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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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07 ㅣ No.648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상)


가난한 이들 섬기고 돌보려 창립

 

 

루이 쇼베 신부의 사제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공.

 

 

17세기의 프랑스는 백년전쟁, 종교전쟁, 프롱드의 난 등 3세기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황폐했다. 또 극단적인 이성주의, 합리주의, 정적주의, 엄격주의 등이 난무하여 정신적으로도 동요가 심했다.

 

이때 기존의 봉쇄수도원 활동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 저변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여러 수도회가 작은 공동체를 이뤄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 곧 활동 수도회의 시작이기도 했다.

 

프랑스 샬트르시에서 약 30㎞ 남서쪽에 위치한 보오스(Beauce)

 

평야 러베빌 라셔날 지역 마을은 전쟁 중 군인들이 통과하는 지대였다.

 

그래서 여러 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전쟁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피해는 비단 경제적인 피해만이 아닌, 사람들 마음 깊숙이 불신과 좌절을 심었고 삶의 의욕까지 잃게 했다.

 

당시 러베빌본당에 부임한 루이 쇼베(Louis Chauvet, 1664~1710) 신부는 이런 마을 주민들 처지를 파악하고 활력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극도로 가난한 이들의 참혹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깊이 움직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실제적이며 지적·도덕적·영적 가난을 들어 올리려는 열의가 차올랐고, 이런 쇼베 신부의 의지에 네 명의 여성들이 헌신적으로 응답했다. 이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일군 네 알의 밀씨였다.

 

1696년 이처럼 쇼베 신부에 의해 창설된 수녀회는 그때의 시대적·정신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린이 교육과 환자 간호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로 출발했다.

 

공동체는 1708년 샬트르시 생모리스가로 이전했고, 이때 새롭게 자리한 곳의 지명과 바오로 사도의 선교열을 본받으려는 정신에 따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로 부르게 됐다. 이 이름은 1861년 비오 9세 교황을 통해 교회 안에서 공인됐다.

 

수녀회는 1727년 남아메리카 안틸레스-기아나로 수녀들을 파견했는데 이는 여자수도회의 해외선교라는 새로운 장이 됐다. 이후 수녀회는 선교지를 확산시켜 나갔고 창립자 정신을 이어갔다. 무지와 가난,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게 하는 애덕의 삶으로 파스카 영성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현대 역사 안에서 눈여겨 볼만한 수녀회 역사는 1962년 총원을 이탈리아 로마로 옮긴 것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에 따라 수도 생활의 쇄신을 이룬 것이다. 이로써 2020년 현재 40여 개국에서 4250명 회원이 다양한 사도직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창립 초기의 소명 실현에 투신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7월 5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중)


단순과 겸손·대담성의 정신 실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아이들을 가르친 첫 학교의 교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공.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창립 정신은 수도회 회칙서 「생명의 책」 서문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방문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카리스마가 창설자에게 내린 은사(恩賜)이며 거룩한 유산이라고 할 때, 수도회 카리스마는 사명과 정신, 영성이 통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수녀회의 사명은 애덕이고, 정신은 단순·겸손·대담성이다.

 

또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의 파스카 영성으로 카리스마를 실현해가는 것이다. 회원들은 이 영성에 힘을 얻어 단순과 겸손, 대담성의 정신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향한 애덕으로 완성되는 삶을 지향한다.

 

루이 쇼베 신부와 회원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영성에 근원을 둔 사람들에 대한 애덕의 삶으로써 나타났다. 이런 은사적 삶은 이후에도 수녀회 전체 역사와 회원 각자의 삶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무지(無智)와 가난, 질병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이 모든 것이 빚어내는 어두움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빛 안에 새로 태어나게 하는 영성, 즉 파스카 영성이 모든 회원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원적 힘이고 수녀회가 실천하는 애덕이라는 것이다.

 

이런 파스카 영성 안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만을 믿고 살아가는 단순성 또한 회원들의 삶을 특징짓는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설자 쇼베 신부의 삶에서는 겸손과 이탈의 영성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웃의 필요를 직감적으로 간파했고 이를 즉각 실천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자신이 세운 공동체가 성장했을 때 공동체 미래를 위해 애착심을 버리고 관대하게 교구에 내어놓은 이탈의 영성이다.

 

쇼베 신부는 버려진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사목에 임했다. 당시 여러 수도 공동체가 생겼지만, 그는 큰 수도회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작은 시골의 버려진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의 영성은 제2대 원장 마리안 드 티에게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쇼베 신부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마리안은 유서에서 ‘교회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칩니다’라고 고백했다. 교회의 선익을 위해 적당한 시기에 공동체를 교구에 위탁했던 쇼베 신부처럼 마리안도 교회 유익을 삶의 가장 윗자리에 두었던 것이다.

 

마리안은 또 ‘나는 가난한 처녀들을 가르칠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있으면 숨을 쉴 수 있고, 사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유서에 적었다. 주변으로부터 모욕을 받으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함께할 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고 할 만큼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이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7월 12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하)


1888년 한국교회 첫 수녀회로 활동

 

 

- 2018년 수도회 한국설립 130주년을 맞아 서울관구 회원들이 DMZ 평화의 길 순례를 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공.

 

 

창설 당시 루이 쇼베 신부와 수도 공동체 회원들에게 내리신 성령의 고유 카리스마는 그들 삶의 방식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특별히 초기 공동체가 창설자들의 사망, 프랑스 혁명 등 여러 위기 안에서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보여준 파스카 삶은 수녀회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이 됐다.

 

수녀회 창립 192년만인 1888년 7월 22일, 4명의 선교 수녀들이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이는 그에 앞서 1년 전인 1887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블랑 주교가 한국교회 안에 수녀들의 봉사가 절실히 필요함을 인식해 수녀회 총장에게 파견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조선대목구는 1784년부터 100여 년 동안 혹독한 박해의 피가 마르지 않은 순교의 땅이었다. 블랑 주교는 첫 선교 수녀들에게 가톨릭 보육원 운영을 맡겼다.

 

수녀들이 입국한 지 일주일 후 순교자 후손인 다섯 명의 지원자가 입회해 수도 생활이 시작됐다. 1890년에는 수련장 엘리사벳 수녀가 파견됨으로써 정식으로 수련원도 개시됐다. 이렇게 수녀회는 조선대목구 사목 현장에서 교회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사도직을 폭넓게 수용하며 한국교회 첫 수녀회로서의 초석을 놓았다.

 

1915년에는 대구대목구 초대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요청으로 3명의 수녀가 대구 수녀원 초대 수녀로 파견됐다. 1916년에는 마리도나시엔 수녀가 대구 수녀원 1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1925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련원 인가를 받아 수련원을 개원했다.

 

일제의 탄압과 제1·2차 세계대전 등 격동의 세월을 한민족과 함께 겪어낸 수녀회는 한편 많은 지원자의 입회로 인적 자원이 풍부해졌으며 1948년 정식 관구로 승격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수녀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와 으제니 수련장 수녀가 죽음의 행진에 동원된다. 이중 베아트릭스 수녀는 중강진에서 총살됐고, 황해도 매화동본당서 활동하던 김 마리안나 수녀와 김 안젤라 수녀가 인민군에 의해 순교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회원들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피란 학교를 운영하는 등 적극적인 사도직을 펼쳤다.

 

전쟁 후 수녀회는 사도직 활동의 재정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1960년 첫 한국인 관구장을 배출하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회원이 420여 명에 이르자 발전적인 관구 분리가 결정돼 1967년 서울과 대구 양 관구로 나뉘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계속되면서 수녀회는 시대가 요청하는 사도직 개발에 주력하게 됐다. 그에 따라 본당 중심 사도직에서 차츰 사회사업 및 특수 사도직과 해외선교 사도직으로 보폭을 넓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올해 한국진출 132주년을 맞이한 수녀회는 내적 쇄신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수녀회의 고유 카리스마를 확인하며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도정에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7월 19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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