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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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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6 ㅣ No.1040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체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여정을 다루기 위해 먼저 신비(mistica)의 개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정의와 특성들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신비 체험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요소인, 관상(contemplazione)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고찰해 볼 것이다.

 

그 후, 변화의 일치(unione trasformante)에 이르기 위한 그의 내적 여정을 묘사하고 있는, 콜베의 글들과 그의 모습과 메시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서 이 폴란드 성인의 생애에 담긴 영성의 두 가지 주요한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신비의 장(場)에서 위대한 거장인 교회 학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와 콜베의 신비를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정점인 신비

 

신비라는 용어는 인간이 직접 하느님 앞에 있는 것처럼, 즉 인간 지성과 그로부터 생겨난 범주(categorie)의 중재 없이 살아가는 체험을 말한다. 그렇기에, 그가 지닌 특별한 이해를 바탕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에 대한 신비와 사랑의 친교를 다룬다. 반면에, 인간의 모든 체험이 성령의 은사의 일상적인 영향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하고자 할 때에는 신비 생활이라고 말한다 :

 

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향한 사랑의 완성의 결과인 삶의 참되고 고유한 양식과 일치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어주신 사랑에 자신의 존재로 응답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의 결과로써 이러한 생활양식에 도달한다. 그분의 인도로 ‘신비가’들은 매혹되고, 그분의 은총으로 조명되어,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는 그분과의 보다 더 깊은, 보다 더 변화되는 일치를 추구하도록 자극한다.

 

그리스도교 신비 안에서, 신학적 탐구와 묵상에 의한 지식을 넘어서는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신비 그리고 무한한 초월에 대한 믿는 이의 깨달음이 실현된다. 거룩한 신비들은 비록 결코 철저하고 완벽한 방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적이고 친밀한 방법을 통해 맛보게 된다. 믿는 이는 신앙이 그에게 부과하는 경계 안에서 행동한다. 신비가는 중재 없이, 직접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다. 반면에, 하느님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는, 관념의 중재를 통해 그에게 주어진다 :

 

그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보다 깊은 이해를 가졌다. 성령의 특별한 활동 아래 수동성을 지닌 영혼에 선천적인 체험이 존재한다. 하느님 스스로 사람 안에, 그와 신적 현존을 인식하기 위한 능력을 받은 이성과 하나 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를 통하여, 하나의 특별한 목표를 심어주신다.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주도하지 않고, 논증이나 모상들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과의 결합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인 수단으로 의지, 감각, 상상에 의해 중재된 체험을 사용한다. 창조주의 현존은 본질적으로 정신 활동으로 인지하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중재 없는 체험 안에서 인간은 그분의 현존을 깨닫는다. 한 사람이나 사물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이를 직접 인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믿는 이는 하느님에 대한 중재된 체험을 통하여 즉 간접적으로, 자신의 영혼 안에 새겨진 이러한 현존에 의해 야기된 결과들로 드러난 그분을 알게 된다. 이는 인간의 범주들에 의해 중재되지 않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친밀함이다 :

 

신비가는 하느님의 실재와 신비와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은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모상, 묵상, 논증의 중재 없이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에게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해주고 영속적이고 변화시키며 하나 되는 사랑을 제안하는 하느님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 신비는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이고 은총의 질서 안에서 발전한다. 그러므로 신비는 하느님을 찾고 예수의 생생한 인격과의 끊임없는 만남을 추구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또한 신비는 지속적인 회개의 여정, 특별한 사명, 하느님 말씀의 청취 가능성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철저한 고립 안에서 직접 목적으로 이끄는 교회를 위한 특별한 봉사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 대한 신앙의 성서적 체험에 대한 응답인 신앙 체험이다. 참된 신비는 근본적으로 일치의 특성, 봉사에 대한 전체 가능성, 충만한 증여의 의지, 고유한 익명성,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완벽한 투명성에 의존한다.

 

하느님의 존재는 계시나 환시를 통해 신비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물질적이고, 관념적이며, 순수하게 영적인 것일 수 있다. 외부 감각을 통해 느끼게 된다면 이는 물질적인 것이다 :

 

이 경우, 시각(환시)과 말 또는 소리(환청)가 언급된다. 꿈과 같은 경우처럼, 환상을 통해 인간에게 도달한다면 이는 관념적인 것이다. 영혼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지하게 된다면 신비적인 현상들은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가운데 수난 사건 동안 예수에게 가해진 상처들의 흔적(인간의 육체에 나타나는 오상)이 있다.

 

여기서 교회의 오랜 영성적 전통이 지니는 요소들과 인간의 학문이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의 안내에 관련된 현상의 진정성을 조심스레 평가한다. 무엇보다도, 신비 생활의 본질은 위에 언급한 현상들의 반복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의 보다 더 깊은 일치로 인간을 이끄는 하느님을 향한 점진적으로 보다 완전한 사랑 안에 그리고 하나 되고 변화되는 그분의 활동에 대한 완전한 의탁함 안에 머무는 것이다.

 

신비 체험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 내적이고 초월적인 하느님의 현존, 신비가가 지니는 명확성과 객관성의 감각, 체험의 무상성, 수동성 또는 수용적인 활동, 상징적인 언어와 형언불가능성(ineffabilita).

 

내적이고 초월적인 하느님의 현존은, 직접적이고 중재 없이, 믿는 이를 향한 자신과 자신의 신비들에 대한 계시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비가는 명확성과 객관성의 감각을 통해 신적 현존을 인식한다: 하느님은 존재하고 이는 객관적으로 이해되는 하나의 실재이다. 성령은 특별한 은총으로 인간에게 이러한 신적 현현을 받아들이고 일치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신비 체험은 하느님 무상의 선물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여기서 심리학적이 아니라 신학적인 수동성의 상태에 대해 언급한다. 전 체험을 준비하거나 예상하는 것들 없이 무상으로 신비가에게 계시된다. 그는 활동적이거나 수용적인 수동성의 상태에 머문다. 하느님은 자신의 현현을 알리고 일깨우기 위해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신비가는 오직 신적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만남의 동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부름받았다. 그는 점진적으로 보다 단순하고 보다 깊은 하느님 체험에 머무른다. 즉 모상들(반영들 또는 관념들의 중재 없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활동)에 순종적으로 점유된 상태로 남는다.

 

이는 인간의 신비적 상승의 가장 높은 단계를 의미하는 변화의 일치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믿는 이는, 모든 메마름과 부주의를 극복한 다음, 비할 데 없는 평화에 자신을 바친 그의 전 존재 안에서 인격을 지닌 하느님의 현존을 충만하게 지속적으로 즐긴다. 이 모든 것은 믿는 이에게 덕행의 실천 안에서 커다란 항구함, 확고함과 탁월함을 허락한다.

 

신비 체험의 또 다른 특징은 형언불가능성이다. 인간은 신비를 표현하는데 서투르다. 그는 초월자와 만나고 그의 능력들은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하도록 이끄는 만큼, 관념들을 통하여 이 체험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상징들만이 신비가가 신적 신비와의 결합을 체험한 것을(비록 여전히 형언하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이러한 특징들은 교회와 다른 종교적 행위들의 역사 안에서 많은 신비가들의 체험과 생애 안에서 인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신비가의 체험을 특징 지우는 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신학자들에 의해 분류된 것과 비교하여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비 여정에서 수덕(ascesi)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의 준비 단계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지극히 높으신 분과의 만남에서 벗어나도록 그를 방해하는 모든 올가미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도록 요청받는다.

 

일종의 고행인 이것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신비가의 버림(spoliazione)은 능동적인 측면과 수동적인 측면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함으로써 피조물들에 집착하지 않고 부단히 덕을 실천하기 위해 정진하는 한편, 차츰차츰 보다 더 겸손해지는 하느님의 활동에 보다 더 수용적이 된다. 그러므로 신비 체험의 기초에서 발견되는 포기와 절제의 참되고 고유한 여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렇게 믿는 이는 자신의 실존 안에서 창조주의 활동에 더 열려있게 된다. 이는 은총의 효과로 예민하고 영적인 그의 능력이 최대로 눈에 띄는 항복을 얻을 때까지 세속적인 유혹과 피조물들의 다양한 영향으로부터 정화를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 체험들은 그리스도교 수덕의 마지막 부분을 구성하고, 주님에 의해 허락된 특별한 은총을 얻는 곳에서 믿는 이에 의해 실현되는 중요한 여정의 정점이다.

 

고행과 투쟁의 이 여정은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일치를 실현하고 하느님의 의지에 인간의 의지를 합치시키기 위한 기초로 나타난다. 인간은 창조주와의 강력한 일치를 실현시키는 능력을 회복하고 강화시킨다. 신비 체험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이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체험과 관련하여 앞서 고려될 수 있는 기도와 보속의 여정을 통하여 이에 도달한다. 신비 생활은 창조주와의 친교와 회개의 생활 양식의 훈련을 전제로 한다. 신적 신비들에 대한 묵상에서 출발하여 세상 것들에 대한 포기를 거쳐 지극히 높으신 분의 현존이 주는 고요와 평화에 도달함으로써 마무리되는 하느님 안에서의 점진적인 머무름을 실현한다.

 

* 라파엘 디 무로(Raffaele Di Muro)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로마 세라피쿰 국제 신학대학 교수

* 역 : 한규희 보나벤투라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모기사, 2017년 2월호, 라파엘 디 무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체험

 

 

신비의 필수조건으로서의 관상

그리스도교 영역에서, 관상은 믿음을 통한 인식의 최고 형태(la forma superiore di conoscenza per fede)를 의미한다 : 모든 덕을 살아가는 의인에 의한 사랑의 영향 아래 믿음을 통해 성취되고 계시 안에 담겨진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놀람과 감탄으로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관상하다(contemplare)라는 단어는 다음의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 cum과 templum. 라틴어인 cum은 이탈리아어 con에 해당하는 단어이며, 협동(simultaneita)과 동시대성(contemporaneita), 공유(comunanza)와 일치(unione)를 의미한다. templum은 신에게 봉헌된 성전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천상 공간, 하늘의 일부분을 뜻한다. 두 단어는 합쳐져서, 이 천상 공간 혹은 성전에 거주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관상이란, 신앙에 의해 조명되고 보다 더 깊고 명백한 방법으로 신적 실재를 이해하는 이성의 활동이다: 여기에서 이성적인 능력의 활용을 통해 깊이 있게 거룩한 신비들을 탐구하고자 하는 묵상에 중요한 역할이 부여된다. 이는 성령의 영향 아래서 자신의 의지의 결단과 추진을 거친 인간의 감정적인 능력과 지적인 능력을 포함하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활동에 대해 다루고, 자신의 근원과 원천인 주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처럼 전 존재를 인지하도록 그 활동을 돕는다.

관상한다는 것은 신비 체험의 핵심 부분이다. 이는 양도할 수 없는 필수조건을 구성하는 기초로써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활동은 믿는 이의 신학적 덕들을 강화시키고, 악덕들과 세속적인 집착에서 정화시키며, 그들이 하느님의 신비 체험에 대한 준비를 할 때까지 신적 신비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함양시킨다. 관상이란 본질적으로 거룩한 신비를 보다 잘 이해하고 이들로 인하여 변화하도록 고유한 지적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자극하는 것과 변화의 일치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현존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의 목적은 하느님 그 자체, 삼위일체의 신비와 인류를 향한 그분 사랑의 실재이다. 관상은 삼위일체적 차원을 지니는데, 이는 성령에 의해 고양되고 성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자비에 대한 보다 더 큰 인식에 다다르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자의 생애는 묵상의 주제가 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느님 아들의 덕들을 실천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을 회개시키기 위한 조건 안에서 찾고자 하는 믿는 이들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점이 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관상 안에는 실천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믿는 이의 영적 체험 안에는 늘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고, 기본적으로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상이란 신비 생활 쪽으로 방향 지우고, 하느님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의 점진적인 여정을 체험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신적 활동에 적합하고 수용적이 되기 위하여 감각, 지성, 그리고 영혼의 정화를 통하여 이 일치의 관계를 준비하도록 초대되었다.

하느님은 믿는 이가 그분을 향해 달리도록, 그분에 의해 인도되도록, 이 영광스러운 포옹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자신의 힘을 다하도록 부른다. 그 후, 신비가는 결국 덕들의 실천 안에서, 은총에 의해 유지되고, 점점 그분의 현존에 깊이 만족할 때까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변화시키는 활동과 사랑에 완전히 의탁하게 된다.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활동으로 옮겨진다. 하느님에게 다가감과 그분의 현존에 대한 체험은 자신이 행한 일들을 통하여 이 체험의 기쁨을 전하도록 믿는 이를 자극한다. 관상으로부터 믿는 이의 활동과 증언이 솟아난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 안에서 관상과 활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일성이 존재한다. 관상이란 어둠 속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것 그리고 사도적 삶 안에서, 거룩한 신비와 연결되는 체험을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사도직에서 드러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는 인간의 사랑은 이중적 방향을 지닌다 : 지극히 높으신 분과 형제자매를 향하여. 믿는 이는 창조주를 향하여 중재 없이, 직접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체험하고, 이웃을 향하여 효과적이고, 실재적인 방법으로 그 사랑을 실천한다. 관상 생활은 믿는 이 안에서 덕들을 실천하는 능력을 증가시킨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수평적으로 모든 형제자매에게 확장된다. [성모기사, 2017년 3월호, 라파엘 디 무로, 한규희 역]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체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관상

성 막시밀리아노에 따르면 관상이란 원죄 없으신 잉태에 맡겨지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선물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이고 모든 여인 중에 복되신 마리아를 향해 항구히 시선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폴란드 성인의 이러한 차원들 안에서 그의 사상과 성찰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기도의 본질적인 자양분은 다음의 것들이다: 그의 관상 생활의 핵심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신비. 인류와 성인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 활동 안에서, 그는 근거로써 성경 안에 계시된 진리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성경적 사실을 주의 깊게 공부하면서, 성 막시밀리아노는 예수의 존재(SK 987 참조)와 그분과의 보다 더 깊은 일치에 이르는 은총의 활동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이는, 구원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점진적으로 밝혀나가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랑의 능력을 그분에게 봉헌하는 것에 대해 다룬다. 마리아는 주님과의 일치를 위한 활동에 있어 고유한 모범이다: 이것이 봉헌의 요점이다. 콜베 신부 안에서 관상이란 먼저 깊은 친교 - 모방의 관계를 통해, 영적으로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의 일치를 이룬 후, 그녀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폴란드인 순교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그녀를 본받음, 그녀에게 다가감, 그녀에게 가진 것을 봉헌함, 그녀가 됨, 이것이 바로 인간의 완전성의 정점입니다.(SK 1325)

우리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단일한 하나로 변화되고 결합하여야 합니다.(SK 1160)

관상이란 단지 원죄 없으신 잉태의 신비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 막시밀리아노의 사상과 영성에 따르면, 덕행들, 특히 성자와 일치를 이루는 성모님의 능력을 끊임없이 요청하고 충실히 본받도록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점진적으로 하느님과의 보다 더 완전한 일치로 이끈다. 이 여정에서 기도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에 따르면 :

기도란 아름다운 영혼의 표현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먼지에서 태어났고 죽은 뒤에는 먼지로 돌아갑니다. 모든 인간 활동 또한 어머니인 땅으로 돌아갑니다. 오직 기도 안에서 인간은 천국을 향한 마음을 고양시키고 우주의 창조주며, 만물의 제일원인(Causa prima)인 하느님과의 대화 안으로 들어갑니다.(SK 1208)

콜베 신부에게 있어 기도한다는 것은 창조주를 향해 오르는 것, 세상의 온갖 유혹과 장애, 인간과 그 주인이신 분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을 넘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말하는 것,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응답한다 : 이는 사랑의 대화의 시작이다. 기도란 하느님께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 막시밀리아노에게 있어 기도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찬미하는 동안 계속되는 애정어린 대화,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과 뜻을 듣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언제라도 믿는 이는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높으신 분께 열 수 있고 자신의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을 그분께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영적 여정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대화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뜻과, 온 마음을 다한 응답(fiat)을 요청하는 사랑의 계획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기도는 관상, 성화의 여정이고 지속적인 대화의 여정이며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도적 봉사의 여정이고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봉헌하는 여정을 위한 초석이다.

특히 동정 마리아를 기도하고 관상하는 것은 믿는 이에게 그분에 대한 보다 더 완전한 이해를 허락하는 것이고 그분의 덕행들을 배우고 실천하는 상태에 놓이게 해준다. 마리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이 세상에 알리고 증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며 여왕이 되기 때문이다.

거룩한 미사는 성 막시밀리아노의 관상에 있어 중요한 원천이다. 거룩한 희생제사는 그의 모든 활동과 일과의 기준점이다. 일에 앞서 여행, 순례, 병 중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자신의 삶의 중심인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큰 사랑과 조심으로 이를 준비하고 이에 참례한 이들은 그의 관상, 전념, 신심 그리고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에 감탄하였다.

거룩한 미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를 갖추는 것은 미사 집전에 준비되어 있기 위하여 자주 스스로에게 살아 숨 쉬는 거룩함을 불러일으키던, 성 막시밀리아노의 한결같은 관심거리였다. 성체성사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의 강이다 : 전례 안에서 순교로써 기억되는 친구, 원수, 가난한 이,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모든 이를 위해서 기도하게끔 해준다.

관상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생산적인 사도적 활동의 전조이다. 성 막시밀리아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全) 니에포칼라누프(Niepokalanow)의 가치는 배타적으로 오직 기도 생활에 달려있습니다.(SK 925)

모든 사도적 활동은, 매우 넓고 불모지와 마찬가지였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의 설립과 운영을 가능케 한 것처럼, 활동 중인 사람의 기도의 힘에 의존한다. 선교사의 용기와 직감은 사도적 활동의 탁월한 성공에 대한 주요한 원인인 기도와 관상의 효과를 통하여 둘째 단계에 들어선다. 콜베 신부의 모든 선교 활동은 그의 관상에서 유래한다 :

조금씩 그리스도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신비를 통찰하고 심화함으로써, 그의 사도직은 세상에 그가 관상한 바와 같이 그에게 만남과 체험을 허락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는 생생하고 강렬한 원의로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원죄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봉헌의 광범위한 확산에 대해 생각해보자 : 이는 인류와, 넘쳐 흐르고 억제할 수 없게 된, 그러므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전파되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관상의 결실이다. 폴란드인 성인의 사도적인 성공의 핵심은 정확히 관상적인 차원에 있다 : 그러나 이는 신비를 향한 참되고 고유한 ‘도약대’를 의미한다. [성모기사, 2017년 4월호, 라파엘 디 무로, 한규희 역]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체험

 

 

콜베 신부의 신비 여정

성 막시밀리아노는 유년기에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변화의 일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의 깊고 점진적인 친교의 여정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신비가이다. 콜베 신부는 순교를 앞두고 영적 성숙과 신비 생활의 정점에 도달한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특별히 어려운 시기, 나치 정권에 의해 야기된 위험들과 그의 일본 선교가 마무리될 때에 그의 신비 생활의 최고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는 신의 뜻에 대한 보다 더 확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동료수사들에게 깊은 평온함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기도 안에 잠긴다. 성인 안에서 거룩한 생활은 변화의 일치에 이르는 여정의 종착점에서 순교를 마주하도록 준비하는 모든 그의 노력 안에서 빛을 발한다. 이 시기에 동료수사들이 막시밀리아노 신부 안에서 완전한 성숙에 다다른 영성 생활의 표현인 형언할 수 없는 내적 평화를 깨닫는 것은 타당하다.

그들은 성인의 지상 여정에서의 마지막 순간에서 천국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있음을 듣는다. 그의 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 단계의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한 신비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 이는 직접적이고 중재 없는 신적 현존을 체험한 후가 아니라면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순교를 예견하고, 변화의 일치를 드러내는 말들이다.

콜베 신부와 함께 생활했던 동료수사들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의 설립과 온 세상에 성모님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한 성인의 모든 활동과 같은 초자연적 계시들에 공헌하였다. 앞서 언급한 현상들이 신비가로서의 성 막시밀리아노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긴 하지만, 명확하게 신비적 일치를 향한 그의 점진적인 여정을 강조해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폴란드 성인의 신비의 특수성은 하느님과의 변화의 일치와 이에 선행되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의 일치라는 사실에 있다.

성 막시밀리아노에 따르면 :

오직 성모님만이 모든 순간 우리 각자를 훈육하시고, 이끄시며, 예수님께서 그분 안에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 안에 사신 것처럼,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분이 사시도록, 그분 안에서 변화시키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도록 허락하면, 그분께서는 은총의 기적을 확실히 이루실 것입니다.(SK 556)

콜베 신부는 성모님의 덕들을 실천하고 무엇보다도 참된 성화와 그리스도와의 변화의 일치에 다다르는 데 필요한 모든 은총을 중재할 수 있는 그분께 의탁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님 안에서의 변화로 초대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마리아의 모범에 의해 조명되고 인도된 신비적 일치를 향한 점진적인 여정을 말한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봉헌은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봉헌한다는 것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모범과 보호에 인도되도록 허락함으로써, 예수님과 보다 더 깊은 일치를 향한 점진적인 영적 여정을 참되게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신비는 동정녀의 중재를 인정하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중재로부터 비롯되는 영적 은총들을 통한 조력 또한 인정한다. 성모님에게 충실한 존재 또는 그분께 봉헌된 존재는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소유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분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보다 깊은 사랑에로 인도하기까지 우리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SK 1210)

폴란드 순교자의 신비는 네 단계를 거쳐 성장하고 발전된다 :

1.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오롯이 봉헌하도록 부름 받음
2. 정화
3. 사도적, 영성적 성숙
4. 마리아적 신비의 일치

성 막시밀리아노는 자신에게 두 개의 관을 주는 짧은 마리아 발현을 체험한다 : 정결을 나타내는 흰 색의 관과 순교를 의미하는 붉은 색의 관. 이것이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소년 콜베에게 하느님의, 어머니의 제안을 큰 가능성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제시한 여정이다. 이 환시는 아직 참되고 고유한 신비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 첫 단계를 보여준다 :

여기서 동정녀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애정이 표현된다. 소년 라이문도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응답” 안에서 이미 마리아의 유효한 모방자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유효성은 신비체험에 이르기까지, 순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신비 체험의 특징적인 정화의 단계는 특별히 자코파네에서 결핵으로 인한 콜베 신부의 두 번에 걸친 입원 때에 일어난다.(1920년 8월 11일~1921년 4월 29일; 1926년 9월 18일~1927년 4월 13일) 치료를 위하여 그는 수도원 밖에 머물도록 강제되었다 : 젊고 전도유망한 사제는, 매우 어려운 시련의 순간을 보내야 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기 자신을 복음 선포를 위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봉헌하였지만 치료를 위하여 안정해야만 했다. 그는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이 고통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시기)는 성 막시밀리아노에게 있어 결정적인 순간이다 : 강제된 이 은둔의 시기 이후 폴란드 성인을 유명하게 만든 특별한 사도직이 만들어진다. 그는 특히 하느님의 최대 은총과 영혼의 구원, 그의 영육간의 고통의 봉헌에 대한 참된 감사를 목표로 하는 신적 의지에 의탁함으로써 십자가를 체험한다. 자코파네에서의 입원은 그의 생존에 대한 의구심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언론인으로 발전된 그의 사도직과 수도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의 원인이었다. 이는 위대한 미래와 쇠하지 않는 사도직의 개막 이후 하느님의 큰 선물들의 전조인 정화를 상징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유배이다.

“밤”의 단계 후에는 폴란드 순교자의 “격정적”이고 성숙한 사도직의 단계가 있다. 10년 동안 콜베 신부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의 설립, 일본에서의 선교, 그리고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온 세상에 전파하는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통하여 주목 받는다. 이 시기는 쉼 없는 기도로 유지되는 사도적인 중요한 의무의 시기이다. (또한) 사도로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동료 수사들과 믿는 이들을 거룩함에로 이끄는 신비의 전수자로서 성숙되는 시기이다. 거룩한 생활은 성인 안에서 끊임없이, 전적으로 발전하고 이는 그의 실존 안에서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매우 적합한 사도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화(神化) divinizzazione”의 과정은 성인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생명, 신적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성심을 통해서, 하지만 종종 다른 피조물의 가슴을 통해서도, 우리의 보잘것없는 가슴에 이 생명이 전해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생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 (루카 12,49).”(SK 503) 하느님의 의지는 거룩함, 사랑, 신화 divinizzazione 의 참된 본질이다.(SK 569)

콜베 신부의 사도적이고 영성적인 생활은 하느님의 의지에, 그분의 은총에, 원죄 없으신 잉태의 중재를 통해 부드럽고 순종적인 가슴 속에서 공간을 찾고자 하는 그분의 거룩한 활동에 계속적인 내어맡김이다. 그는 그를 “신화시키고(divinizza)”,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며, 성화시키고, 신비적 일치에 준비시키는 삼위일체에서 나온 영적인 선물들이 자신의 가슴 속에 흘러넘치도록 놔두었다. 이러한 활동의 비밀은 순명에 있다 : 이는 그를 정화시키는 덕이고 더욱이 원죄 없으신 잉태를 통하여 모든 일 안에서 그를 인도하는 하느님 안에서 무한한 믿음의 덕을 갖추도록 그에게 허락한다.

이러한 필수조건 덕분에 성 막시밀리아노는 신비적인 단계와 순교에 도달한다. [성모기사, 2017년 5월호, 라파엘 디 무로, 한규희 역]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신비 체험

 

 

성 막시밀리아노는 신비적인 단계와 순교에 도달한다. 그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 4년 동안에 마리아적인 신비의 일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의 일치에 도달한 뒤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로 인도된다. 성인을 영성적 완성의 단계를 향하여 안내하는 분은 성모님이다.

동정녀와 깊이 일치하여 산다는 것은 그에게 변화의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은총들을 얻는 것은 물론, 그녀를 모방의 변함없는 기준점으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 폴란드 순교자는 일치 후에 그녀와 함께 신비 체험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정점에 도달하는 신비 생활의 통로가 되는 마리아의 두 손 안에 전적으로 의탁한다.

이 단계의 결실들은, 시성 과정에서 증언하면서, 그의 죽음 이후 동료수사들이 정확히 언급하고 있듯이 체포와 추방의 위험에서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안에서 체험된 평온함과 주님에게서 직접 성인에게 주어진 천국에 대한 보증에서 나타난다. 성 막시밀리아노는 강제수용소에서뿐만 아니라, 죽음의 감방에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고 있다 :

큰 놀라움과 함께 그에게 치명적인 독약을 주사한 교도관들은 이러한 점을 거의 변모된 빛나는 모습에서 깨닫는다. 콜베 신부는 순교자일 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신비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과 위험한 조건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유지할 수 있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폴란드 성인이 신비적 단계에 도달했음을 드러낸다.

다음 도표는 신비주의 분야의 거장이며 교회 학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용어로 콜베의 체험을 “표현해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위 도표를 보면 성 막시밀리아노 안에 신비 박사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신학적으로 표현되고 체험된 신비 여정의 모든 요소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폴란드 성인이, 신비 생활과 순교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통하여, 양성기와 자코파네에서 폐결핵을 치료하며 체험한 시련들로 증명되고, (감각의 그리고 영혼의) “밤”의 단계들로 특징지워지는, 하느님과의 점진적인 일치의 여정의 정점에서 변화의 일치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위에 보이는 도표는 가르멜 학파의 대표적이고 영성 신학의 전통적인 “규범들(canoni)”에 비추어서도 인준되고 완벽한 성 막시밀리아노의 신비 여정을 강조해주고 있다.

성 막시밀리아노의 영적 체험을 살펴봄으로써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신비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하느님과의 변화의 일치, 즉 “신화(神化) divinizzazione”라는 용어로 정의되는 그분과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콜베 신부의 신비 생활은 끊임없는 고행과 관상에 이르는 긴장의 과정을 거쳐 완성에로 발전하고 도달한다.

이 폴란드 성인은 경험한 모든 것과 회개에 대한 항구한 열망의 자세 안에서 신적 현존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영적 여정을 지속했다. 신적 현존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자는 기도, 하느님의 말씀과 사건들에 대한 주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신비에 대한 묵상, 그리고 거룩한 미사와 교회의 전례에 대한 열성적인 참여를 통하여 확고하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언제나 보다 순수하고 완전한 영적 체험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밤” 또는 정화의 단계로도 묘사되는, 이 여정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중재 덕분으로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를 체험하도록 그를 이끈다. 그의 신비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봉헌의 결실인 그녀와의 깊고 총체적인 만남으로 예정되고 촉진되는, 지극히 높으신 분과의 직접적이고 중재 없는 만남으로서 마리아적 신비이다.

결론적으로, 성 막시밀리아노는 진정한 신비가이다. 비록 다수의 초자연적 현상들을 경험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중요한 기준점인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안내 아래 끊임없고 변화되는 관상과 수덕의 여정의 결과인 그리스도교 완덕에 다다른 이가 말하는 하느님과의 신비롭고 애정 어린 친교 안에서 솟아나는 완덕의 여정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관을 주는 성모님의 환시는 폴란드 성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하느님께서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통하여,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콜베 신부의 영적 체험의 고유하고 참된 신비적 단계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일치의 전주인 모든 단계를 달성하던 시간 안에 성취된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신비가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과의 깊고 친밀한 그의 일치가 죽음과 고통의 이 참혹스러운 장소에서조차도 계속되고 빛나기 때문이다. [성모기사, 2017년 6월호, 라파엘 디 무로, 한규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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