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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목] 난민의 여정에 함께합시다 (1) 국내에 들어온 난민들, 어떻게 살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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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0 ㅣ No.1081

[난민의 여정에 함께합시다] (1) 국내에 들어온 난민들, 어떻게 살아가나?


희망 찾아 사선 넘었는데 ‘난민 인정’ 바늘귀 통과보다 힘들어

 

 

2017년 10월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근처 난민 캠프에서 어린 로힝야 소년이 동생을 안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방글라데시 사목방문 중 로힝야족 난민을 만나 위로하면서 박해한 이들을 대신해 용서를 구한 바 있다. [CNS 자료사진]

 

 

이주는 ‘시대의 징표’다. 물론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신앙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으로 되돌아간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아브라함은 떠난다.(창세 12,1)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오늘도 난민은 계속 늘고, 교회에서도 꾸준히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 카리타스는 지난해 9월 27일 ‘난민의 여정에 함께 합시다(Share the Journey)’를 주제로 글로벌 난민 캠페인을 선포하고 2018년부터 2년간 지구촌 기아 퇴치 캠페인의 하나로 ‘인류는 한 가족, 난민의 여정에 함께합시다’ 캠페인에 들어갔다.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도 이에 발맞춰 난민과 함께하고 있다. 이에 2018년 사순시기를 맞으며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ㆍ이주사목위원회 공동 기획으로 국내에 들어온 난민과 이주민들의 실태와 현황, 과제와 전망을 네 차례에 걸쳐 살핀다.

 

 

중국 동북지방 출신 허양(44)ㆍ허위에(42, 가명)씨 부부가 국내에 들어온 건 2014년이다. 남편이 그해 2월에 큰딸과 함께 들어왔고, 부인은 6개월 뒤 둘째 아들을 데리고 임신한 채 들어왔다. 비자 발급이 없는 제주도를 통해서였다. 유복하지는 않지만 따뜻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던 이들 부부는 왜 한국으로 향해야 했을까? 산아 제한 때문이었다. 한족이어서 1명만 낳을 수 있는데, 호적에 올리지 못한 둘째에 이어 셋째까지 임신하게 되자 고향을 떠났다. 낙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에 살 때 저희는 불교 집안이었어요. 교리상 살생은 용납되지 않았지요. 제 신앙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국내에 들어와선 난민 쉼터인 피난처, 난민인권센터인 난센(NANCEN), 인천 외국인지원센터 등을 거치며 세 자녀를 더 낳아 3남 2녀가 됐다. 부부와 첫째만 중국 국적자이고, 네 아이는 무국적자다. 남편은 건설현장에서 막노동하며 식구를 부양했다. 아이들은 ‘모든 이주 노동자 및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UN 조약’ 등에 따라 공부를 할 수는 있지만, 학력은 인정 받지 못한다. 난민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하고 G1 비자만 받았다. 병원에서 치료 중이거나 산재 피해, 소송 등 미해결 사유가 생겼을 때 발급해주는 ‘인도적 체류’ 비자다.

 

부인 허위에씨는 “아이들만 보면 행복하지만, 현실과 마주해야 할 때는 정말 힘들다”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결국은 한국 정부에서 난민 인정도 받고 아이들도 제대로 교육받고 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산다”고 말했다.

 

2016년 11월에 문을 연 (사)서울가톨릭이주난민센터(대표이사 유경촌 주교)의 도움을 받는 가정은 이들뿐이 아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의 법률적 지원을 받아 소송을 진행하던 콩고의 한 가족도 가톨릭이주난민센터의 지원을 받았다. 음악인인 가장이 반정부 곡을 작곡했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출해 국내에 들어온 사례다. 난민 신청을 했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울가톨릭이주난민센터는 전문 변호인력이 없어 법률 지원은 못 하고 난민 신청 가구 중 3가구에 대한 긴급 생계 지원만 하고 있다. 난민사목이 그만큼 까다롭고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주난민 여성 쉼터나 지역아동센터(공부방)를 통한 간접 지원에 주력해야 했다.

 

난민인권센터의 난민 통계에 따르면, 1994년 이후 2016년까지 23년간 난민 신청자 수는 2만 2792명, 이 가운데 678명(2.97%)만이 난민 인정을 받았다. 해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인도적 지위자도 1173명에 이른다. 나머지 1만 1565명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 심사가 진행 중인 난민 신청자 수는 6861명으로, 1차 심사는 3715명, 이의신청(2차 심사)은 3146명이 받고 있다. 2016년 한 해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모두 98명으로, 난민 인정률은 0.8%밖에 안 된다. 미얀마 출신이 41명으로 가장 많고, 에티오피아 12명, 방글라데시 9명, 파키스탄 6명, 예멘ㆍ우간다ㆍ이집트 4명, 카자흐스탄이 3명, 기타 15명 등이다. 난민 신청의 진정성이나 주장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추방당하는 경우가 많다. 4대보험 적용은 꿈도 못 꾸고 의료나 교육, 주거 등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인간다운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이주노동자상담실 김수정(루치아) 간사는 “우리나라는 국경이 개방된 유럽이나 다른 민족과 같이 사는 경험이 많은 미국 같은 나라와는 달리 난민을 받아들일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 가치관을 지키고자 더 나은 삶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을 한 난민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은 교회의 본질적 소명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11일, 글·사진=오세택 기자]

 

 

[난민의 여정에 함께합시다] (사)서울가톨릭이주난민센터 사무국장 김평안 신부


이주 난민에 성당 문 열고 함께 살아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난민은 시혜 대상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사)서울가톨릭이주난민센터 사무국장 김평안(살레시오회,사진) 신부는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한다’거나 ‘사회 통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다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다가도 막상 이주난민이 곁에 있으면 함께하지 못한다”면서 “그것이 난민사목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난민사목은 이주노동자나 결혼 이주여성과는 달리 확실한 정보를 알 길이 없다”면서 “난민 신청에 진정성이 있는지, 그 주장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그렇지만 “이주여성 쉼터나 이주 배경 자녀들을 위한 지역아동센터를 통해 난민사목에 접근하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이주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잘 정착하도록 돕고, 훗날 문제가 해결되면 본국으로 돌아가 잘 살도록 하는 데 사목의 중점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김 신부는 “이주민 난민과의 진정한 연대는 국가별 이주민 공동체가 지역 교회 안에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사례로 1996년께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혜화동본당 공동체에 공문을 보내 필리핀 공동체에 성당 문을 열고 공식 개방케 한 것을 상기하고, “하지만 그 이후로는 서울대교구나 대구대교구, 수원교구의 몇몇 성당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당 문을 열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김 신부는 “서울가톨릭이주난민센터는 이주민에 대한 인식 개선과 함께 이주민 난민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열어주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지향을 두고 활동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1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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