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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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예수님의 거룩한 몸, 성체: 오늘을 위한 성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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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11 ㅣ No.269

[특집 - 예수님의 거룩한 몸, 성체] 오늘을 위한 성체성사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이래, 교회는 그곳이 어디든 계속해서 성찬례를 거행해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체성사를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헌장」 11항)이라 부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에 그 기원을 두며, 성체성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이것을 의식하며 성찬례에 참여하고 있나요? 단순한 의무감으로, 수동적 방관자로 미사에 참여하지는 않는지요? 그 안에서 거행되는 구원의 신비가 어떻게 나 자신과 관련을 이루는지 깨닫고 참여하고 있나요?

 

 

사랑의 성사

 

성체성사의 핵심은 파스카 신비,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실현된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여기서 ‘주님의 죽음’이란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시켰으며,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통해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실현된 인간 구원의 신비를 기념합니다. 성찬례의 모든 것은 벗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역동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향한 살아 있는 사랑의 언어요 몸짓이 됩니다.

 

 

거룩한 변화와 현존의 신비

 

성체성사의 의미는 단순히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찬례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의 만찬을 나누는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의 인격이 실제로 현존하심을 일깨워줍니다. 

 

빵과 포도주에는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며 만나셨던 모든 이들 특별히 온갖 병고와 질병을 짊어진 이들을 향한 ‘가엾은 마음’,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건네신 따뜻한 말씀과 몸짓, 그들을 향한 자비와 신뢰 가득한 눈길… 그 모든 것 안에 그들과 하나 되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배어 있습니다. 

 

아주 작고 미소하게 보이는 예수님의 그 사랑은, 세상 안에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으로 증오와 원한, 폭력과 불의, 갈등과 다툼이 사랑과 자비, 화해와 용서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환희 밝혀짐을, 무너졌던 삶이 다시 일으켜짐을 경험하였습니다. 두려움과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지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찾는 여정으로 초대되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미사성제는 ‘새롭게 창조하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지금 여기서’ 재현합니다. 들어 높여지는 빵과 포도주 안에, 떼어주시는 나눔의 행위 안에 예수님은 현존하시며, 신자들 각자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우리 안에 놀라운 사랑의 기적, 새로운 삶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양식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십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갖가지 병고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향해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의 모습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양식’이 되어주셨다는 것은 그들의 고단하고 힘겨운 삶, 상처 입고 버림받은 삶을 공감하시고, 당신의 따뜻한 인격으로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 숨겨진 진리와 자유를 향한 갈망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 길을 몸소 걸어가시어, 그들에게 ‘길’이 되어주셨으며, ‘길벗’이 되어주셨습니다. 끝까지 그 길을 함께 걸으시며, 그들의 내면 깊은 갈망을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고 길러주셨습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만났던 그들처럼, 우리 안에는 진리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자리합니다. 수도 없이 배신당하고, 상처 입고, 외면당하고, 무시당하지만,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 거짓 없고 배신하지 않는 사랑, 지치지 않고 묵묵히 늘 함께 있어줄 우정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대상을 성체성사에서 만납니다. 그 옛날 사람들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해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늘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세상사에 치이고 비인격적 대우를 받으며, 모욕과 욕설, 거짓과 배신으로 상처를 입고 살아온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말씀과 성사로 가르치고 치유하시며, 오늘을 살아갈 양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선물로 주십니다. 한없는 신뢰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십니다. 우리가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체성사에서 관건은 그분과 나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이요 사랑의 친교이며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성찬례와 이웃 사랑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성체성사와 이웃 사랑의 관계를 묵상하게 합니다. 당시 코린토 공동체가 겪고 있던 내적 분열과 갈등은 성찬례에 참여하는 그들의 그릇된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1코린 11,17-34 참조). 주님의 만찬을 위한 모임에서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도 했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호된 질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일화는 교회 공동체의 영적 건강이 신자들이 성찬례에 참석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벗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례에 참여하면서 불의와 부조리로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수없이 강조하셨습니다(마태 5,23-24 참조).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과 세상과 이웃,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나 자신의 안위와 현세적 복락을 위하여 미사에 참석한다면, 그러한 나의 예배는 주님께서 어여삐 받으실 예물일 수 없습니다. 

 

영성체는 마음의 평화를 위한 방편도, 미래 구원을 위한 보증수표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온 존재를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타인을 위한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참례와 영성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께 올리는 예물이 되는 것은, 성찬에서 만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일상의 삶으로 증언할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 한민택 - 수원교구 사제로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저서로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내맡기는 용기』가 있다.

 

[생활성서, 2018년 10월호, 한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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