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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초기의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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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08 ㅣ No.960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초기의 그리스도교 (1)

 

 

이민족의 침입

 

5세기 초반, 훈족에 쫓겨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다뉴브 강과 라인 강을 건너 로마제국으로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먼저, 남부 갈리아와 스페인에 정착하기 위해 쳐들어 왔던 알라리쿠스가 이끄는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정복당하고 약탈당했다(410년).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점령했고, 반달족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한 히포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상을 떠났다(430년). 439년에는 카르타고가 점령당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서로마제국을 침범했다. 게르만계 이민족들과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군대가 동맹한 신성한 연합군이 트루아(지금의 프랑스) 근처에서 아틸라의 진격을 저지했고, 대 레오 교황은 아틸라를 만나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협상은 성공적이었다(425년). 그러나 로마는 겐세리쿠스(반달족 왕)가 이끄는 반달족에 의해 또다시 약탈당했다(455년). 서로마제국의 마직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이민족 게르만족의 왕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를 당했다(476년). 서로마제국이면서 그리스도교였던 고대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로마제국이 동방에서는 계속 유지되었지만,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여 동고트족, 서고트족, 부르고뉴족, 반달족, 알라마니족 등의 이민족들이 세운 여러 왕국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도래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서로마제국의 붕괴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가 함락당한 사건(410년)은 신자들에게는 잊지 못할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이교도들은 로마가 자신들의 옛 종교를 저버렸기 때문에, 신들이 이 같은 비극적인 형벌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이 로마를 그분들이 왜 보호하지 못했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아무 죄도 없는 어린이들은 그렇게 비명횡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 베들레헴에 있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가 이민족에게 함락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히포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작품 《신국론》에서, 로마가 함락당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 같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교회만이 유일하게 조직적인 제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주교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행정업무가 거의 붕괴 직전인 상황 속에서도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로 밀려드는 많은 피난민을 맞아들이면서,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신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여러 주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민족에 대항하도록 용기를 주었지만 이민족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대다수의 게르만족들은 4세기에 울필라스가 자신들에게 전해 준 아리우스 주의의 그리스도교를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관대한 입장이었지만,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던 반달족은 아프리카에서 자신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잔혹하게 박해했다. 프랑크족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로 남아 있었는데 프랑크족의 클로비스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프랑크족은 옛 갈리아계 로마인들로부터 엄청난 호의를 입었다. 그리하여 클로비스 왕은 아리우스 주의 게르만족을 훨씬 능가하게 되었다. 이제 주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독립적인 통치자를 갖게 됨으로써,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클로비스 왕이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콘스탄티누스가 된 것이다.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초기의 그리스도교 (2)

 

 

이슬람의 태동과 아라비아인들의 침입

 

150년 후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온 또 다른 침입자들이 지중해 연안에 있던 그리스도교의 지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는 엄청난 지각 변동을 초래했다. 7세기, 아라비아는 다양한 문명과 종교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였다. 유다 공동체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홍해 연안과 아라비아반도 남부 지역 여러 곳에 설립되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하니프족은 아라비아인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유일신 사상을 믿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라비아 지역은 다신교 신앙을 믿는 유목민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한편, 아라비아인들은 검은 돌이 있는 메카(Mecca)를 향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왜냐하면 메카는 순례지이면서, 시장이 열리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사상의 영향을 받은 마호메트는 약 610년경부터 자신이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메시지를 선포했다. 알라(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과 알라는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알라를 믿는 사람들(무슬림)은 ‘그 신에게 절대로 복종(이슬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호메트는 아브라함과 예수를 통해서 이어지는 긴 예언자들의 계보에서 자신이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그가 완수해야 할 사명은 아라비아에 유일신 사상을 재건하고, 자기 민족에게 민족 고유의 언어로 된 책, ‘코란’을 주는 것이었다. 코란이야말로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대등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하지만 자기 부족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은 마호메트는 메카를 도망쳐 메디나로 도망갔다(622년). 이것이 무슬림 시대의 기원이 되는 헤지라 축제의 기원이다. 그리스도인들과 유다교인들을 규합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마호메트는 이 둘을 모두 배척하고 자신의 새로운 종교를 세계 종교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라비아 부족들을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고 나서 메카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메카에서 세상을 떠났다(632년).

 

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의 잔류 부대들이 그나마 아라비아에 저항하는 가운데, 아라비아인들은 새로운 군사 강국으로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속도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했다. 아라비아인들은 ‘알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치열한 투쟁(‘지하드’ 때로는 ‘성전聖戰’으로 번역)’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시리아 교회와 이집트의 동방 교회 사람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정복자들을 환영했기 때문에, 이슬람 정복자들의 과업이 의외로 쉽게 달성되었다. 심지어 시리아와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 정복자들을 때로는 해방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당시 시리아와 이집트 교회는 교의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로 인해 콘스탄티노플과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먼저 함락되고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도 함락되었다(638년). 알렉산드리아는 642년에, 페르시아는 651년에 아라비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7세기말에는 북아프리카인들이 아라비아인들에게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정복되었다. 아라비아인들은 카이로우안을 건설했고(687년), 카르타고를 점령했다(698년). 그 후 아라비아인들과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인들이 함께 스페인 정복을 감행했다(711년). 그들은 저 멀리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슬람은 그리스도인들의 최대 원수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1492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은 아라비아인들에게 잃었던 영토를 다시 수복할 수 있었다. 11세기부터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활동했던 성지를 이슬람교도로부터 되찾기 위해서 십자군을 조직하려고 했다. 한편, 아라비아인들은 그리스 문명을 동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명과 학문을 전승하는 데 있어서 가교 역할을 했다. 스페인, 시칠리아와 같은 특정 지역들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사이를 이어주는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초기의 그리스도교 (3)

 

 

새로운 종교지도

 

동방과 북아프리카에 있던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교들이 아라비아의 침입으로 인해서 붕괴되어 버렸다. 무슬림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동방에서 천천히 쇠퇴해 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데, 이런 교회들 가운데서 이집트의 콥트 교회와 레바논의 마론 교회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교회는 수도 생활과 같은 안정적인 제도를 계속해서 유지해 왔고, 고유한 전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문화적인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쇠퇴 과정은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졌다. 아라비아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정복했을 때만 해도 주교가 약 40명이었다. 하지만 1053년에는 많아야 5명, 1076년에는 단 2명의 주교밖에 없었다. 12세기 초에 북아프리카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졌다. 따라서 교회의 무게 중심도 더 이상 로마를 축으로 하는 지중해에 있지 않았다. 교회의 무게 중심은 북쪽으로 이동해 갔다. 아라비아의 세력이 지중해에 버티고 있는 한, 해상을 통한 서양과 동양의 왕래와 문물교환은 사실상 더 어려워졌다. 유럽 대륙에서는 슬라브족이 다뉴브 강변에 정착해서 지중해 쪽과 달마티아 해안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는 펠로폰네소스반도까지 밀고 내려왔다. 슬라브족은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과 라틴어를 쓰는 서방 접경 지역에서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지도가 새롭게 그려졌다.

 

동로마제국은 남쪽으로 시리아, 팔레스티나와 이집트를 빼앗겨 버렸다. 또한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족이 동로마제국의 북쪽과 동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로마제국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아시아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이즈음부터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제국으로 알려지게 된다. 비잔티움제국이라는 이름은 비잔티움이라고 불리는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비잔티움이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좌들이 아라비아 세계에 둘러싸여 고립된 채 쇠퇴해 가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동방 교회의 수장으로서 수위권을 지니게 되었고, 로마 주교인 교황과는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서방에 자리 잡고 있던 이민족 왕국들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로마제국을 침략해 온 결과였다. 무역이 시작되면서부터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렸다. 도시에서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활동이란 고작해야 거대한 땅에 농사짓는 일이었다. 이 같은 경기 침체는 윤리 의식 침체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과 종교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종교는 이교도들의 잡다한 미신으로 완전히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눈에 띌 정도로 모든 것이 퇴폐해 버렸다는 것은 하나의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을 통해서 점차 그리스도교 신앙은 새로운 문명을 태동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었다. 즉 그리스-로마 문명의 유산과 게르만족의 공헌이 결합되어 새로운 문명이 탄생했다. 이 시기에 시골의 광활한 땅에 본당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시골 사람들의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교회 안에서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땅을 표현하는 시골 시가(詩歌)들과 대지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내용들이 가득한 시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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