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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원로 사목자를 찾아서2: 최창화 몬시뇰(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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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31 ㅣ No.1047

[원로 사목자를 찾아서] (2) 최창화 몬시뇰(서울대교구)


사제, 하느님 사업 쉬어선 안 돼… 어르신 위한 사목하고 싶어

 

 

- 서울 선릉로 김성학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최창화 몬시뇰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래와 어르신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일생을 검고 긴 수단 밑에서 성의를 맵시 있는 양복으로 아시고, 매일 미사 지내심을 천주님의 뜻으로 아시고, 또 기쁜 마음으로 길 잃은 양들을 인도하소서. 그리고 마음이 썩고 가난한 죄인들을 애인과 같이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고, 길을 모르는 불쌍한 무리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포옹을 해 주소서.”

 

1971년 12월 사제 수품 때 서울대교구 오류동본당 신자들이 쓴 축하 글이다. 서울대교구 원로 사목자 최창화(토마스 아퀴나스, 74) 몬시뇰은 사제가 된 후 신자들로부터 받은 첫 편지 속의 염원을 지금까지 마음 깊이 새기며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2014년 2월 서울대교구 특수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직을 사임하고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최 몬시뇰은 순교자 현양 사업과 아시아 본토인 사제 양성을 통한 복음화 사업,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남북한 교류와 인도주의 대북 지원 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 착한 목자요 주님의 충실한 종이다.

 

최 몬시뇰은 1943년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출생해 1971년 사제품을 받았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수품 동기다. 서울대교구 돈암동ㆍ청량리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구파발ㆍ응암동ㆍ개봉동 주임을 지냈다. 1987년 가톨릭중앙의료원 원목실장 겸 강남성모병원 원목으로 처음 특수 사목을 시작한 그는 영국 연수를 마친 후 돈암동ㆍ천호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이 시절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총무를 겸임한 그는 새천년기가 시작하기 전인 1999년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으로 임명돼 7년간 재임하면서 서울대교구 시노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3년 8월 몬시뇰로 서임된 그는 2006년부터 2014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중서울지역과 특수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로 일하면서 민족화해위원회와 직장 사목, 일반병원 사목, 경찰 사목, 순교자현양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요즘 최 몬시뇰은 “고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면서 “기회가 있다면 또래 은퇴자들과 어르신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싶다”는 열정을 드러냈다.

 

특수 사목 사제와 원로 사목자를 위한 숙소인 서울 선릉로 김성학관과 경기도 용문 집을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는 최창화 몬시뇰을 만났다.

 

- 2006년 4월 최창화 몬시뇰을 비롯한 서울 민화위 방북단이 대북 지원 사업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근황이 궁금하다. 

 

“고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매일 미사와 기도로 일과를 시작해 성경 묵상, 클래식 기타ㆍ아코디언 독학, 영어 공부, 텃밭 가꾸기 등으로 소일을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깨며 팔다리며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해, 한 달에 4번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간다. 찾아오는 이들도 없어 은수자처럼 살고 있다. 특별히 감사 기도를 많이 한다. 하느님과 신앙을 전해 준 선조들에게, 부모에게, 교회와 은인들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바친다. 또 함께 교회 안에서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사제들과 교우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젠 사목과 같은 공적인 일과는 확연히 멀어진 것 같다.”

 

 

▶ 갑자기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셨다.

 

“개인적으로 교구장 대리 자리가 아니더라도 2016년 병인 순교 150주년까지 일하고 싶었다. 2013년 12월 말 서울대교구에 젊은 두 분의 주교가 탄생했다. 경사요 축복이었다. 그때 피정 중이었는데 새 주교들이 사목을 잘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교로서 첫 출발점에 있는 두 분께 내가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선에서 물러나는게 도리라고 결심했다. 아쉬움도 컸다. 무엇보다 전혀 준비가 안 되었기에 스스로 결정하고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방황도 많이 했다.”

 

사람이 그리워서인지 최 몬시뇰은 된더위에도 밖에 나와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맺힌 걸로 봐서 한참을 나와 있었던 것 같았다.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찬 생수를 권하면서 서소문성지 조성사업을 걱정했다. 최 몬시뇰은 최기복 신부와 함께 서소문역사공원과 순교성지 조성 사업이 내년에 완공되면 한국 천주교의 과거 오늘 미래를 작품화한 나전칠화 작품을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을 만큼 아직도 순교자 현양 사업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다.

 

2009년 여의도광장에서 봉헌된 순교자 현양위 25주년 기념 미사에서 최창화 몬시뇰.

 

 

▶ 꺼져 가던 순교 신심에 불을 지피고 순교자 현양 사업도 활성화하는 큰일을 하셨는데. 

 

“2003년 몬시뇰에 서임된 직후 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순교자를 본받기 위해 순교자 현양 미사, 기도, 성지순례, 성지 안내 봉사자 양성 등 많은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보람된 게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서울 여의도에 103위 시성 기념비와 광화문 광장에 124위 시복 기념 표석을 설치한 일이다. 103위 시성 기념비를 세울 때는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큰 도움을 준 여규태 전 한국평협 회장께 감사드린다. 또 2013년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길인 말씀ㆍ생명ㆍ일치의 세 길을 조성해 염 추기경께서 선포한 일이다. 무엇보다 보람있는 것은 김대건 성인 기념 사업회를 창립해 아시아 본토인 사제를 양성해 복음 선교의 길을 초석을 마련한 일이다.”

 

 

▶ 김대건 성인 기념 사업회에 사재를 내놓을 만큼 애정이 컸던 걸로 알고 있다.

 

“원래 이 일은 1997년 배갑진 신부가 ‘김대건 성인 장학회’를 창립하면서 시작됐다. 정진석 추기경이 먼저 사재를 털어 장학기금을 내놓으면서 종잣돈이 돼 2008년 김대건 성인 기념 사업회로 새롭게 출범했다. 개인적으로 이 사업회를 위해 선친의 조의금 전액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 국제신학교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중국, 베트남, 스리랑카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5명의 사제를 배출했고 현재 4명의 신학생이 공부 중이다. 이들이 한국 교회를 얼마나 이해하고 협조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아시아 선교를 위해 본토인 사제를 양성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최 몬시뇰은 1995년부터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장으로 퇴임 때까지 20년 가까이 일했다. 민족화해센터를 짓고 다섯 차례 북한을 방문해 다양한 대북 지원 사업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했다.

 

 

▶ 만 19년을 우리 민족을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셨다.

 

“소임을 맡았을 때 북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였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을 해소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옥수수와 밀가루, 영양제, 약품 등을 지원했다. 문제는 북한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통일 이전이라도 이산가족끼리 왕래가 정례화 됐으면 좋겠다. 서신 왕래만이라도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리고 민간 교류와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은 중단되어선 안 된다. 새 정부가 남북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잘하는 것이다.”

 

 

▶ 남북 교류가 중단된 상태이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우리 민족을 위해 또 통일을 위해 더 많은 기도와 지원이 필요하다. 다시 통일의 붐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민화위 활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탈북자들을 교회 내 통일 일꾼으로 양성해 그들을 중심으로 기도 운동과 민화위 홍보 사업, 대북 지원 사업을 펼치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듯하다. 탈북자들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신앙과 열정으로 고향과 조국에 대한 평화 운동을 펼칠 것이다.”

 

그는 46년 사제 생활 동안 절반씩 본당 사목자와 특수 사목자로 살았다.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를 비롯한 아들 신부만도 10명이나 된다. 사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맏형 최창정(요아킴, 1937~1984) 신부에게 배웠다.

 

 

▶ 본당과 특수 사목 분야를 각각 20년 넘게 고루 해 보셨다.

 

“1999년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께서 교구 사무처장으로 와서 일하라 했다. 그때 나를 ‘밀레니엄 사무처장’이라고 불렀다. 6년간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영적으로나 외적으로 많이 성장했다. 본당과 특수 사목 분야의 한정된 시야에서 벗어나 교구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지게 됐다. 2000년 대희년을 지내고 교구장을 보필해 교구 시노드를 진행했다. 의정부교구도 독립시키고 생명 운동 등을 추진하면서 사제는 뭐든지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 맏형인 고(故) 최창정 신부가 큰 버팀목이었다고 들었다.

 

“형님은 늘 좋은 사제가 되라고 조언을 해 줬다. 그때는 잔소리 같았는데 돌아가신 후 내게 아무도 충고해 주는 사람이 없다. 미사 중에 형님을 위해 많이 기도한다. 나보다 10년 앞서 1961년 사제품을 받은 형님은 1965년 군종신부로 파월했다가 고엽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늘 기침을 하고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그런데도 독일의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 선원들을 위해 자원해 함부르크 교포 사목을 떠났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벗이 됐다. 1984년 방한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강복을 받은 후 선종했다.”

 

 

▶ 후배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사제 생활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같다. 좋은 날이 있으면 흐리고 폭풍우가 오는 날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힘들 때마다 속상해 하지 말고 웃어라. 많이 웃을수록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잔걱정은 필요 없다. 걱정을 끊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라. 매일 하느님께 사제로 잘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사는 게 중요하다. 50년 가까이 사제로 살다 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요 도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매사에 감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목하길 바란다.”

 

 

▶사제로서 하고 싶은 공적인 일이 있다면

 

“우리 또래와 어르신들을 위해 사목하고 싶다. 한국 교회가 당면한 과제 중 하나가 노인사목과 원로 사목자 문제다. 매해 수십 명의 원로 사목자들이 나올 텐데 교구가 그들의 숙소조차 모두 보장해 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젊은 사제들이 노인 사목을 효과 있게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원로 사제들을 본당 사제들과 협력해 노인사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교구에서 마련해 줬으면 한다. 원로 사목자들이 본당 일에 간섭하지 않는 장치만 마련한다면 큰 문제가 안 될 듯하다. 특수 사목은 많은 부분에서 교구 지원을 직접 받아야 한다. 그래서 본당을 활성화해야 한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업을 쉬어선 안 된다. 그 나이에 맞춰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3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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