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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크루(C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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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4 ㅣ No.1023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Crew

 

 

2014년 여름, 영화학교에서 1년 과정을 마무리하는 촬영을 석 달간 이어가면서 지쳐가는 우리를 뉴욕의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는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각자에게 일주일의 촬영 시간이 주어졌고 나머지 기간은 다른 사람의 촬영에 참여해야 했다. 학생 신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촬영비용을 준비해야 했고 감독뿐만 아니라 프로듀서 역할까지 다 해야 하는 상황이 어렵고 힘들기는 미국인 학생들이나 유학생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른 반들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을 흉보면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나름 재미있게 잘 지내오고 있다고 여긴 생각이 섣부른 자만이었다는 것을 석 달간의 촬영이 증명해주었다. 서로에게 발견하지 못했던 이기적인 모습에 점점 커지는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언제인지가 문제였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하필 내가 그 중에 하나가 되어 브룩클린에 있는 스튜디오 앞에서 나보다 23세 어린 중국 여자애와 한바탕 싸움을 했다. 촬영 내내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녀의 행동을 벼르고 있었던 나는 그 친구가 촬영 후 장비반납 때 못 오는 이유를 “I am tired.(나는 피곤해.)”라고 하는 순간 아주 엄한 본당신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그때 내가 신부란 사실을 숨기고 공부했던 게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고 결국 영어가 아닌 중국어가 난무했다. 틀림없이 욕이었을 것이다. 반 친구들이 말리면서 사태는 진정되었고 모두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데 동의하며 서로 화해했다. 또한 그 사건이 우연한 사건이 아닌 영화 현장에서 반드시 겪게 될 필연적 사건임을 예감하게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우리에게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작업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을 잘 살펴보면 그 감독과 늘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감독들이 이전 작품과 함께했던 배우와 제작팀과 계속 일하는 이유는 함께 호흡을 맞추며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긴 여행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여행의 설렘이 모든 시간을 마냥 즐겁게 해 줄 것 같지만 낯선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두려움과 육체적인 피로감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만 그 영화를 실제로 작업하는 현장은 극도로 예민하다. 자본, 날씨, 촬영장소, 배우의 상태 등 모든 것이 돌발변수를 안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런 환경에서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와 배려’이며 그것은 창작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지만 함께 창조해나간다는 열정이 현장의 분위기를 형성해낸다. 결국 감독의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키는 것은 최고 개런티로 캐스팅된 배우들과 고가의 카메라 장비가 아니라 바로 ‘사람’, 아니 ‘사람들’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대구가톨릭대학교 홍보실에서는 대학교 홍보 잡지를 일 년에 두 번 출판하고 있었다. 수시지원과 정시지원 시기에 맞추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두 번 만들어내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대학이란 한정된 곳에서 두 달 사이에 다른 내용을 만든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책의 출판 목적인 수험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의 의미를 잃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전한 변화를 꾀했다. 두 번의 출판을 한 번으로 통합하여 잡지(雜誌, Magazine)가 아니라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책(冊, Storytelling book)으로 제작했다. 모든 대학교 홍보책자에 나오는 신임총장 인터뷰도 과감히 생략하고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대상도 수험생이 아닌 학교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로 정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132페이지의 분량으로 독자 중심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회의와 촬영, 인터뷰뿐만 아니라 새로운 행정적 절차를 진행시켜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학교 행사를 준비해야 해서 스케줄을 재조정해야 했고 심지어 담당 직원은 촬영기간 동안 부인과 아기를 친정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기존의 관행적인 문법으로 방어적이고 행정적인 과정으로 만들면 쉽다. 그러나 이 책을 만드는 누구도 그 쉬운 방법을 원하지 않았다. 책을 제작하는 디자인 회사 팀원들도 단순히 계약으로 형성된 관계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대학 책자를 함께 창조해 나가는 열정으로 임해주었다. 결국 창조는 돈이나 유명업체가 아니라 창조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대단한 일은 한 사람이 아니라 팀(Team)이 해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팀(Team)은 스태프(Staff)가 아니라 크루(Crew)이다. 스태프는 단순히 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라면 크루는 함께 창조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다닌 영화 학교에서는 엔딩 크레딧에 항상 ‘크루’라고 쓰도록 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만 스태프와 크루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느낄 수 있다. 일을 함께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스태프가 아닌 크루의 모습이길 바래본다.

 

[월간빛, 2017년 8월호,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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