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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아버지의 집,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 마산교구 진주 문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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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27 ㅣ No.467

[아버지의 집,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 (18) 마산교구 진주 문산성당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하느님의 집

 

 

1937년에 봉헌된 시멘트 벽돌조 새성당은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삼랑식 성당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3’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숫자다.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나라를 가리킨다. 성경은 3이 시작이요 마침임을 알려준다.

 

마산교구 진주 문산성당도 세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먼저 뿌리 깊은 신앙 유산이다. 문산본당은 완월본당에 이어 교구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경남 서부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교우촌을 형성했고 1905년 11월 본당으로 설립됐다. 두 번째로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1923년 지은 한옥식 옛 성당과 1937년 신축한 고딕 양식의 현 성당이 있어 한국 교회 초기 성당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문산성당은 우리나라 근ㆍ현대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유산의 보존과 역사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5월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세 번째로는 아름다운 자연 유산이다. 9917㎡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2개의 성당이 자리하고 그 주변에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푸른 잔디, 성모동산 등이 어울려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 준다.

 

 

일제 수탈의 아픈 상처 위 세워진 성당

 

볕을 잔뜩 머금은 푸른 대지 위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문산성당은 어머니 품같이 평안하다. 어느 것 하나 모나거나 도드라진 것 없이 소박하다. 성당 마당 곳곳에는 유치원 아이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이 꾸민 작은 정원이 있다. 문산성당 터는 원래 역참 일을 하고 검문검색으로 범인을 색출하고 정보를 수집하던 찰방(察訪) 자리였다. 오늘날 파출소와 우체국 역할을 함께했던 곳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이후 우상을 섬기던 신전을 허물고 성당을 지었듯이 신자들을 색출하고 박해하던 찰방을 사들여 문산성당을 지었다. 

 

조선 시대 ‘소촌’으로 불렸던 문산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은 전라도 달구산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한 최 루도비코였다. 그는 마을 어귀에 살면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겸손하고 유식해 토착민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의 모범적인 삶과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고 1883년 공소도 세워졌다.

 

1905년 찰방 자리를 매입해 지은 한옥 성당. 현재 문화재청의 관리로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문산성당 제공.

 

 

1905년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줄리앙 신부는 찰방과 아전 관서로 쓰던 기와집 10여 동과 부지 8000여㎡를 정부로부터 사들여 그중 가장 넓은 집을 성당으로 보수해 1908년 9월 봉헌했다. 한옥 성당은 정면 6간, 좌측면 3간, 우측면 4간 규모로 동쪽에 출입구가, 서쪽에 제대를 두고, 열주로 남녀 신자석을 구분했다. 교회가 찰방 관서를 송두리째 사들일 수 있었던 것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왕조가 주권이 없던 상태에서 일본이 정부 토지를 민간에게 마구잡이로 매각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문산성당에는 일제 수탈의 아픈 상처가 남아 있다. 새성당을 지은 후 강당으로 사용되던 한옥 성당은 올해 문화재청의 관리 아래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본당 설립 100주년 맞아 새롭게 단장

 

한옥 성당이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교세가 확장되자 제5대 본당 주임 김영제(요한) 신부는 1935년 8월 새 성당을 짓기로 했다. 김 신부가 물려받은 재산과 공소 방문 때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팔아 성당 건립금을 내어놓자 신자들이 앞다퉈 건립금을 봉헌했다. 그래서 교구 도움 없이 본당 자력으로 성당을 지었다.

 

100주년을 전후로 새롭게 단장된 문산성당 내부. 제대 뒷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12사도들의 성화로 장식돼 있다.

 

 

성당 설계는 김영제 신부와 이토준일씨가 했다. 일제 강점기에 지은 용소막ㆍ낙산ㆍ장호원ㆍ언양성당처럼 문산성당도 단층 삼랑식 장방형 형태의 시멘트 벽돌조 건축물로 지어졌다. 신자들은 건축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시멘트와 벽돌을 나르고, 정촌면 드무실(현 문산읍 두산리) 밭에서 돌을 캐와 다듬어 제대를 만들었다. 제대에는 세베리아노 성인과 루치아 성녀의 성해를 모셨다. 신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완공된 새 성당은 1937년 5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에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봉헌됐다. 

 

일제 강점기와 6ㆍ25 전쟁 때 문산성당 역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전쟁 물자를 공출하기 위해 일본 경찰이 성당의 종을 노리자 당시 본당 주임인 김영제 신부와 신자들이 기지를 발휘해 종탑에 있는 프랑스에서 온 종 2개를 밤에 몰래 철거해 성모 동굴 뒤 언덕에 파묻고 갈촌 공소의 무쇠 종을 경찰서에 자진 헌납해 종을 지켰다. 또 6ㆍ25 전쟁 당시 성당을 점령한 인민군은 성당 건물만 남겨놓고 모두 파괴했다. 이후 인민군은 성당을 내무서 사무실로 사용했다. 휴전 후 성당 복구 작업에 앞장선 신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처럼 전쟁 통에 빼앗길까 염려돼 성모 동굴 뒤편에 묻어뒀던 종을 찾아 종탑에 달고 종소리를 들으며 전쟁의 상흔을 치유했다. 

 

오늘날 문산성당은 2005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전후로 새롭게 단장됐다. 옛 제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보수해 감실로 사용하고 있다. 제단도 말끔히 단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정신에 따라 주례 사제가 회중과 함께 마주 보며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나무 제대를 설치하고, 제대 뒷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의 성화로 장식했다. 좌우 창 모두는 색유리화로 꾸몄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2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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