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미니멀 라이프, 버리기 또는 가치 있게 채우기: 나를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우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5 ㅣ No.1477

[경향 돋보기 - 미니멀 라이프, 버리기 또는 가치 있게 채우기] 나를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우기

 

 

쓸데없는 것에 나를 빼앗기지 않을 자유

 

거실 책상에 앉아 방을 한번 둘러봅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책꽂이에 꽂힌 많은 책과 군데군데 자리 잡은 자잘한 물건들이며, 액자와 화분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인 서류들을 보자니 한숨이 나옵니다. ‘뭐가 이리 많을까?’

 

사제로 살면서 갖게 된 꿈이 하나 있습니다. 임지를 바꿔 이동할 때, 정말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이동하는 소박한 모습입니다. 서류 가방 하나와 여행용 가방만으로 이동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더라도, 적어도 화물차가 아닌 승용차 한 대로도 충분한 정도의 짐만으로 살고 싶습니다. 지금의 제게는 여전히 요원한 일입니다.

 

요즘 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사는 생활 방식인 ‘미니멀 라이프’가 점차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대에 많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던 사람들이, 적게 소유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의 형태를 삶의 새로운 대안으로 찾는 것이라고 하네요.

 

대번에 떠오르는 것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라고 담담하게 전하는 스님의 말이 비록 종교는 다르더라도 읽는 이들의 마음에 절절이 들어와 박힙니다. 그러나 스님이 뜻하는 무소유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아시겠지요. 비록 어떤 물건이 필요해서 가지고는 있지만 그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일 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겠지요.

 

미니멀 라이프에서 지향하는 바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가진 물건을 정리해서 공간을 넓히고 단순히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것에 자신을 빼앗기지 않을 자유를 추구하며, 또 그 자유 안에서 더 중요한 삶의 의미를 찾고 성장해 나가려는 것이지요.

 

 

정말 가난이 복일까

 

이러한 삶의 형태를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가난’을 떠올리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모두는 가난을 ‘복음적 권고’의 하나로 추구하고 있죠. 미니멀 라이프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가난과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난한 사람은 행복할까요? 굳이 ‘미니멀리스트’(최소 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버리고 사는 삶이야 교회에서 덕으로 가르치는 것이니 우리도 마냥 그렇게 살면 되는 걸까요? 앞서 루카 복음의 말씀을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로 다르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의 가난’을 실제의 가난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풀이하는 여러 해석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가난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함’을 뜻하는, 가난이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가난이 복일까요?

 

재물에 대해 경계하는 성경 말씀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시편 52,9-10; 예레 49,4; 에제 28,4-5; 마르 10,23-25; 1티모 6,9-10 참조),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에는 세상 재물에 대한 복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악에게 복을 주시어 큰 부자가 되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시고(창세 26,12-13 참조)또 코헬렛의 저자도 우리에게 부와 재화를 베푸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5,1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을까요?

 

가난 자체가 복은 아닐 것입니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여 삶의 여유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그날그날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에게 가난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가난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미니멀 라이프 운동이 단순히 가진 것을 버리고 줄여서 단순한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라면,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운동은 그저 복에 겨운 배부른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을까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말 그대로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행복의 다른 내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지금 굶주리기 때문이 아니라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는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지금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웃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하느님과의 일치로 식별을

 

가난은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하나의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욱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적 권고에도 잘 나타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최종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최종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나 도구로서 청빈과 정결, 순명의 세 가지 복음적 권고가 주어져 있죠.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청빈과 정결, 순명이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그 가치를 지닙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나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라면 우리는 최종 목적과 그에 이르려는 수단 사이의 차이를 식별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때로는 가난보다 부유함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별에 대해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의 ‘원리와 기초’(23항)에서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심’(不偏心, indifference)을 가르칩니다. 곧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사물은 영혼이 자기의 창조된 목적(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그분께 봉사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만큼 이용하고, 또 방해가 되는 만큼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에 어떤 재물의 사용이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그 재물을 그만큼 자유롭게 쓸 수 있겠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자유롭게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이나 부유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하는지 아닌지가 더 근본적인 식별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부유함보다는 가난함을 선택하라고 가르칠까요? 그 이유는 그만큼 재물이 지닌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살아가고자 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면 자꾸만 그 소유를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마음이 커지기 마련이죠. 세상의 재물이 주는 유혹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삶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난의 대상은 비단 사물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물질적 가난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의 내적 가난, 곧 영적 가난입니다. 영적 가난이라면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향한 영적 여정을 가려면 모든 형태의 집착을 끊어 버리고(정화)자유의 길을 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끊어야 할 집착의 대상에는 재물 같은 지상의 보화뿐만 아니라 영적 위안이나 기쁨 등의 천상 보화도 포함됩니다. 결국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끊는 ‘무’(無)의 길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이처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가르치는 정화의 길이나 이냐시오 성인의 식별, 그리고 복음적 권고로서의 가난은 일관되게 하나의 공통점을 지향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 자신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라는 것이죠.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빈곤이나 부귀, 질병이나 건강, 모욕이나 명예 중 어떠한 것을 받게 되더라도 그에 상관없이 참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그 근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에는 당연히 이웃을 향한 사랑이 포함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무엇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 사이의 전적인 자기 증여, 곧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 주는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움직임 자체가 사랑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를 따라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이에게 개방하고 내어 주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덕의 삶이고 완덕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식은 이러한 하느님 중심, 이웃 사랑, 자기 개방, 내어 줌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평화(요한 14,27 참조)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미니멀 라이프 운동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단순히 주변 사물을 정리하여 홀가분함과 개인적인 만족감을 누리려는 것에 그친다면, 이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는 여전히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자기중심적 삶의 모습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제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로서 적은 짐만 지니고 살고 싶은 제 바람이, 그럼으로써 가난하게 사는 훌륭한 사제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잘 살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으려는 이유라면, 그 또한 여전히 제 중심으로만 사는 얕은 차원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제 자신이 중심이 되는 모습인 것이죠.

 

 

담백한 공간 안에 채울 것들

 

미니멀 라이프! 자기 자신을 위해 공간의 단순함이나 삶의 여유를 찾는 운동으로 시작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넓어진 공간, 담백한 공간 안에서 내적 여유를 찾고, 삶의 복잡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평온함을 즐겨 보세요. 그리고 그런 평온함을 어느 정도 찾았다 싶을 때, 그 공간을 더 가치있는 것, 더 중요한 것으로 채워 보세요. 더는 물질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사물이 주는 뿌듯함이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채우려는 것은 삶의 진정한 의미, 근본적인 가치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나 자신만 바라보고 있으면 이러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만 집중된 시선은 굉장히 좁거든요. 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이웃과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 민범식 안토니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영성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영성 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민범식 안토니오]



1,3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