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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프랑스 혁명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섭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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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07 ㅣ No.464

[세상 속의 교회 읽기] 프랑스 혁명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섭리의 역사

 

 

7월14일은 프랑스 혁명(1789-1794) 기념일이다. 1789년 이날, 프랑스 시민들이 왕의 전제정치에 맞서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왕권은 절대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속 국가와 시민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이 체제 아래에서 모든 국민은 왕의 신하였다. 그리고 그중에 10% 남짓한 소수 귀족과 성직자들이 별도의 특권 신분으로서 90%인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대어 차별화된 삶을 누렸다. 그러던 중 당시 왕이던 루이 16세(재위 1774∼92)가 미국의 독립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다가 결국 국가의 재정이 궁핍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권 신분에게도 과세하는 방안이 제안되었고, 이를 계기로 왕과 귀족?성직자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 구조 속에서 평민들, 곧 시민들은 차츰 자신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식하며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고 누려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들고 일어나서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로 보냈다. 5년에 걸친 혁명은 이렇게 프랑스에서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제를 끝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안겨 주었다.

 

혁명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한편으로는 한때 국왕보다도 더 높고 큰 권세를 누리던 지위와 그에 따른 권력과 부와 특권을 전혀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권세 없고 힘없고 가난하며 탄압받는 존재가 되었다. 어찌 보면 교회가 몰락한 듯한 위기에 빠진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몰락의 위기가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교회가 도리어 반성과 쇄신의 길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교회 본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내려놓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라는 교회 본연의 정체성을 비로소 되찾게 해 주신 하느님의 섭리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 본연의 정체성 찾게 돼

 

이날,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프랑스 공화국 출범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낸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다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몇몇 지역, 가령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그리고 특히 방데 지역의 사람들은 이날을 별 열정 없이 맞는다. 그들에게는 이날이 프랑스 공화국이 자기네 지역 사람들에게 저지른 사실상의 대학살이라는 아픈 기억을 되살려 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랑스 군주제의 적폐를 바로잡겠다며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시작하고 사상 초유의 경찰국가를 세워, 수천 명의 반체제 인사들의 목을 자르고 가톨릭교회를 탄압했으며, 그러고 나서 20여 년 동안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까지 전쟁을 벌인 것이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에 프랑스 혁명 기간에 죽은 모든 무고한 이들, 특히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된 이들을 기억하며 경의를 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기억할 대상에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올 법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혁명군의 가톨릭교회 공격을 승인했다면 어쩌면 자기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1988년에 ‘혁명가의 연인’(Chouans!)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많았던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에게 국제 영화제 첫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이 영화는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의 첫 작품 ‘올빼미당원’(Les Chouans)을 각색한 것이다. 이 영화와 발자크(1799-1850년) 소설의 원제목(chouans)에는 프랑스 혁명이며 방데 지방과 관련한 아픈 이야기가 배경처럼 스며 있다. 이 단어는 ‘올빼미’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과 왕비의 목이 잘리고 어린 아들(루이 17세)은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도록 내팽개쳐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방데(Vendee) 지방의 농민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부유한 파리 시민들이 장악한 혁명 정부가 혁명군 30만 명을 충원하기 위해 방데를 비롯한 농촌 지역에서 징발하려 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을 때,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그런데 마침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교황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혁명 세력이 성당들을 폐쇄하자 방데와 인근 지방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혁명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 성심 그림과 ‘하느님과 왕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새겨 넣은 깃발을 앞세우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날카로운 올빼미 소리를 신호로 사용했고, 자신들을 스스로 ‘올빼미당(원)’(Chouans)이라고 불렀다.

 

 

방데 지방의 반란으로 살해당한 수십만 명은 ‘순교자’

 

- 매복 중인 올빼미당원들.

 

 

저항은 1793년부터 1795년까지 2년을 끌었다. 혁명 정부의 군대가 소위 ‘반도’(叛徒)들을 진압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올빼미당이 혁명 정부에 진압된 뒤에도 방데 지방의 저항은 여전히 치열했다. 이들에게 질린 파리의 혁명가들이 본보기 삼아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을 반포할 정도였다.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불과 피와 죽음이 필요하다.’

 

‘그들을 한 사람도 살아남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늑대들만 그 땅에서 어슬렁거리게 해야 한다.’

 

‘여자들은 소출을 내는 밭과 같아서 계속 갈아엎어야 한다.’

 

방데 지방의 항거 사실과 관련해서, 그곳 생존자의 후손인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썼다. “당시 혁명가들의 지시에 따라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발가벗겨진 채 수장을 당했다. 때로는 ‘공화국의 결혼’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그들을 함께 묶어서 특별히 만든 작은 배에 실어 강 한가운데로 보내서는 물에 가라앉히기도 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당시 사망자가 수십만 명인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평범한 시민들과 농부들이었고, 어느 면에서 보자면 그들 대부분이 순교자들이었다고 한다.

 

방데를 비롯한 일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결국 강력한 혁명 정부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송두리째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방데 주민들과 농부들이 보여 준 순수한 신앙심은, 혁명 정부를 뒤이어 프랑스를 장악한 나폴레옹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교회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사제들이 다시금 성사를 자유로이 집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게 만들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방데 주민들의 승리’라고 일컬었다. 그리하여 1993년에 이곳에 항거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졌는데, 러시아(구 소련)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년)이 제막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여 연설을 한 바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7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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