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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살레시오 성인: 거룩한 간호사요 병자들의 성인, 복자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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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7 ㅣ No.1770

[살레시오 성인] 거룩한 간호사요 병자들의 성인, 복자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온 가족이 이민 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살레시오 성소에 응답한 후 남부의 작은 도시 비에드마에서 40여 년간 기쁜 마음으로 의료사도직에 한평생을 바치며 성화의 길을 걸은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 이야기.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가 일하고 있는 병동은 일선 병원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돈이 없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병원이었지만 아픈 사람을 단 한 사람도 그냥 되돌려 보낸 적이 없었다. 이를 본 많은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아무나 받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자티 수사는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면 그들을 그냥 내보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사람들은 우리 일에 하느님의 축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가난한 이들은 자티 수사에게는 친구요 하느님의 섭리 그 자체였다.

 

 

아르헨티나, 그 미지의 땅으로…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는 1880년 10월 12일, 이탈리아 보레토(Boretto)에서 농부인 아버지 루이스 자티와 어머니 알비나 베키의 여덟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아르테미데는 어머니 품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머리를 땅바닥에 찧을 만큼 활발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일을 하고 자기희생을 하는 데 익숙했다. 이미 네 살 때부터 들에 나가 자기 키를 넘는 풀밭에서 가축을 먹이기 위해 베어둔 풀들을 주워 모으는 일을 했고, 아홉 살이 되던 해까지 농장 일꾼으로서 돈을 벌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탈리아 국민은 자유의 열매인 평화와 번영을 오래 누리길 그 어느 때보다 더 갈망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움직임 그리고 불안정한 사회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식량난까지 겹쳐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 무렵 이탈리아인들은 아메리카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곳은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줄 기회의 땅으로 보였다. 하루하루 가난을 이겨 내야 하는 힘겨운 삶을 살던 아르테미데 가족도 신세계로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아르헨티나에 자리를 잡은 아르테미데의 삼촌인 조반니 아르테미데의 제안으로 머나먼 땅 아르헨티나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1897년에 아르테미데 가족은 아르헨티나 바이아블랑카(Bahia Blanca)에 정착했다.

 

 

사제의 꿈을 안고 살레시오 신학교로

 

아르테미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바이아블랑카 변두리의 한 성당을 찾았다. 그리고 그 성당의 주임 신부인 카를로스 카발리 신부를 만난다. 카발리 신부와 아르테미데는 종종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카발리 신부는 아르테미데에게 사제 성소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부모의 동의를 얻어 그를 살레시오 신학교로 보냈다.

 

신학교 공동체는 정말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사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안고 공동체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주어진 학과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어느 날 아르테미데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결핵에 걸린 젊은 사제를 간호하다가 그도 감염이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요양차 신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 다른 하느님의 섭리

 

어머니의 간호로 원기를 회복한 아르테미데는 의사인 에바시오 가로네 신부의 제안으로 결핵이 치유되면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성모님과 하게 된다. 결핵이 완치된 1908년, 아르테미데는 살레시오 회원으로 첫 서원을 하고, 3년 후에 종신서원을 했다. 종신서원을 한 그는 사제 서품에 요구되는 오랜 기간의 학업과 훈련이 자기의 길이 아님을 예견하고 평직 수사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성모님과 약속한 대로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다짐하고 가로네 신부와 함께 환자들을 돌보는 데 매진하였다. 그의 첫 소임은 가로네 신부가 사목하는 병원과 맞닿은 약국을 돌보는 것이었다. 1913년에 가로네 신부가 선종하게 되자, 자티 수사는 병원과 약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모든 시간을 환자를 위해

 

자티 수사는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묵상과 미사에 참례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돌며 환자를 방문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는 흰옷을 습관적으로 입었고 가장 흔한 의료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한 손은 핸들을 잡고 한 손엔 묵주를 들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병에서 회복한 사람들과 보치(Boccie, 잔디에서 하는 이탈리아식 볼링의 일

종: 편집자 주) 게임을 신나게 하였고, 병원 내부를 돌며 환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저녁엔 약국에서 일을 하고 늦은 밤에는 약학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늘 영적 독서를 하였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쉬는 때에도 그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을 돌볼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하고 있었다.

 

자티 수사는 애덕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날씨, 어떤 시간, 어떤 장소이든 응급환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왕진을 청하는 사람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미천한 사람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도움을 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모든 것을 거저 해 주었으며, 누군가로부터 사례를 받았을 경우엔 그 모든 것을 오직 병원을 위해 썼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행

 

1950년 7월 1일, 병원 옥상 물탱크에 구멍이나 바닥에 물이 떨어지자 자티 수사는 직접 수리하기로 했다. 마침 밖에는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날씨마저 매우 추웠다. 벽에 사다리를 기대고 물탱크로 오르던 자티 수사는 발을 헛디디며 뒤로 넘어졌고, 사다리가 그의 머리를 덮쳤다. 지나가던 사람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자티 수사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수십년 간 늘 환자를 돌보던 그가 타박상을 입은 환자로 누워 있게 되자 많은 이가 안타까워하며 쾌유를 빌었다. 얼마 후 그의 타박상은 완전히 치유되었지만 예전처럼 일할 수 없었다. 그의 췌장에서 이미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티 수사는 아픈 와중에도 자신의 건강보다는 병원과 그가 돌봐야 할 환자를 먼저 생각하며 때때로 눈물을 흘렸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도 자티 수사는 진통제 한 번 맞지 않았다. “고통은 제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는 값진 것인데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요?” 고통 중에 늘 되뇌이던 자티 수사의 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1951년 2월 27일, 자티 수사는 병자성사를 받았다. 통증 때문에 힘든 상황임에도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말에 또렷한 정신으로 응송을 했고, 세례 때의 약속과 수도 서원을 갱신했다. 자티 수사는 수도회에 들어와 40여 년을 수도자로 생활하다가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죽게 된 것에 대해 하느님과 장상들에게 감사드렸다. 1951년 3월 15일 오전 6시, 자티 수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자티 수사의 장례식을 지켜본 사람들은 슬프기는 하지만 장례식이라기보다는 개선식에 참석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살아생전에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받은 적이 없었던 그…. 죽어서는 모든 것을 받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 상류층과 하류층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는 애도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한 목격자는 “내 평생 어떤 유명한 사람의 장례식에서도 그렇게 많은 꽃을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시성을 위한 심사 진행 중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의 덕행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많아지고 그에 대한 신심이 늘어나자 남아메리카의 살레시오 회원들은 자티 수사의 시복 조사를 청원하였다. 이에 1977년 5월 31일 비에드마의 주교, 메켈레 스테파노 헤사인 몬시뇰은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의 삶과 성덕에 관한 시복 절차를 신청했다. 오랜 기간이 걸리긴 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2002년 4월 14일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현재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자티 수사, 시성의 길이 열리다

 

2002년 복자품에 오른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의 시성이 멀지 않아 실현될 전망이다. 지난 3월 15일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한 유력 일간지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교황청 시성성이 필리핀에서 일어난 기적을 인정하면 곧 시성될 것으로 보인다.

 

자티 수사(1902~1951년)는 아르헨티나 비에드마에서 사는 동안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파타고니아의 거룩한 간호사’, ‘병자들의 성인’으로 존경받았다.

 

자티 수사의 전구를 통한 첫 기적은 1980년 살레시오 신학생인 카를로 보시오(후일 살레시오 회원이 됨)에게 일어난 것인데, 심사를 거친 후 기적으로 인정돼 2002년 시복의 길을 열었다. 그런데 최근 자티 수사의 전구로 인한 두 번째 기적이 필리핀에서 일어나 교구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난한 이들과 아픈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며 섬겼던 자티 수사의 시성이 이루어져, 우리 살레시오 가족은 물론 모든 이가 그의 성덕을 본받을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아르테미데 자티 수사의 시성을 위한 기도문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께서는 살레시오 수사 아르테미데 자티를 부르시어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섬기도록 하셨나이다.

아픈 형제들에게 기꺼이, 아낌없이 헌신할 힘을 자티에게 주시어

매일의 수고와 감추인 희생 속에서 당신의 복음에 따라

충실히 사는 의인이 되게 하신 주님,

천상의 성인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빛을 증거하며 빛나는 그를 보게 해 주소서.

또한 그의 전구로 주님과 주님의 충실한 종 자티의 영광을 위해

(각자 필요한 은혜를 청한다.) 은총을 비나이다.

아멘. 

 

[살레시오 가족, 2018년 5월호(150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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