 나발의 말과 극히 대조적입니다. 나발이 현재 다윗의 불행한 처지밖에 보지 못하였다면, 아비가일은 현상 너머 더 깊은 진실을 간파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그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인식하게 하는 말을 건넵니다. 현재 다윗이 겪고 있는 고난은 단순한 인간적인 위기가 아니라 “주님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추격하는 사울로 인하여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다윗에게 아비가일은 주님께서 그의 목숨을 “생명의 보자기”로 감싸 주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또한 아비가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가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을지라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임을 알아보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다윗이 나발에게 하려는 복수는 다윗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설득합니다. 복수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 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분별력에 탄복합니다. 그는 나발에게 복수하려던 그 계획을 접고 피흘림에서 그를 지켜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돌아섭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거나하게 먹고 마셨던 나발은 다음날 아내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곧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성경 저자는 나발의 죽음을 두고, 하느님께서 손수 다윗이 겪은 모욕을 나발에게 되갚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발과 아비가일이 곤란 중에 있는 다윗에게 한 말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점검하게 되고, 과연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삶의 터전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나의 눈에 비치는 그의 현실 너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음을 인식합니까?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담겨 있는 고통과 슬픔, 가능성과 희망을 존중합니까? 그리고 내가 그에게 건네는 말은 그의 고통과 슬픔을 달래고, 그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 주는 것입니까? 나발의 말은 다윗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만들었다면,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을 본래의 품위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또다시 숱한 말들을 건네게 될 오늘, 나의 말들이 누군가에게 아비가일의 말처럼 들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 기운을 북돋우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빠진 좋은 말은 아부나 아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배제된 진리가 다른 이들을 베는 비수가 되기 쉬운 것처럼 진리가 배제된 사랑은 진리를 왜곡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이달에도 여전히 마음 밭을 부지런히 일굴 요량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한마디의 말을 가꾸어 내려면.

 

[생활성서, 2016년 4월호, 김영선(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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