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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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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5 ㅣ No.940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

 

 

현직 교구장의 체포

 

1974년 7월 6일,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사라졌다. 지 주교는 4월 20일에 출국하여, 4월 22일부터 27일까지 대만에서 개최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창립총회에 참석했고, 필리핀과 독일, 오스트리아, 로마에서 일을 본 뒤 일본을 통해 귀국하던 길이었다.

 

소식을 들은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7월 8일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에서 김 추기경을 찾아와 지 주교를 자신들이 연행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지학순 주교를 체포한 것은 4월 3일에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말미암아, 10월부터 대학생을 중심으로 반유신 체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을 규탄하면서 ‘개헌 청원 서명 운동’까지 시작되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 조치 1·2호를 공포하여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위반자를 처벌하려고 비상 군법 회의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신 체제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대 운동은 계속되었다. 1974년 신학기에는 전국의 대학들이 연대해서 시위할 계획도 세웠다. 그에 따라 1974년 4월 3일 오전,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학교를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민청학련 명의의 인쇄물 ‘민중·민족·민주 선언’, ‘민중의 소리’,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도 거리에 뿌려졌다.

 

유신 체제에 대한 각계의 반대에 직면해 있던 박정희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이용하여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가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4월 3일의 시위를 ‘시민 폭동을 유발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勞農)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 변란 기도’로 몰아갔다. 그 결과 같은 날 밤 10시에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하여, 민청학련과 관계된 모든 행위를 금지했고, 이 조치를 위반할 경우 사형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지하 시인이 지목되었다. 그리고 김지하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긴급 조치 위반 혐의’로 지학순 주교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김지하는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 이들의 활동 자금을 북한에서 유입된 공작금으로 몰아가자, 그 돈이 지학순 주교가 준 것임을 밝히며 민청학련이 북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지학순 주교도 자신이 한국으로 가서 사실을 밝혀야만 관련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그리고 사회 운동가 장일순도 같은 이유에서 귀국 직전 일본에 머무르던 지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한 일을 밝히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7월 6일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지학순 주교는 8일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일 김 추기경은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지학순 주교의 연행에 관하여’라는 사건 경위 진술서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에서는 같은 날 김 추기경에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추기경은 오후 7시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10시께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가서 지 주교와 함께 명동성당으로 왔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의 주거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으로 제한되었다. 그 뒤 동생 지학삼의 후암동 집으로 옮겼다가 신병인 당뇨병 때문에 명동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에 입원하였다.

 

지 주교는 7월 15일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곧, 김지하에게 준 돈은 민주화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지 결코 정부 전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다음 날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하여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로 7월 23일 오전까지 비상 군법 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아침,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면서 내외신 기자와 원주에서 올라온 교우들 앞에서 ‘양심선언’을 하였다.

 

이 양심선언은 5개 항으로 되어 있는데, 제1항에서는 이렇게 밝히며 유신 체제를 부정하였다. “유신 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 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양심선언을 마친 지학순 주교는 명동성당으로 가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미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강론을 통해 양심선언의 내용을 재차 밝힌 뒤 12시 10분께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지 주교는 8월 12일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 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이 되었다. 지 주교는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75년 2월 17일에 석방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

 

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천주교의 고위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교회 안팎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도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구속을 계기로 출범하였다. 사제단은 1974년 9월 23일에 사제단의 명칭을 ‘정의구현’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민주 회복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제1차 시국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사제단은 11월 4일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 1,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정희 정권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공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비판한 제2차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75년 2월 6일에 열린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는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제3차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지학순 주교가 석방된 이후에도 사제단은 유신 체제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1980년대에도 이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사제단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 조직이 되었고, 한국 가톨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공헌했다.

 

함세웅 신부는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사제들이 이웃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했고, 세상 한복판에서 교회의 소명을 깨닫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지 주교의 구속은 한국 교회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여는 순간이었다.

 

 

‘빛이 되어라’, ‘정의가 강물처럼’

 

지학순 주교의 저서에는 1983년에 간행된 강론집 「정의가 강물처럼」과 선종(1993년)이후인 1995년에 간행된 「빛이 되어라」 등이 있다. ‘빛이 되어라’는 1965년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내건 사목 표어였다.

 

지학순 주교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의 빛이 되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과 부조리한 곳, 고통받는 곳을 비추었고, 사람들이 또 다른 빛이 되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지 주교는 강론과 글을 통해 ‘정의’를 자주 강조했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지학순 주교는 거짓된 정의가 숨 쉬는 시대가 아니라, 참다운 정의가 스민 새로운 시대를 원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정의의 수호자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싱거워진 소금과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학순 주교는 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무엇보다도 정의와 사랑, 양심을 소중히 여겼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였다. 지 주교의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지학순 정의평화상’을 통해 새로운 빛을 찾아 세상을 밝히고 있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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