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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2) 영적 대화로 23명의 목숨 구해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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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7 ㅣ No.1158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2) 영적 대화로 23명의 목숨 구해낸 신부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하비에르가 회심하던 즈음 파리는 급속히 퍼져나가는 루터 사상으로 소용돌이쳤다. 1533년 칼뱅이 파리로 들어왔다. 그해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는 교회개혁주의자로 루터 사상을 동조하던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1534년 10월 17일 밤 파리 전역에 반 가톨릭 대자보가 붙었다.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체가 종교개혁의 두려움에 떨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회오리 속에서도 파리에서는 에스파냐 출신의 디에고 라이네스, 알폰소 살메론, 니콜라스 보바디야, 포르투갈 출신의 시망 호드리게스가 예수회 초기 동료로 합류했다. 

 

153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하비에르는 이냐시오를 비롯한 초기 동료 6명과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생 드니(현재 생 피에르 드 몽마르트르) 소성당의 지하 묘소에서 서원을 했다. 정결과 청빈을 서원하고 또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비신자들의 개종에 헌신하기로 서원했다.

 

하비에르와 초기 동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6년 11월 15일 파리를 떠나 1537년 1월 8일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 사이 클로드 제이, 파샤스 브로에, 장 코뒤르 등 세 명의 프랑스인이 합류해 초기 동료는 모두 10명이 됐다. 이들은 모두 ‘영신수련’ 체험으로 하나가 됐다. 이들은 그곳 병원에 다니며 두 달간 환자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한 후 1537년 3월 교황에게 예루살렘 순례와 사제 서품을 청원했다. 이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1537년 6월 24일 하비에르는 이냐시오를 비롯한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이후 그들은 둘 셋 짝을 지어 베네치아를 떠났다. 먼저 각자 40일간 기도하고, 거리 설교를 하며 구걸로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 계획은 접어야만 했다. 아드리아 해에서 술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전쟁이 치열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편이 끊겼다. 

 

초기 동료들은 그해 9월 이탈리아 비첸차에 다시 모였다. 이냐시오, 파브르, 라이네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자신들을 봉헌하기로 하고, 다른 이들은 파도바, 시에나, 볼로냐 등지의 대학에서 가르치며 자신들의 모임에 함께할 만한 대학생들을 찾기로 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들에 관해 물으면 “예수의 벗”이라고 대답하기로 정했다. 

 

1538년 11월 말 이냐시오, 파브르, 라이네스가 로마에 도착했다. 하비에르를 포함한 나머지 일곱 동료도 로마에서 합류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당분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식별했다. 초기 동료들은 이 문제를 두고 1539년 3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 여러 차례 회의했다. 회의 내용은 다섯 개의 장으로 요약됐고 나중에 예수회 ‘기본법’의 핵심이 됐다. 교황의 승인을 받아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고 ‘선교에 대해’ 교황에게 순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비에르는 ‘선교에 관해’ 교황에게 순명하는 첫 예수의 벗이 됐다. 1540년 9월 27일 바오로 3세 교황이 교서를 발표해 예수회 탄생을 승인했다. 

 

예수회 인가를 기다리는 15개월 동안 예수의 벗은 더 늘어났지만, 교황 교서에는 파리에 있던 열 명만 언급되었기에 이들에게만 예수회의 첫 장상을 선출할 권한이 있었다. 하비에르는 “우리의 오랜 지도자이자 진정한 사부 … 우리를 한데 모았고 … 더 나아지도록 …보호하고 이끌어 가고 도와주어야 할지 알 것이기에”라며 이냐시오를 총장으로 추천했다. 인가 후 여섯 달이 지난 1541년 4월 8일, 하비에르의 바람대로 이냐시오가 예수회 초대 총장으로 선출됐다. 

 

예수회 초기 동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 파리대학 학위 덕에 유럽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들은 이를 토대로 출세나 영달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다. 이 자유로움은 ‘영신수련’과 연결돼 권력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관심과 지지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예수회원들과 깊은 유대를 나누며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했던 포르투갈의 주앙3세 국왕은 선왕 마누엘 1세가 개척한 식민지 인도에서 예수회원들이 일해 주기를 희망했다. 1540년 주앙 3세 국왕은 주 바티칸 포르투갈 대사를 통해 이 문제를 교황에게 요청했다. 이에 교황은 니콜라스 보바디야와 포르투갈 출신인 시망 호드리게스를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바디야가 인도로 떠나기 위해 나폴리에서 로마에 왔을 때 심한 열병에 긴 항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냐시오의 비서직을 맡고 있던 하비에르가 보바디야 대신 파견됐다. 

 

하비에르와 시망 호드리게스는 1540년 3월 15일 로마를 출발, 6월 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동풍을 기다리면서 이듬해 봄까지 설교를 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영신수련을 가르쳤다. 또 하비에르와 시망 호드리게스는 이단 죄목으로 수감된 이들을 회두시키는 일을 했다. 감옥에서 하비에르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회심한 23명이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프랑스 성직자 한 명과 다른 한 명은 1540년 9월 공개 처형됐다. 하비에르는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공개 화형식을 지켜봤다. 

 

두 예수회원의 사도직에 포르투갈 백성들은 많은 영적 위로를 얻었다. 백성들은 국왕에게 두 예수회원이 포르투갈에 남아서 사도직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국왕은 교황에게 백성의 바람을 전했고, 교황은 시망 호드리게스를 포르투갈에 남기고, 하비에르만 인도로 파견했다. 

 

1541년 4월 7일 35세 생일에 하비에르는 미세르 파울로, 포르투갈 출신인 프란치스코 만실라와 함께 인도를 향해 리스본을 출항했다. 하비에르의 손에는 그를 인도 교황대사로 임명한다는 교황의 소칙서가 들려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6일, 김태진 신부(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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