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하느님에 관하여 - 되찾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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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22 ㅣ No.2049

[진리를 찾아서 – 하느님에 관하여] 되찾은 아들

 

 

제 주변에는 중년의 나이에도 신학을 배우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거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하느님에 대해 캐묻고 설명해 보려는 욕구를 드러내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거리감이 덜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욕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나 타인의 경험에 비추어 하느님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고 애씁니다.

 

과연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실까요? 저마다 하느님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이 사적인 관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경험과 그 의미를, 사랑의 결속이라는 핵심적인 의미로 알아듣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의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경험

 

사람들은 먼저 개인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이해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전통적인 표현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와의 관계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하는 어른이 자신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에 따라 하느님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이해할 때 부모와의 관계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는데, 그 영향이 긍정적이라면 매우 바람직하지만, 부정적이라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정적이었을지라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이해를 얻을 기회를 만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깨어 기다려야 할 것은 종말의 날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회에 입회한 뒤 수련 시기에 저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지하게 질문해야 했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관한 이해가 단편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엄하신 분이시며 사람을 벌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를 지배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휴가로 집에 갔을 때, 제가 가지고 있던 그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이야기를 듣고 많이 섭섭해하셨습니다.

 

제가 가진 하느님의 이미지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하다는 고백은, 제게 신앙을 전해 주신 아버지의 본디 의도를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제 성장기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왜곡되었습니다. 아무튼 아버지는 섭섭해하셨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부정적이었던 하느님의 이미지를 벗겨 냈습니다.

 

아버지는 비워 둔 제 방을 보여 주시며, 당신이 엄해서, 아니면 당신께 잘 보이려고 억지로 수도원에 입회한 것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시며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수도원을 택한 것이 아버지가 무서워 택한 길이 아니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대신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고 맞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에 여유가 들어찼습니다. 덕분에 하느님이 무서워서, 또는 어떤 외부적 압력으로 수도자가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찰

 

하느님에 관한 그릇된 이해는 엄밀히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 어른과는 무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른의 영향을 받습니다. 성장기의 어느 시점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어려웠다면 십중팔구 하느님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이 관계가 어찌 왜곡될 수 있는가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사춘기 자녀를 둔 가정을 예로 들더라도 집안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공생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마음으로 느끼기에 부모님은 나의 삶을 억압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요? 그러면서도 이분들의 보살핌 없이는 나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반항심과 순종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갈등이 하느님에 대한 반항으로 표출되기도합니다. 내 삶의 고달픔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께서 부모와 작당하셔서 내 삶이 고달파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 분 모두 같은 존재라고 간주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해하고 있는 이런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한 인물을 소개해 주십니다. 바로 루카 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15,11-32 참조). 버젓이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청하는 황당한 작은아들, 그리고 그에게 가산을 나눠 준 아버지. 막내가 먼 고장으로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아들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 인물입니다.

 

매우 비현실적인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인물을 통해 하느님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통념상의 아버지를 부수고 새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 이야기에 나오는 새로운 모습의 아버지가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눠 준다는 점입니다.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니 이른바 ‘쿨하게’ 두 아들 모두에게 가산을 나눠 줍니다(15,12 참조).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기는커녕 잔치를 베풉니다.

 

마치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여겨지니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성대한 잔치를 벌일 이유는 충분합니다. 복음에서 ‘잔치’는 ‘하느님 나라’ 또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아버지와 대조되는 인물이 큰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었을 뿐 아버지를 닮지는 않았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지난날의 엄격했던 아버지 모습과 비슷합니다. 또 그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재산을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는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인색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큰아들이 친구들과 잔치를 벌인다고 해도 뭐라고 할 아버지가 아닌데, 큰아들은 지금껏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의 편견 안에 갇혀 살아온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실천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본모습이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의 현실은 대부분 가정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분들은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매우 가치 있는 일이란 것도 아실 겁니다. 양육의 의미에는 신앙과도 결부되는데, 이는 부모가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지금의 부모가 하느님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을 닮아가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심을 배우는 것은 곧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나날이 배워 나가는 부모가 하느님에 관한 건강한 인식의 전달자입니다. 그러니 만일 부모가 하느님과 사랑의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부모가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해야 합니다. 돌아가 그분의 품에 안기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조용히 묵상해 보는 것으로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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