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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8: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의 엇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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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15 ㅣ No.1289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8)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의 엇갈림


노학자 안정복, 서학에 빠진 권철신 · 이기양을 끊임없이 다그치다

 

 

「순암집」 권 8에 실려있는 안정복이 1776년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


 

다혈질의 정약전

 

정약전은 다혈질이었다. 수틀리는 꼴은 그저 넘어가지 못했다. 아명이 삼웅(三雄)이었다.

 

다산도 「선중씨묘지명」에서 형에 대해 “어려서부터 거침이 없었고, 자라서는 뻣뻣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幼而不羈, 長而桀)”고 썼다. 이재기가 쓴 「눌암기략(訥菴記略)」에는 1795년 목조영(睦祖永, 1734~?)이 정약전의 집에 들렀다가 봉변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서파의 선두에 선 목만중(睦萬中, 1727~?)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었는데, 정약전은 자신들을 해치려는 목만중의 행태에 격분한 나머지, 목만중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목조영의 선대 이야기까지 들먹이며 악담을 퍼부었다. 이재기는 이 일을 적고 나서 “목조영은 참으로 고기 잡는 그물에 기러기가 걸려든 격이라 하겠다. 정약전의 의기가 호방하고 웅건하기가 이와 같았다”고 썼다.

 

1785년 성호학파의 원로인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잇달아 편지를 보내 그들이 서학에 빠진 것을 격렬히 나무랐을 때도 정약전은 안정복을 두고 “이 노인네가 참 가련하다(此丈可憐)”고 직격탄을 날렸고, 이 말은 안정복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노학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안정복은 성호가 세상을 뜬 뒤 명실공히 성호학파의 원로였다.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은 안정복의 사위였고, 이기양의 아우 이기성은 안정복의 손주 사위였다. 안정복은 권철신과 이기양이 장차 성호학파를 이끌어나갈 두 기둥으로 알아, 젊었을 때부터 학문적 대화를 이어나갔다.

 

1763년 성호가 세상을 떠난 뒤, 어떻게든 성호 학맥의 융성을 보고 싶었던 안정복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점차 퍼져가는 새로운 풍기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정주(程朱)의 학설에서 주경(主敬)과 정(靜), 미발(未發) 등 그간 강령으로 받들어온 핵심 개념들에 반기를 들고 과감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주자학이 그토록 경계해온 양명학의 논리를 넘어서는 위험한 전개였다. 안정복은 그 배경에 서학(西學)이 있음을 이미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안정복 초상화.

 


안정복과 이병휴

 

안정복과 이병휴, 이 두 사람은 성호학을 우파와 좌파로 가를 때 양 진영의 수장이었다. 이 글에서 이들 사이의 학문적 입장 차이를 갈라 살피지는 않겠다. 「순암집(順菴集)」 권 4에는 안정복이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 21통이 실려 있다. 이 편지들 속에 당시 이병휴의 학문적 입장을 따르던 권철신과 이기양에 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1768년 편지에서 “권철신은 대단히 민첩한데, 민첩한 곳이 도리어 그의 병통이 된다(明也大敏, 敏處反爲其病)”고 썼고, 1769년 편지에서는 “권철신과 이기양은 진실로 당대의 기재(奇才)이다. 하지만 덕을 이루고 사업을 크게 하려면 한갓 재주에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평실온중(平實穩重)하고 관후정대(寬厚正大)한 기상이 있은 뒤라야 해낼 수가 있다”고 하며, 이병휴에게 이들의 날리는 기운을 묵직하게 가라앉혀 줄 것을 요청했다. 이기양이 「중용」 첫 장 ‘미발(未發)’의 뜻을 설명하면서 정주(程朱)의 학설을 온통 비판했고, 권철신마저 이에 찬동하자, 안정복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터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병휴는 “다만 선유(先儒)의 말과 다르다고 해서 한가지로 배척한다면 이것이 어찌 선배가 후인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라고 답장해서 도리어 권철신과 이기양의 손을 들어주었다. 같은 해인 1769년 편지에서 안정복은 두 사람이 “다만 나이가 젊고 기운이 날카로워 혹 의론이 경솔하고 식견이 지나친 점이 있다(但其年少氣銳, 或言議率易, 見識過當)”고 다시 썼다. 1773년 편지에서도 “권철신이 과거 공부를 끊어버린 것은 용감함이 가상하고, 이기양의 문장과 학식은 재기가 두려워할 만하나, 모두 함양하여 꼼꼼히 살피는 공부는 부족하다(旣明之斷棄擧業, 勇敢可尙. 士興之文章學識, 才氣可畏. 然俱欠涵養縝密之工)”고 지적했다.

 

1775년이 되자 안정복의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마침내 폭발한다. 두 사람이 재기가 너무 승하고 공부는 독실치 않은데, 한때의 소견으로 선인을 누르려고만 든다면서, 이들의 논의가 이미 도를 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병휴에게는 이들의 이같은 경솔하고 천박한 행태를 왜 나무라지 않느냐고까지 공격했다.

 

1776년에 쓴 편지에서는 이기양이 거소를 잃고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고,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라 물로 바위 치기의 무력감을 느낀다면서, 마침내 이렇게 썼다. “어찌 선유(先儒)의 정론 밖에서 나온, 별종의 의리가 있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형의 법문(法門)과도 같지가 않은데, 어째서 정문일침을 놓지 않는가?(豈非更有別種義理, 出於先儒已定之外, 而可以成立者耶? 此與兄之法門不同, 則何不施以頂針耶?)” 글에서 안정복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른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명백하게 이병휴까지 추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병휴는 병이 위중해서 답장을 할 힘이 없었다. 결국, 그 해 10월에 이병휴는 세상을 떴다. 안정복의 이 마지막 편지는 어투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편지에 쓴 ‘별종의리(別種義理)’는 서학(西學)을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했다. 이병휴가 양명학으로 기울었다면, 이들은 한 단계 더 나가 유학 경전의 서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회복불능으로 틀어진 관계

 

앞서 3회에서 살핀 대로 1775년에 홍유한은 여사울에서 순흥으로 이주를 결행했고, 이듬해인 1776년에는 권철신과 권제신, 이기양, 홍낙민 등이 홍유한을 따라 영남으로 이주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시점이었다. 특히 이기양은 가산을 모두 처분하고 영남으로 내려가던 도중 홍유한 며느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경기도 이천(利川)에 임시로 체류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더부살이 운운한 것은, 안정복이 이기양의 소문을 듣고서 대체 한데 모여 살며 무슨 짓들을 하려다가 이런 민망한 꼴을 당하기까지 하느냐고 질책한 내용이었다.

 

1776년 이병휴가 홀연 세상을 뜨고, 홍유한의 형편도 여의치 않자, 권철신은 남행 계획을 포기하고 강학 모임을 서둘렀고, 그것이 1777년부터 시작하여 1779년의 주어사 강학회로 이어졌다. 이미 이들이 산사에 모여 서학을 공부한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있었던 듯하다. 안정복은 크게 무력감을 느꼈다.

 

「순암집」 권 6에는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가 15통, 사위인 권일신에게 보낸 편지 1통이 따로 남아있다. 1760년부터 1784년에 걸친 편지다. 또 권 8에는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 6통이 보인다. 1765년에서 1785년 사이에 썼다.

 

성호는 1760년에 권철신의 부친인 권암에게 쓴 편지 「여권맹용(與權孟容)」에서 아들 권철신의 훌륭한 성품과 자질을 칭찬했다.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안정복은 달랐다.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았고, 나무랐다. 성호는 권철신에게 보낸 「답권기명(答權旣明)」에서 “안정복이 훈계한 것은 바로 그 요점을 얻었다고 보네. 아끼는 마음이 깊다 보니 사적인 근심이 지나쳤던 것일세. 혹 자중하지 못하여 단단해지지 않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겠지(百順所規, 正得其要. 愛之之深, 私憂過計. 或恐不自重而不固)”라는 말로 어린 제자를 달래야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 틈이 1776년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안정복은 자신이 논리로 설득하면 이들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믿어, 끊임없이 다그쳤다. 하지만 권철신과 이기양과의 엇갈림이 더 근원적인 사유의 토대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당시 안정복은 이해하지 못했다. 권철신은 이미 1779년 주어사 강학회에서 「천주실의」, 「영언여작」, 「주제군징」, 「칠극」 같은 책들을 공부하고 있었다.

 

1783년 1월에 안정복은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권철신과 그대와 이인섭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언제나 나를 두고 ‘장석(丈席)’이란 두 글자를 쓰더군. 이 두 글자를 어찌 나이가 많다고 해서 외람되게 감당하겠는가? 이를 쓰는 사람이 합당함에 잃음이 있다면, 이를 받는 사람 또한 받기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법일세. 이후로는 이 두 글자를 쓰지 말아 주게.(旣明與公及士賓往復書面, 常書丈席二字, 此二字豈可以年紀之高, 而猥當之耶? 書之者, 有失於稱停, 受之者, 亦不勝愧. 此後去此二字.)” 편지의 뜻인즉슨 너희가 입으로만 나를 ‘어르신’이라 하면서 늙고 망령 난 노인 취급을 한다. 그러니 어른 대접도 하지 않으면서 더이상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도 말라는 말이었다.

 

이때쯤 해서 이들의 관계는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1783년 당시 권철신은 48세, 이기양은 40세로 이미 성호학파 중진으로 후학들의 중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안정복이 20년 가까이 재기가 승하다, 경솔하다 천박하다는 비난의 강도를 계속 높여왔으니, 이들로서도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9월 13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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