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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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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11 ㅣ No.911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돌아보기 (상)


기쁘고 즐거운 삶으로 성덕에 이를 수 있어

 

 

거룩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발표한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에서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교황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또 성덕을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직장인은 일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에서, 젊은이는 친구들 안에서 주님이 진정 바라시는 대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며 성덕에 다다르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교황이 일러주는 그 길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지난달 서울시 구청장들과 시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한 부씩 선물했다.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부담 없이 읽고 그 속에서 ‘진주’를 캘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황 문헌이라고 하면 신학 용어와 형이상학적 개념이 가득한 수면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문헌은 그렇지 않다. 교황은 서두에서 “성덕에 관한 논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 등장한 요세피나 바키타 성녀

 

교황은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1869~1947)를 고통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한다.(32항) 지난해 2월 일반알현 때 표지에 사진이 실린 소책자를 들고 나와 “이 여인을 보라”며 소개했던 성녀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도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앞부분에서 이 여인을 희망의 증인으로 소개한 바 있다. 

 

바키타는 7살 때부터 유럽 노예시장에서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물건’이었다. 주인들에게 매를 맞고 학대당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의 몸에 난 흉터 144개는 모두 매질 자국이다. 어느 부잣집 딸 유모로 일하다 그간 자신이 섬겼던 주인들보다 더 높은 ‘진짜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 이렇게 고백했다. 

 

“태양과 달, 별들을 보면서 홀로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분을 보고 싶고, 알고 싶고, 그분께 나의 모든 찬사를 드리고 싶은 갈망을 느꼈어요.”

 

이후 어렵사리 이탈리아 수녀원에 들어갔다. 주방과 빨래방, 안내실에서 수녀로 50년을 사는 동안 그의 단순함과 천상 행복을 만끽하는 듯한 미소가 동료는 물론 마을 주민들을 매료시켰다. 누구를 만나든 “착하게 살라. 주님을 사랑하라. 하느님을 아는 크나큰 은총을 잊지 말라”는 단순한 말뿐이었다. 선종 12년 만에 시복시성 절차가 개시된 것만으로도 그의 성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교황은 “바키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존재와 인간 생명의 참주인이시라는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며 “우리는 주님께 의지할 때 종살이에서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존엄을 확인하게 된다”고 말한다. 슬픔과 고통의 망망대해에서도 하느님 손을 놓지 않으면 성덕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노여움 품지 말아야 

 

교황은 디지털 소통 공간의 언어폭력 문제와 관련해 심지어 “가톨릭 매체 안에서도 도를 지나친 비방과 폭력이 난무”(115항)한다고 우려한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한국 가톨릭의 대표적 인터넷 소통 공간인 굿뉴스(Goodnews) 자유게시판에서조차 이따금 비방과 설전이 오간다. 

 

교황은 언어 폭력을 일삼는 이들에 대해 내적으로 불안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타인을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불만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심리도 있다. 교황이 내놓은 처방전은 하느님께 굳건히 뿌리 내리기, 즉 내적으로 굳건해지기다. 

 

“내적 굳건함으로 우리는 삶의 우여곡절을 인내하고, 다른 이들의 증오와 배신과 결점을 참아 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와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이것이 성인들에게서 드러나는 평화의 원천입니다.” 

 

이어 “빠르게 변하는 떠들썩하고 공격적인 세상에서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선행을 실천함으로써 성덕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상기시키며 “거룩한 사람은 타인의 결점을 비난하는 데 힘을 써 버리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뒷담화(중상모략)만 안 해도”에 이어 온라인 공간에서 “선플만 달아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황은 성덕의 길을 걷는 중에 주의해야 할 5가지 위험도 알려준다. 현대 문화 속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위험들이다. △ 소모적이고 약해지게 하는 불안감과 난폭한 생각 △ 부정과 우울 △ 안일하고 소비적이며 이기적인 나태 △ 개인주의 △ 오늘날 종교시장을 지배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빠진 온갖 형태의 거짓 영성 등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12일, 김원철 기자]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돌아보기 (중)


성덕의 첫걸음은 이웃 향한 ‘따뜻한 말 한마디’

 

 

솔제니친의 소설 「마뜨료나의 집」은 시골에 사는 가난한 노파 이야기다. 마뜨료나는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쁜 사람들 속에서 ‘바보’처럼 살아간다. 

 

동네 사람들은 감자를 캐든 밭을 갈든 으레 마뜨료나를 불러 부려 먹는다. 마뜨료나는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가서 일을 거든다. 가난하지만 어떻게든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려고 애쓴다. 연금 신청 서류에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를 잘못 찍어 거의 두 달 동안 관공서를 뺑뺑 돌지만, 푸념할지언정 관리들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밤중에 열차에 치여 죽는데, 그것도 집을 짓겠다고 자기 집 2층 목재를 뜯어가는 친척을 도와주다 당한 변이다. 

 

솔제니친은 그녀의 진실함과 선행, 인내심을 통틀어 “마뜨료나는 이 집에 사는 고양이보다 죄를 덜 지었을 것이다. 고양이는 쥐라도 죽였느니 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 말로 소설을 맺는다. “그런 진실한 사람이 없으면 어떤 도시도 바로 설 수 없다. 비단 도시뿐이겠는가. 온 세상이 바로 설 수 없으리라.”

 

 

‘옆집’의 성인들

 

마뜨료나 할머니야말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나오는 ‘옆집에 사는 성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덕 혹은 거룩함은 일상 삶에서 작은 몸짓들로 서서히 자라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남을 흉보는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에서 ‘아니야. 난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거나, 피곤한데도 자녀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거리에서 만난 불쌍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게 모두 성덕으로 나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16항 참조)

 

교황은 평범한 하느님 백성 안에서 성덕을 발견한다고 줄곧 말해왔다. 2013년 즉위 직후 인터뷰에서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던 자신의 할머니 로사의 삶을 회상하며 “그녀는 매우 고통받았던 한 명의 성녀였다. 항상 용기를 가지고 윤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한 바 있다. 성덕은 누구나 작은 몸짓들로 다다를 수 있는 일상적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할머니 삶까지 언급한 것이다. 

 

교황은 “하느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1테살 4,3)이라는 말씀을 인용해,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이자 아버지의 계획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삶의 매 순간에, 또 해야 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께 여쭤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라고 재촉한다.

 

 

열쇠는 ‘참행복 선언’

 

교황은 성덕에 이르는 바른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에서 찾았다. 이 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분증과 같다”며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정도라고 말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로 시작되는 산상 설교에서 ‘행복한’은 ‘거룩한’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참행복 선언에 대한 관상이 이 권고의 핵심이다.

 

교황은 “부자들은 자신의 재물에 안심하고, 그것을 잃을 위험에 놓이면 삶의 의미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하느님 말씀과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을 담을 자리가 없다(68항)고 말한다. 또 “최신 과학기술 수단의 지속적 혁신, 여행의 매력, 수많은 소비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만한 공간을 남겨 두지 않는다”며 거룩해지고 싶거든 가난한 마음부터 지니라고 당부한다. 

 

온유함은 허영과 불관용, 분노가 들끓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덕목일지 모른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완전한 사랑은 남의 허물을 참아주고, 남의 과오에 분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거의 매번 손해를 보는 게 현실이다. 교황은 이런 모순적 현실에 대해 “(그럼에도) 온유한 편이 낫다”며 우리가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갈 힘을 북돋기 위해 이사야서 한 구절을 상기시킨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덕 선언’(67-94항)

 

마음이 가난한 것이 곧 성덕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곧 성덕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사랑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 줄지라도 날마다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19일, 김원철 기자]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돌아보기 (하)


교만한 ‘척척박사’… 멀기만 한 성덕의 길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덕의 길을 걷는 우리를 자꾸만 잘못된 길로 잡아끄는 두 가지 적이 있다고 말한다. 영지주의와 펠라지우스주의다.

 

두 사상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이단 판정을 받았지만, 소멸하지 않고 매번 얼굴을 바꿔가며 2000년 역사에 등장했다. 워낙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당대 철학이나 시대사조와 결합해 신앙인들을 유혹하다 보니 그 정체를 단순 명료하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흔히 그리스도교라는 몸에 붙은 ‘영적 기생충’이라고 불리는 두 사상을 교황은 ‘성덕의 교묘한 적’으로 규정한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가톨릭 진리를 가장한 인간 중심적 내재론을 드러낸다”며 기만적 사상에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노시스주의(Gnosticism)라고 불리는 영지주의의 뚜렷한 특징은 선악에 대한 이원론적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구전이나 비밀문서들에 들어있는 거짓 진리(신비한 지식)를 믿는다. 

 

영지주의는 매우 해로운 이념들 가운데 하나라고 교황은 지적한다. “지식이나 구체적 경험을 지나치게 격상시키면서 실재에 대한 자신들의 고유한 시각을 완벽하다고 여기기 때문”(40항)이라고 설명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영지주의에 물든 사람을 예로 든다. 모든 물음에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다. 교황은 그런 사람은 “자기만의 심리적, 지적 이론을 펼치려는 사리사욕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거짓 예언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런 영지주의자는 자신이 신앙과 복음 전체를 완벽히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또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하고 무조건 따르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교황은 교리, 더 정확히 말해 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표현은 “물음과 의혹과 질문을 낳는 역동적인 힘이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니다”(44항)라며 질문과 해석을 피하는 신앙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펠라지우스주의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 본성과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에 따라 구원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런 오류에 빠진 사람은 “인간 지성의 능력과 의지의 힘을 초월하는 은총의 선물”(「가톨릭교회 교리서」 1998항 참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기지도 않고, 형제적 사랑을 중시하지도 않는다. 

 

교황은 이런 사고방식을 따르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거나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49항)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 △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 전례와 교리와 특권에 대한 허식 △ 실질적 일 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등의 경향을 보이는 사람을 ‘신펠라지우스주의자’라고 칭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 마지막 부분에서 세 부류의 악마를 꼽았다.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이 없다고 믿는 진리인데,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와 펠라지우스주의에 물든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다. 교황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이런 모습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볼 것을 권한다.

 

이 권고에는 성덕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제시돼 있다. 선을 행하는 중에 겪는 고난과 굴욕을 겸손한 자세로 이겨내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교황은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주시는 성덕은 당신 아드님의 굴욕(십자가 수난)을 통해 왔다”며 “굴욕 없이는 어떠한 겸손도, 어떠한 성덕도 없다”(118항)고 이른다. 가정을 지키려고 침묵하고,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들을 칭찬하고, 남들이 달가워하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 게 모두 ‘일상의 굴욕’을 견디며 성덕으로 나가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또 성덕의 길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교황은 “성덕은 다른 이들과 나란히 함께하는 공동체 여정에서 성장한다”며 다른 이들과 함께 성인이 된 신앙의 증인들을 다수 열거하는데, 이 명단에 한국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들도 들어 있다.(141항) 

 

교황은 “성덕의 길을 식별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침묵 속의 기도”라며 우리에게 묻는다. 

 

“주님의 현존 안에 조용히 머물며, 차분하게 주님과 시간을 보내거나, 주님의 눈길에 빠져들어 본 순간들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얼굴을 응시해도 치유되거나 변화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주님의 심장, 곧 그분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라”고 교황은 일러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26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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