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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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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1 ㅣ No.898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 개척*

 

 

국문 초록

 

김대건 신부는 신학생 때인 1842년에 프랑스 함대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오려다 실패하였다. 1845년 부제로서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였던 그는 서해를 건너 중국에 들어간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신부가 된 그는 조선에서 타고 갔던 배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한지 얼마 안 되는 1846년에 그는 백령도 부근을 거점으로 해서 조선과 중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려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바다와 함께 살다가 순교한 사제였다고 일컬을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김대건 신부의 서해를 통한 선교사들의 입국로 개척에 대해서는 최근에 들어와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페레올 주교가 구상하고, 김대건 신부가 개척하였기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입국로 개척에 대해서는 새롭게 다룰 측면이 있다.

 

우선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활동은 그 보다 앞선 선교사들이 시도한 해로 개척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대건 신부의 활동이 주도적이거나, 능동적으로 제대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커다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해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던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 입국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을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배로 조선에 입국하는 문제에 대해서 망설였다. 김대건 부제가 중국으로 타고 온 배가 너무나 작고 초라해서 서해를 건너서 갈 수 있는 배로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김대건 신부의 항해 지식이나 해로 개척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이들은 조선배가 아니라 중국배로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부는 조선의 배로 두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태워서 입국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새로운 지도 작성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백령도 부근을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하였다.

 

 

1. 머리말

 

김대건 신부는 신학생 때인 1842년에 프랑스 함대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오려다가 실패하였다. 1845년에 부제로서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였던 그는 서해를 건너 중국에 들어간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해로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를 맞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이후 신부가 된 그는 조선에서 타고 갔던 배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해로로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1846년에 그는 백령도 부근을 거점으로 해서 조선과 중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려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바다와 함께 살다가 순교한 사제였다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김대건 신부의 서해를 통한 선교사들의 입국로 개척에 대해서는 최근에 들어와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1) 이를 따르면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로 통한 입국은 페레올 주교가 구상하고, 김대건 신부가 개척하였기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파악된다. 그 결과 186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은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백령도를 중심으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에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해로를 통한 선교사의 입국로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김대건 신부의 활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입국로 개척에 대해서는 새롭게 다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페레올 주교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그 이전에 활동하였던 조선교구장 - 제1대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2대 앵베르 주교 - 들이 해로 입국을 모색한 사실이 거의 언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2)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해로를 통해서 조선에 입국하려고 노력하였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은 다른 선교사들의 활동도 제대로 주목될 수 없었다. 따라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활동은 이들 선교사들이 시도한 해로 개척의 연장선상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대건 신부의 활동이 주도적이거나, 능동적으로 제대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커다란 문제이다. 해로가 개척되었다는 결과에 지나치게 매달린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상인 주교나 다른 신부의 지시가 있었겠지만, 그것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은 김대건 신부의 노력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전도>의 제작 등이 보여주고 있듯이, 그는 해로와 육로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전문적인 지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김대건 신부의 해로 개척에 대한 헌신과 함께, 그의 자주성을 강조한 메스트르 신부의 언급을 통해서도 새롭게 파악할 측면이 있는 것이다.3) 때문에 기존의 연구에서 김대건 신부의 서한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루다 보니, 서해안을 통한 해로 입국로 개척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 등 다른 사료들이 유기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로 통한 조선 입국을 실제로 개척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브뤼기에르 및 앵베르 주교의 해로 입국 모색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된 이후 선교사의 영입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들을 어떠한 경로로 입국을 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1790년 이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요청한 ‘대박청래’는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선교사의 영입과 관련해서 서양이라는 해상세력이 설정되고, 바다가 일찍부터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려준다.4) 1790년에 처음으로 윤유일을 북경으로 보내 선교사와 대박(大舶)을 보내주도록 간청하였다.5) 당시 그들은 대박을 선교사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바다를 통해서 선교사를 영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1796년에 대박 영입의 계획을 다시 추진하였다. “대박이 오게 되면 반드시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주문모 신부와 지도적인 신자들이 북경의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까지 이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강남 지역 지식인 출신이었던 주문모 신부의 경험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대박을 단순히 선교사하고만 동일시한 것이 아니라, 대박을 통해서 서양문물의 향유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립에 대한 기대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에 이르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황사영은 <백서>를 통해서 그 대상을 교황청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따르는 서양의 여러 나라로 확대시킨다. 그리고 대박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선교사의 영입이나,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립을 주장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서양의 강력한 무력사용이라는 내용까지로 변화시켰다. “배와 사람 수가 말한 대로 될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 6천 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든지, 더 나아가

 

만약 배 수백 척과 정병 5, 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더불어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인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이다.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전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한 방의 탄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절대로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의 조약만 맺고는 북 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다. 만일 천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마땅히 주님의 벌을 받들어 죽어도 발꿈치를 돌이키지 아니할 것이다. 왕은 한 사람을 받아들여 전국의 벌을 면하겠는가, 아니면 전국을 잃더라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는가, 왕은 어느 하나를 택하기 바란다.”라고 하시오.

 

라고 하여, 황사영은 서양의 강력한 무력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과 우호관계를 맺고,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중요한 사실은 해로를 통해서 서양의 선교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북경의 주교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보낸 첫 번째 요청에 대해서 “물길이 머나먼데, 서양의 큰 배가 어찌 쉽게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대박의 파송을 거절하고 신부만을 조선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해로가 아닌 육로로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었다. 두 번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북경의 주교는 대박의 파송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신자들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들어온 중국인인 유방제 신부가 육로를 통해서 조선에 입국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세 번째의 경우에는 <황사영백서>가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세 차례의 경우를 통해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해로를 통하여 서양 선교사를 영입하려고 하였던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담당하면서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로가 다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해로로 입국하느냐, 육로로 입국하느냐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6) 이것은 조선에 있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커다란 과제였다. 당시 이들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처음에는 해로를 주장하다가, 이후에는 육로를 통한 입국으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초대 교구장을 비롯해서 앵베르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보다 다양한 루트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육로로 입국하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는 해로와 육로를 함께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는 해로만을 통해서 직접 조선으로 입국하는 방법이었다.

 

해로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육로를 선택하였다. 이때 그의 입국로 모색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실은 바다를 통해서 직접 가지는 못하더라도, 중국 내륙을 거치는 것보다는 해로로 요동까지 가서, 다시 육로로 조선에 들어가는 방법까지를 제시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샤스탕 신부에 의해서 그러한 경로를 통한 조선 입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는 그보다 적극적으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모색하였다. 그는 조선의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가 했다는 예언에 따라 배를 타고 오는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그는 선교사들이 프랑스의 군함을 이용하여 조선으로 입국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였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프랑스의 샤를르 10세가 바다를 종횡으로 누비는 프리깃함의 선장들 가운데 한 명에게 명령하여 페낭이나 마카오로 가서 선교사를 돕도록 지시하게끔 간청하자고 말한다. 그곳에서 조선으로 갈 선교사와 통역할 수 있는 조선인 신학생을 승선시킨 다음, 조선 연안을 따라 항해하고 정찰하다가 조선의 해안에서 천주교 신자 같은 몸짓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작은 배를 바다에 띄워 그 사람들과 대화해 보도록 신학생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선교사도 상륙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해군 장관에게 설득력 있게 호소하면 그가 어떤 프리깃함을 지명하여 자신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자신이 보기에 이것만이 선교사들이 조선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방법이 현재 어렵다면 서양사 선교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이든지 조선에 입국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해로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조선에 들어간 다음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해서 조선인 어부 여러 명과 함께 연락책 한 명을 데리고, 그 배로 마카오까지 다니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조선 대목구가 마카오 극동 대표부와 값싸고, 안전하게, 그리고 중국의 선교 지역들이 피해를 보는 일 없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며,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요동 지역만이 아니라, 조선이 마카오의 극동 대표부와 해로를 통해서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837년 조선에 들어온 세 번째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는 입국로 모색에 대한 여러 논란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요동 지역에 연락처를 마련하는 일에 다시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이 오히려 조선 대목구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 국경 너머에 있으면서 조선 신학생들을 돌보고,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적어도 순조로운 편지 왕래를 주선하며, 조선에 있는 세 명의 선교사가 죽은 다음에라도 계속해서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자신이 요청한 부주교가 요동 지역에 거처를 정하여 조선 대목구장이 추방당하거나 사망하면 언제든지 조선에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까지 드러내었다.

 

그는 이를 위해서도 해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선교사들이 먼저 중국인 교우로서 어부인 한두 집안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선교사들과 친해지게 한 다음, 그들을 조선의 해안에서 되도록 멀지 않은 ‘양부’(요동반도의 항구인 태장하)라는 항구 근처에 정착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머무를 집과 작은 배 한두 척을 구입할만한 자금을 준다는 것이다. 이때 약속 장소를 압록강 하구에 있는 만이 있는 곳으로 정하게 되면, 몇몇 조선 교우들이 어부로서 이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발해만에 중국 어부들도 고기를 잡으러 오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보낸 조선 어부들과 선교사의 일을 돕는 중국 어부들이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신호를 보게 되면,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동을 통한 해로와 육로를 함께 사용하는 입국방식을 새롭게 변화시킨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는 해로로 바로 조선에 직접 들어오는 방식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세계 일주를 하다가 해변을 구경하듯 가끔 조선 동쪽 연안을 따라 운항하는 프랑스 프리깃함들이 적어도 음료수를 구입하려고 조선 항구에 입항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전에도 생각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랄 수도 없는 그런 입항에 대한 희망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이득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조선의 무능하고 약한 정부는 입항하는 외국 선박을 보게 되면 의심을 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긴 너무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구리나 생사를 팔 때 이익이 날지 모르지만 상인들은 큰 이익을 남길만한 장사를 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주로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삽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서쪽에, 곧 서남 지역에서부터 서울을 흐르는 강의 하구가 있는 넓은 만까지의 서해안에 교우촌이 더러 있습니다. 프랑스 선박들이 조선에 기항할 경우에 우리는 더 쉽고 빠르게 마카오나 파리와 연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외국 배편으로 보내온 물건들을 받을 목적으로 그 배와 살짝 접선하려고 신자인 어부들의 작은 배를 밤에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생긴다면 한번 시도해 보기를 르그레즈와 마카오 대표부 경리부장 신부님께 부탁드립니다.7)

 

앵베르 주교는 조선의 해안을 따라 운항하는 프랑스 군함과 서해안에 더러 있는 교우촌의 교우들이 서로 만날 수만 있다면 해로를 통한 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 군함을 통해서 더 쉽고 빠르게 마카오나, 심지어는 프랑스의 파리와도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프랑스 군함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집요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의 뒤를 잇는 페레올 주교에게 이러한 계획을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앵베르 주교의 견해를 매우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렇다면 기존의 연구에서처럼8)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서 구상되고,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개척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때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매우 구체적인 관심을 가졌던 앵베르 주교를 거치면서, 마침내 페레올 주교에 의해서 해로를 통해서 직접 조선에 들어오는 길까지 열리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앵베르 주교의 계획이 그의 영향을 받은 페레올 주교에게 계승되면서 프랑스 선교사의 해로 입국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9)

 

 

3. 김대건 신학생의 프랑스 군함을 통한 해로 입국 좌절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은 시기적으로 크게 신학생, 부제, 그리고 성직자였을 때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이를 차례대로 다루어보자.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 것은 신학생 때인 1842년 2월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프리깃함인 에리곤 호 함장인 세실이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선교부 소속인 리브와 신부에게 통역 한 사람을 비밀리에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으로 가서 국왕에게 다른 나라들을 제외하고 프랑스하고만 교역을 제의할 생각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 그의 통역으로 신학생 한 명을 요청하였다.10)

 

당시 세실의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방문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중국진출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11)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는 영국의 협력을 받으면서 중국에 쟝시니라는 첫 외교사절을 보내는 등12) 중국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에 세실은 프랑스의 이익이 함께 보장되는 남경조약이 체결되는 현장으로 가는 길에 조선까지 들를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조선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자국 선교사들이 조선입국을 도모하고 있으며, 해로를 통해서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도 세실에게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프랑스 함대의 이용이란 앵베르 주교가 해로를 통한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미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세실의 제의란 선교사만 제외되었을 뿐, 앵베르 주교가 해로를 통한 입국로 모색의 내용과 거의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실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실의 계획은 프랑스 선교사들로 하여금 이전과 달리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 앞으로 영국 선박이 아니라, 프랑스 함대의 도움까지를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13) 그것은 에리곤 호만이 아니었다. 외교사절을 태운 또 다른 프랑스 기함인 파보르트 호 역시 북경 수도의 강에서부터 조선의 남쪽 부분까지 북경만의 모든 해안을 방문하게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14) 에리곤 호만이 아니라 파보리트 호까지 요동과 조선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카오의 대표부는 세실의 제의에 대해서 이러한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15) 조선이라는 포교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 포교지를 돌볼 선교사를 입국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파리 외방전교회로서는 무척 반가운 것이었다.16) 이들은 선교와 관련해서 세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뉴질랜드 포교지가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 호로부터 받은 큰 봉사 때문에 세실을 그 창립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17) 이에 선교사들은 프랑스와 조선과의 협상을 추진하려는 세실을 통해서 가능한 한 자신들의 선교와 한국 천주교회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18)

 

마카오의 대표부는 세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바랐던 것처럼 신학생 한 명 만이 아니라, 선교사도 한 명을 함께 보내겠다는 것이다. 조선인 신학생의 라틴어 대답을 프랑스어로 옮길 수 있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세실도 이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의 에리곤 호 탑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9)

 

그러나 세실은 자신의 의도대로 조선으로의 항해가 이루어지지 못할 가능성도 함께 언급해두었다. 이에 선교사들도 또 다른 방법을 대비해 두었다. 에리곤 호가 직접 가지 못할 경우에 파보리트 호를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에리곤 호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파보리트 호가 요동을 거쳐서 조선에까지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경우 조선에까지 가지 못할 경우 요동에다가 선교사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는 해로와 육로의 결합 방식을 프랑스 군함을 통해서 실행해 보는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삶은 여기에서 세실과 운명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세실을 만나서 마카오에서 남경까지 항해하는 경험을 통해서 바다와 관련된 많은 지식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20) 페레올 주교의 말이다.

 

아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국과 중국 사이의 전쟁이 끝날 무렵, 1842년에 에리곤 호라는 프리깃함의 함장 세실 해군대령이 조선해안을 탐험할 계획을 세웠고,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의 리브와 신부에게 대표부에 있는 조선인 학생 가운데 한 명을 통역사로 보내달라고 했다. 리브와 신부는 세실 함장에게 중국인들과의 교섭에 통역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김대건 안드레아를 보냈다. 정해 항에서도, 상해 항에서도, 다른 항구에서도 이 청년은 중국인들에게 아편 장사를 하려고 전쟁까지 하는 영국인들과 다르게 인심이 후한 프랑스인들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힘써 말한 결과로 중국인들은 프랑스인들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통역관이 된 상황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김대건 청년은 점차 대담한 성격을 가져서 천주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려는 계획을 완수할 재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시야가 넓어졌고, 모험적인 원정을 해야 할 때는 겁내지 않았다.21)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에리곤 호에 동승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자신감을 가지고서 모험적인 원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에리곤 호에는 지리학자까지 타고 있었기 때문에22) 그의 지리에 대한 인식 또한 깊어지게 해주었을 것이다.

 

1842년 2월 15일에 세실 함대에 동승한 김대건 신학생은 마카오를 출발하여,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서 7월 초에 양자강 입구에 있는 오송에 도착하였다. 8월에는 파보리트 호에 탑승한 최양업 신학생과 만주로 파견되는 브뤼니에르 신부와 상봉하였다. 8월 29일에는 에리곤 호에서 내려 다른 배로 남경조약의 체결식장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9월에 이르면 에리곤 호의 조선 항해가 포기된다. 세실이 마닐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페레올 주교는 아편전쟁의 결말을 지켜보기 위하여 조선진출을 연기하였으며, 조선으로 가는 항해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설명한다.23) 김대건 신학생은 세실 함장이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해를 망설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24) 그래서 이들은 세실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말하면서 에리곤 호에서 하선하였다.

 

메스트르 신부에 의하면 세실이 조선 해안으로 바람이 불어주지 않는 한 통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말한다.25) 또한 프랑스 항해자들은 처음에는 열성에 가득 차 있었으나, 쉽게 용기를 잃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에리곤 호도 파보리트 호 모두가 요동과 조선 사이의 짧은 공간을 감히 건너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6) 이는 에리곤 호가 아니더라도 파보리트 호라도 이용해서 요동으로라도 들어가고자 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계획이 또한 무산됨을 알려준다. 이런 까닭에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는 강남지역을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프랑스 배로 조선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제 프랑스 선교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중국 배를 통해서 요동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베시 주교가 영국 배로 이들을 다시 상해 부근까지 데리고 오고, 그리고 중국 정크 선을 이용해서 요동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마련해주었다.27) 이에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는 10월 23일 요동의 남단 태장하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이들은 조선 해안으로 직접 연락이 취해질 때까지를 기다리면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프랑스 군함을 이용해서 조선으로 바로 들어가고자 한 프랑스 선교사의 계획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4. 김대건 부제의 조선 배를 통한 서해 횡단과 재입국

 

프랑스 군함을 통한 조선 입국이 좌절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의도에 대해서 돌아보게 된다. 자신들의 선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선교사들이 너무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포교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다행하게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전사들보다 더 강한 선교사들은 군함이 아니더라도 정크 선박만 있으면 그것이 원하는 해변에 그들을 인도해주고, 또 지상 것이 아닌 그들의 헌신을 지원하는데 충분할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28) 이에 그는 인간이 우리를 버릴수록 섭리가 가까이 오고, 우리를 지탱해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29) 이제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군함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1843년 3월 7일자 편지에서 “조선 밀사는 선교사의 입국을 내년으로 미루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에게 금년에 입국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배 한 척이 여름에 조선 해안에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우리 포교지를 위해 등한시할 수 없는 더 없이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30)

 

그다음 해인 1844년 3월 편지에서도 “영국인의 원정이 저를 프랑스 배로 강남에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언젠가 우리 신부들이 서양 배로 조선 해안에 갈 날이 올지 누가 압니까. 육로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라고31) 한다. 그는 같은 해 5월 19일에 김대건 신학생이 부제품 받는 것을 알려주면서, “저를 강남으로 데려다준 세실 함장이 중국해에 머무를 연장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휘하에 2척의 프리깃함과 3척의 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행동에서 너무 구속을 받지 않는다면 조선에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이때 우리를 입국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도 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32) 세실 함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페레올 주교 역시 1844년 12월 10일자 편지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저는 변문으로 향합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운수가 더 좋을까요? 천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만일 제가 입국을 못하면 강남으로 가서 해로로 입국을 시도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반드시 제 포교지에 잠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33) 육로가 불가능하면 해로 입국을 추진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메스트르 신부는 1845년 5월 25일자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는 육로가 지긋지긋해서 조선으로 그를 데리고 갈 배를 찾기 위해 배편으로 마카오로 갔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중국과 이웃 나라의 조정 사절들이 주재하는 곳이 바로 마카오이기 때문에 이해가 갑니다. 주교는 틀림없이 배를 발견할 것이고…”라고34) 덧붙여 주고 있다. 이때 김대건 부제와 함께 해로 입국을 시도했던 메스트르 신부는 육로로 조선 입국을 시도하겠다는 입장으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메스트르 신부가 보낸 이 편지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은 “페레올 주교가 하느님께서 주교가 프랑스 배로 또는 조선 배로 조선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면”하고35) 말한 점이다. 프랑스 배가 아니라, 조선 배로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한 것이다. 이제 조선 배를 사용하는 것으로까지 프랑스 선교사의 입장이 크게 바뀐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약속된 시기에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를 데리고 저희 둘이 함께 선교지에 들어갈 희망을 품고 변문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국경까지 올 일곱 명의 밀사 가운데 세 명 만이 국경을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인을 조선에 입국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위험이 그들에게 너무 절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 명의 밀사에게 적어도 김대건 부제는 입국시키라고 강요했고, 김대건 부제에게는 조선에서 배 한 척을 마련해서 상해로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밤중에 김대건 부제는, 2년 전에 했던 것처럼, 두 군데 관문을 피하고 산을 넘어 밀입국하여 날이 샐 때까지 약속된 장소에서 밀사들을 기다렸습니다. 열렬한 신앙심과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강한 믿음에 힘입어 이 여러 여행에서 겪은 피로를 큰 인내로 이겨 낸 김대건은 조선의 수도가 되는 서울에 도착하자 즉시 배 한 척을 샀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농부 신자를 모아 선원으로 삼았으나, 이 선원들에게 계획을 알려주지 않고 이들과 함께 작고 초라한 배를 타고 대담하게도 미지의 바다를 횡단하기로 했습니다.

 

천주님께서 김대건 부제를 다시 시험해 보셨습니다. 김대건 부제와 그의 선원들은 출항했다가 바다 날씨가 너무 나빠서 여러 번 항구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먼 바다에 이르러서 사나운 폭풍을 만나 돛대가 부러지고 키가 부서졌으며 선원들의 소지품과 식량 일부를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구원해 주시고 살려주실 분으로 다만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천주님’께 걸고 있던 김대건 부제의 희망은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천주님의 섭리로 만나게 된 중국 배의 선장이 김대건 부제의 배를 상해까지 예인하기로 동의했기 때문입니다.36)

 

육로 입국이 좌절된 페레올 주교는 요동에서 마카오로 돌아가서 조선으로 들어갈 배를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김대건 부제에게 입국 후 조선 배로 중국으로 건너오라고 지시한 것이다.37) 다블뤼 주교는 이를 “그가 입국에 성공할 경우에 요동으로 돌아오든지, 가능하면 배를 사가지고 교구장을 영입하기 위해서 상해나 주산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38) 상해 이외에 항주 앞의 주산 지역이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김대건 부제의 노력이 페레올 주교보다 먼저 결실을 맺었다. 조선과 중국의 바닷길이 김대건 부제에 의해서 뚫린 것이다. 1845년 4월 30일 그는 현석문 등 11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서 상해를 도착목표로 정했다. 5월 28일 오송에 도착하고, 6월 4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김대건 부제는 조선 후기 바다를 통해서 중국으로 간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페레올 주교가 지시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면서 해로 개척을 실제적으로, 주도한 것은 조선 배의 선장 역할을 한 김대건 부제였다. 그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을 올바르게 설정했기 때문이다.39) 상해에 도착한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곧바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이와 같이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 김대건 부제가 조선 배를 몰고서 선교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상해에까지 왔다. 그러나 막상 조선 배를 본 프랑스 선교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왜냐하면 페레올 주교가 작고 초라한 배라고 언급한 조선 배는 그들이 보기에도 바다를 건널 수 없을 정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40) 프랑스 해군의 지적처럼 그것은 정말로 너절한 엉터리 배였던 것이다. 바다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내지의 강을 위해 만들어진 배로 비추어졌다.41)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조선 배를 타고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는 문제에 대해서 망설였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서 온 이 초라한 조선 배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어떤 공포심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허술한 나무토막을 타고 어떻게 우리가 400킬로미터 이상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인들은 모두 즐거워하고 바다와 파도를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정말로 훌륭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교를 만났고, 또 그들의 재난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주교와 함께 있음으로 이후 모든 위험을 면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순진함을 축복하시기를…”라고 하여,42) 이들은 조선 배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매우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조선 배가 아니라 중국 배로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했다. 1845년 8월 28일자 편지에서 “저는 조선 해안까지 저희가 타고 갈 중국 배를 구하는 것이 어려우리라고 예상했습니다. 지금은 상해 항구에 중국 배가 한 척밖에 없습니다. 베시 주교님은 이 배로 저희를 조선 해안까지 데려다 달라고 선주에게 간곡히 부탁하셨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는 핑계뿐인 ‘중국식’ 이유를 대면서 못 간다는 대답만 했습니다. 오로지 천주님께서 제 입국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한 데에서43) 알 수 있다. 그 결과 조선 배가 아니라 중국 배를 통하여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한 페레올 주교의 의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여기에는 아마도 페레올 주교의 김대건 신부의 해로 개척에 대한 의구심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가진 항해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었다.44) 때문에 중국 예인선에서 조선 배가 분리되어 표류할 때 김대건 신부가 조선의 섬들과 서울로 가는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잘못되자 김대건 신부가 큰 오산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45) 메스트르 신부는 그가 헌신의 확실한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자주성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와 함께 경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이다.46) 경솔함이란 자주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실수나 부정확함을 그와 같이 비판하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김대건 신부도 상해에 머물면서 “고관인 프랑스인 세실이 곧 이곳에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를 만나기 위해서도 남아 있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다.47)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자신이 몰고 온 조선 배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중국에 들어오자마자 파손된 배를 고쳐서 “어쨌든 나는 내 배로 조선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도움을 거절하면 유럽인들이 나를 도와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48)

 

사실 김대건 신부는 해로로 통한 선교사의 조선 입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조선 배로 떠나기 전에 리브와 신부에게 “세계지도, 특히 황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그리고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을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49) 요구하였던 것이다. 또는 그는 “만일 페레올 주교가 상해를 경유하지 않으시고 조선에 가신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일 것이라고” 말하면서,50) 중국과 조선의 해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제물포에서 출발해서 상해를 목표로 하고 왔던 것이다.51) 때문에 상해를 거쳐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52)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의도대로 중국에서 조선으로의 항해가 결정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페레올 주교는 여전히 중국 배의 도움을 받아서 조선으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는 “이튿날 우리는 운하 어귀에 이르러 요동으로 떠나는 배 곁에 정박하였습니다. 그 배는 어떤 신자의 것이었는데, 그가 우리를 산동 지경까지 끌고 가겠다고 약속하였던 것입니다.”라고53) 하여, 중국 배와 함께 산동 지역까지 가서 조선으로 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발 직전에 남긴 페레올 주교의 언급에 의하면 산동성 지역은 그 해안에 천주교 신자가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는 점에서54) 중국 배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동 지역까지 언급된 것은 김대건 신부가 서해를 건너 상해로 올 때 산동 배를 만난 사실도55) 고려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페레올 주교의 경우 조선으로의 항해가 어려워진다면 자신이 한때 머물렀으며, 이미 해로를 통해서 다녀본 요동 지역으로까지 갈 생각까지를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에 중국에서 조선으로 항해하는 항로가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이제 김대건 신부가 탄 조선 배는 굵은 밧줄로 요동으로 향하는 중국 배에 붙들려 매인 상태에서 조선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이 배를 프리깃함으로, 라파엘 호라고 이름 불렀다.56)

 

심한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중국 배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김대건 신부는 두 선교사에게 조선 배를 떠나 중국 배로 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 그 동료 신자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중국 배와 연결된 밧줄이 끊어짐으로써 두 선교사는 건너가지 못하고 김대건 신부와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57) 결국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수리된 조선 배로 입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김대건 신부가 바란 것처럼 자신들을 비롯한 조선인 신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서양인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1845년 9월 28일에는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10월 12일에 강경에 도착함으로써 마침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페레올 주교의 말처럼 그의 조선 입국은 6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58) 그러므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은 프랑스 배나 중국 배가 아니라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그와 조선인 신자가 마련한 조선 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것은 메스트르 신부가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 선교사들로 하여금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어떤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하였다.59)

 

 

5. 김대건 신부의 백령도 부근을 통한 새로운 입국로 개척

 

1845년 중국에서 조선의 강경으로 재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강경에서 배를 새롭게 구입해서 그 배로 서울로 들어왔다.60) 그 이유로는 이미 의심을 받고 있을 라파엘 호를 타고 서울로 간다면 신분이 노출되거나 체포될 위험이 있으므로, 타고 온 배를 처분하고 새로 배를 매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61)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을 위한 노력은 그것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귀국한 그다음 해인 1846년 5월에 페레올 주교가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새롭게 개척하라는 지시를 그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님의 뜻을 따라 백령도로 항해하였습니다. 거기에 중국 어선들이 와 있었고, 그 어선들을 통해 신부님들에게 편지를 함께 보냈습니다.”라고 하여,62)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하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 배가 아니라, 중국 배를 타고 와서 접촉 지점에서 조선 배로 갈아타고 들어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백령도를 주목한 것은 상해에서 조선 배를 타고 출발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저희는 지금 당장 중국과 조선 사이의 연락처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는 모험을 절대로 감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산동성 지역은 저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그 해안에 사는 신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저희는 중국의 강남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곳 사람들 가운데는 산동성 맞은편에 있는 섬 중에 하나인 백령도에 가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 연안 감시를 담당하는 관원이 있습니다. 만일 저희가 좀 더 목숨을 더 부지하게 된다면, 저는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게 한 다음 신부님께 그 결과를 알려드리는 서한을 보내겠습니다.63)

 

그는 조선에 들어가게 된다면 또 다른 해로를 개척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산동성이 아니라, 강남과 연결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곳이었다. 강남에서 백령도로 가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그것을 확인해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김대건 신부를 그곳으로 파견한 것이었다. 이것은 앵베르 주교가 압록강 주변에서 중국 어선과 조선 어선의 교류를 주장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페레올 주교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서울에 보다 인접한 곳으로 장소를 변경시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백령도 부근을 탐사한 김대건 신부는 강남의 배들이 아니라, 약 100척 가량의 산동 배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64) 그 배들은 해안 아주 가까운 곳까지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이 장소가 중국인들의 중개를 이용하여 편지를 전달하고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데 매우 유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해마다 중국 어선들이 음력 3월 초쯤에 이곳에 고기잡이하러 모이고, 음력 5월 말경에 돌아가는 시기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는 페레올 주교가 구상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의 입국로를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것으로 설명한다.65)

 

이러한 해석은 너무 단순한 접근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이해할 때 김대건 신부가 꾸준히 관심을 가졌던 해로 개척과 관련된 여러 사실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페레올 주교만이 아니라, 조선에 함께 머물고 있는 다블뤼 주교 역시 해로에 대해서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다시 조선으로 오고자 한다면 전해 달라, 세실이 닻을 내렸던 부근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원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3달 전 영국 배가 정박한 적이 있었다. 이 정박지가 괜찮으며, 올해 프랑스 함대가 닻을 내렸던 곳보다 훨씬 더 낫다. 하지만 보다 북쪽으로 와서 수도를 향해 다가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수도를 에워싸고 있는 강의 하구에는 강화라고 불리는 큰 섬이 있다. 작은 배로 수로를 찾아다니면 아마도 군함이나 프리깃함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수도는 곧장 연결되어 있다. 조선인 선원들의 말을 따르면 정박은 확실하다. 지체 높은 외교인 고관의 말에 따르면, 만약 외국인이 강화도를 점령한다면 조선의 왕은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66)

 

그는 서해안의 보령에서 가까운 원산도를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서울로 바로 연결되는 곳인 강화도까지 덧붙여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령도만이 아니라 서해안의 여러 장소들이 선교사의 입국로와 관련해서 논의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논의가 필요했던 것은 해로를 통한 선교사들의 조선입국이 중국의 선교지나, 조선의 선교지에 피해를 입지 않는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 뒤의 시기이지만, 중국의 강남 교구장은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포교지에 영향을 준다고 말하였다.67) 조선의 경우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은 영국 배나 프랑스 배가 조선 해안으로 계속적으로 접근해옴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에게 상당한 위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68) 따라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어떤 해로를 통해서 조선에 들어오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기에 이 문제는 논의를 통해서 서로 함께 결정하였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김대건 신부의 해로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육로로 조선으로 들어온 김대건 신부는 처음에는 서울에서가 아니라,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는 현석문을 충청도로 보내어 해변에 집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던 것이다.69) 현재 이곳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 집 한 채와 배 한 척을 구입하였으며, 제물포에서 상해를 향해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 4월 7일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조선 지도에70)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이 지도를 김대건 신부가 1845년에 만든 <조선전도>로 파악하고 있다.71) 그러나 제작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점 등에서 새로운 검토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샤를르 달레는 “1845년에는 공경하올 조선인 신부 김 안드레아가 한성부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공식 지도를 보고 지도 한 장을 손수 그렸다.”라고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72)

 

그렇다면 <조선전도>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때 김대건 신부가 조선 지도를 그렸다고 하더라도 조선 정부가 작성한 공식 지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1845년 3월 27일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계지도, 특히 서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73) 뿐만 아니라 1월 15일에 육로로 서울에 도착한 김대건 부제가 2월에는 중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의 사정을 볼 때 그와 같이 짧은 시기 동안 현존하는 <조선전도>를 제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매우 부실한 준비 상태에서 조선을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25상팀짜리의 보잘 것 없는 나침반 하나와74) 그와 비슷한 조선 지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페레올 주교 및 다블뤼 신부와 함께 제주도에 표착해서 강경으로 들어갈 때의 사정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제주도에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통해 입국하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75) 아무도 모르는 섬들과 해류와 암초 등이 이들을 매우 괴롭혔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조선에 다시 돌아온 뒤부터 이를 극복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힘으로 조선의 해로를 새롭게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새로운 지도로 남기려고 하였다. 이때 그가 조선 후기 충청도에서 대표적인 포구의 하나인 강경에 주목하였다. 강경으로 조선에 입국한 그가 배로 백령도를 답사하기 위한 준비에서도 선주 임성룡과 사공 엄수를 강경으로 보내어 필요한 물자를 마련했던 것이다.76) 이는 그가 서해안의 입국과 관련해서 강경을 계속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보다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서 서울을 배로 올라올 때 호서의 산천을 역력하게 기억하면서 그렸다고 한다.77) 이 역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해라는 바다를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올 때 충청도의 어느 곳이 적절한 지역인가를 살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제작한 <조선전도>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를 살펴보면 그가 육로보다 해로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78) 서해안의 경우 암초까지도 자세히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강경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뱃길에서 파악한 내용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대건 신부는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전도>를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계속해서 수정해갔던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전도>와 그가 중국 배를 통해서 선교사에게 전달하고자 한 지도와는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그는 백령도 부근에서 중국인 선원에게 전달한 지도 역시 그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79) 그는 체포되어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자기의 손으로 조선 연해의 산천을 그려 중국으로 보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그가 새롭게 만든 조선 지도는 현존하는 <조선전도>와 차이가 나고 있다. 이를 조사한 조선 정부의 관리에 의하면 현재 남아있는 <조선전도>와 달리 산의 이름이 한글로도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80) <조선전도>에 한글이 전혀 표기되지 않고 모두 로마자로 기록되고 있는 것과 다른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81) 그렇다면 김대건 신부는 여러 형태의 조선 지도를 직접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에 그는 서울에서 강화로, 강화에서 백령도 부근의 여러 섬들을 답사하면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산과 물길을 가는 곳마다 새롭게 그려갔던 것이 아닐까 한다.82) 이때 다블뤼 주교가 언급한 강화도도 등장한다. 그는 지나는 길에 산천을 그린 일은 자신이 좋아하는 버릇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83) 천주교회의 한 가지 일이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의 습관이라고 볼 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84) 따라서 그는 이를 바탕으로 서해 해안의 섬들과 바위 등 주의할 사항에 대한 새로운 설명들을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85)

 

김대건 신부는 이와 같이 <조선전도>에 대한 수정작업을 통해서 선교사들이 더욱 안전하게 입국할 수 있는 서해안의 루트를 확보하고자 했을 것이다. 때문에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매우 유익할 것으로 확신한다는 평가를 하였다.86) 더 나아가서 <1857년의 가경자 문헌>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가 만든 <조선전도>에 대해서 “사실 유럽에서도 지도 작성자들이 조선 왕국의 지도를 그리기 위하여 김 안드레아가 작성한 지도를 이용하였습니다. 이 지도가 현대의 원칙에 따라 제작된 조선 왕국의 첫 번째 권위 있는 지도입니다. 그 이전에는 북경에 주재하는 예수회 신부님들이 작성한 문헌에서만 조선 국내의 부분들에 대한 지도가 알려졌을 뿐이다.”라고87) 높이 평가받았다.

 

그렇다면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 백령도만을 답사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가지고 있던 서해안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여기에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전도>를 통해서 이를 파악할 수 있다. 경기만 일대를 더욱 정확하고 상세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한강을 통해서 선교사를 입국시키려고 노력한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88)

 

그가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는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백령도만을 주목하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가 지시한 백령도를 넘어서 황해도 해안을 폭넓게 답사하였던 것이다.89) 이때 그가 백령도와 함께 주목한 지역은 장연의 연안에 있는 섬들이었다. 옹진 마합포에서 했듯이 그는 장연 앞 바다인 목동(도)에서 중국 배를 만나서 선교사들에게 보낼 편지와 지도를 전달하였던 것이다.90) 그리고 대진항(대진포)도 답사하였던 것이다.91)

 

그런데 장연 지역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인 18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선교사들의 입국로 가운데 매우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1856년 3월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및 프티니콜라 신부가 장연에 도착하여 신자들의 배로 갈아타고 한강을 통해서 서울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때 그곳을 터진목, 즉 대진항으로 파악하고 있다.92) 그러나 1860년에 들어오면 장연 지역을 대신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메린도를93) 중간기착지로 해서 한강 혹은 내포로 들어오고 있다. 메린도가 최근의 이해를 따라서 월내도라고 한다면 월내도 역시 김대건 신부가 답사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는 장연지역에서 메린도로 선교사들의 입국로가 변경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94) 그것은 메스트르 신부의 언급처럼 페레올 주교가 정한 만남의 장소는 당시까지 백령도였기 때문이다.95) 더욱이 장연의 대진항으로 들어온 베르뇌 주교의 서한에 의하면 1857년 11월 9일에 들어와서 그가 백령도가 아니라 메린도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96) 그리고 그 시기를 1859년 봄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페레올 주교가 강조한 백령도만이 아니라,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백령도 부근의 섬들이 포함되는 장연 지역까지도 함께 개척된 것으로 새롭게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이 김대건 신부가 서해를 통한 선교사의 입국 루트 중에서 백령도와 장연을 크게 주목한 계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영국 함대가 조선 해안을 답사하면서 개척한 해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97) 1816년 중국과의 새로운 교섭을 위하여 파견된 영국의 군함 알세스트 호와 리라 호는 광동항을 출발하여 조선해역 탐사에 나섰는데, 9월 1일에 백령도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후 남하하여 10일 동안 서해를 탐사하여 제주도까지 항해하였다. 1832년에는 영국의 군함 애머스트 호는 조선에 통상교역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는데, 7월 17일에 황해도 장연현 몽금포의 장산곶 녹도에 나타났던 것이다. 영국 함대의 이러한 활동과 함께 백령도와 장연이 서해 해로 상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장소로 부각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대건 신부가 영국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점과 관련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이 중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하는 현장에도 참여한 그는 조선 배로 서해를 건너 상해에 도달한 다음 제일 먼저 영국 주둔군과 영사와 접촉할 정도로 영국과 우호적이었다.98) 따라서 그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영국의 조선 해안 탐사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영국이 만든 세계 지도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그는 체포되어 조선 정부로부터 영국의 세계 지도 한 장을 번역해줄 것을 요구받았을 때 곧바로 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99) 그의 세계 지도에 대한 관심은 함경도를 통한 조선에의 육로 입국을 모색할 때에도 세계지도를 가지고 다녔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100) 특히 좌포도청의 포장인 이응식이 김대건 신부에게 조선 8도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조선 8도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지도까지 그릴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는 사실도 그러하다.101) 이는 그가 상당한 정도의 전문적인 지리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02) 그가 대신들의 지시로 작은 지리 개설서를 편찬할 정도였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김대건이 감옥에서 “후에 교우들이 선교사들을 영입하러 가지 못하게 될지라도 신부님들이 영국 배로 오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103) 언급한 사실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그가 앞으로 조선 연안을 계속해서 방문한 영국 배가 선교사의 조선영입에 프랑스보다 유용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김대건 신부가 보기에 영국보다 뒤늦은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프랑스 함대의 항해능력이 아직까지 영국의 그것까지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04) 김대건 신부 역시 1846년 세실이 충청도 보령 앞바다의 외연도에 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지만,105) 프랑스 함대와 영국 함대의 해상활동 능력이 서로 크게 다르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조선의 김대건 신부와 프랑스 함대의 세실 함장은 처음의 만남에서부터 김대건 신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어긋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2년에 조선으로 항해하겠다는 세실 함장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845년에 그는 조선 배로 상해로 건너가서 다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역시 그러하였다.

 

1846년에 이르러서야 세실이 조선 해안에 도착하였을 때, 김대건 신부는 해로로 통한 선교사의 영입을 도모한 죄로 체포되어 있었다. 이때 김대건 신부는 세실이 조선에 등장하자 자신의 석방에 도움을 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106) 조선 정부 역시 세실이 오자 김대건 신부에게 그를 접촉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107) 그러나 그는 조선 정부에게 위협적인 발언을 던지고 돌아감으로써 오히려 그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말았다.108) 프랑스의 조선 진출 시도과정은 이와 같이 조선의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삶과 죽음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맺음말

 

지금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 입국로가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어떻게 개척되었는가를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그는 조선 후기 천주교 선교사들 가운데 해로와 육로 모두를 이용해서 조선에 입국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충청도의 우강 솔뫼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대건 신부의 삶에서 어떠한 요소가 입국로 개척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아마도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던 고향인 우강 솔뫼 마을의 지리적 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821년 8월 21일 우강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827년 부친을 따라 서울의 청파로 이주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다.109) 《우강면지》(2008)에 자세히 그 모습이 그려지고 있듯이,110) 김대건 신부의 고향이 가진 특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강 솔뫼 마을은 바로 옆에 인접한 삽교천을 통해서 아산만, 그리고 서해로 직접 통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1860년대 이후 서해를 건너온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온 내포의 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강 마을은 바다로의 진출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김대건 신부는 바다라는 교통로가 우강 마을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는가를 보고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향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조건이 김대건 신부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요인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시도한 조선으로의 해로 입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연구는 2016년도 충남대학교 CNU 학술 연구비에 의해 지원되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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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3집, 1996.

- - - - - - - -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1집), 1996.

- - - - - - - - -,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 2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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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현범,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교회사학》 5, 2008.

서종태,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 《교회사학》 5, 2008.

김규성, <19세기 전 · 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와 서해 해로 - 1830년~1850년대를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32, 2009.

양인성, <조선인 사제의 등장>, 《한국천주교회사》 3, 2010.

 

2) 김수태,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방안>, 《교회사연구》 41, 2013.

 

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김대건 신부 연보>,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 2집), 1996, 293쪽. 이하 2집으로 약칭한다.

 

4) 대박청래와 관련된 설명은 조광, <황사영백서의 사회사상적 배경>,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2003, 272∼290쪽을 참고할 것.

 

5) 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견해가 많다(차기진,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과 양박청래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13, 1998).

 

6) 이하의 내용은 김수태, 앞의 논문에서 해로와 관련된 부분만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7)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앵베르 주교 서한》, 2011, 257~259쪽.

8) 조현범과 서종태의 논문을 참고할 것.

9) 김수태,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10) 2집, 157쪽과 161쪽 및 169쪽.

11) 2집, 229쪽.

12) 2집, 165쪽 및 179쪽.

13) 2집, 61쪽을 비롯해서 여러 서한들이 보여주듯이 프랑스 선교사의 서신 왕래나 물품 등이 영국 배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14) 2집, 165쪽.

15) 2집, 163쪽.

16) 2집, 157쪽 및 162쪽.

17) 2집, 161쪽 및 179쪽.

18) 2집, 161~162쪽.

 

19) 김대건 신학생이 선발된 이유에 대해서 페레올 주교는 그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먼저 태워 조선으로 보내기로 하였다고 설명한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3집, 1996, 179쪽). 이하의 내용에서는 3집으로 약칭한다.

 

20) 김대건 신부가 1842년 9월에 쓴 세 번째 서한(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1집), 1996, 49~57쪽)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하의 내용에서는 1집으로 약칭한다.

 

21)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2012, 425쪽.

22) 1집, 57쪽.

23) 3집, 181쪽.

24) 1집, 69쪽.

25) 2집, 191쪽.

26) 2집, 187쪽.

27) 2집, 193~195쪽.

28) 2집, 187쪽.

29) 2집, 192~193쪽.

30) 2집, 219쪽.

31) 2집, 229쪽.

32) 2집, 235쪽.

33) 2집, 237쪽.

34) 2집, 241쪽.

35) 2집, 243쪽.

3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429~431쪽.

37) 2집, 251쪽.

38) 2집, 267쪽.

39) 2집, 255쪽.

40) 2집, 271쪽에 잘 묘사되어 있다.

41) 2집, 253쪽. 이를 정크라고 표현하고 있다.

42) 2집, 263쪽.

43)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313쪽.

44) 2집, 273쪽.

45) 2집, 282~283쪽.

46) 2집, 293쪽.

47) 1집, 213쪽.

48) 2집, 257쪽.

49) 1집, 169쪽.

50) 2집, 249쪽.

51) 1집, 167쪽 및 193쪽과 203~207쪽.

52) 2집, 283쪽.

53) 2집, 275쪽.

 

54)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315~317쪽. 메스트르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산동지역은 1849년까지도 조선으로 가는 항로로 선택되기 어려웠다고 한다(2집, 305쪽).

 

55) 1집, 205쪽.

5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321쪽.

57) 2집, 276쪽.

58) 2집, 269쪽.

59) 2집, 295쪽.

60) 3집, 101쪽.

61) 차기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의 1845년 입국 장소와 강경 유숙지 연구>, 《교회사학》 11, 2014, 157~158쪽.

62) 1집, 353쪽.

63)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315~317쪽.

64) 1집, 363쪽.

65) 조현범과 서종태의 논문을 참고할 것.

66)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008, 304쪽에서 재인용함.

67) 2집, 303쪽.

68) 1집, 361쪽.

69) 1집, 167쪽.

70) 1집, 193쪽.

71) 최석우, <김대건의 <조선전도>>, 《한국교회사의 탐구》, 1982, 281쪽.

72)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상, 1979, 26쪽.

73) 1집, 169쪽.

74) 2집, 263쪽.

75) 2집, 285쪽.

76) 3집, 57~59쪽.

77) 3집, 101쪽.

78) 최석우, 앞의 논문, 285쪽.

79) 3집, 113쪽.

80) 1집, 77쪽.

81) 서종태, 앞의 논문, 198쪽.

82) 3집, 43~47쪽.

83) 3집, 61쪽.

84) 2집, 300쪽과 3집, 49쪽 및 91쪽.

85) 1집, 363쪽.

 

86) 2집, 305쪽. 그러나 그는 2년 전인 1847년에는 이 지도에 대해서 “지리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지만, 섬과 해안들을 인지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2집, 305쪽).

 

87) 3집, 201쪽.

88) 최석우, 앞의 논문, 285쪽.

 

89)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에는 그를 황해도 해안으로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391쪽).

 

90) 1집, 55쪽.

91) 1집, 43쪽.

 

92)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하, 1980, 235쪽의 역주 4번에서는 홍봉주의 공사(供辭)를 따라 장연 대진항(垈陣項) 입사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진항은 위의 책, 101쪽 및 1집, 55쪽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 어선에게 편지와 지도를 전한 터진목으로 파악하고 있다.

 

93) 김정환, <샤를르 달레의 조선지도>, 《교회사연구》 38, 2012. 조선정부는 월내도에서 중국 배를 찾아서 김대건 신부의 편지와 지도를 확보하였다(1권, 107쪽).

 

94) 조현범, 앞의 책, 178~179쪽을 참고할 것.

95) 2집, 303쪽.

 

96) 방상근 선생의 교시에 의한 것임. 이제 Pelintao(백령도)에서 Merinto(월내도)로 바뀐 것이다. 월내도는 베르뇌 주교가 들어온 대진항에서 가까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97) 김원모, <19세기 한영 항해문화교류와 조선의 해금정책>, 《문화사학》 21, 2004.

98) 2집, 255~257쪽.

99) 1집, 379~381쪽.

100) 1집, 167쪽.

101) 3집, 201쪽.

 

102) 1집, 379~381쪽. 그의 지리에 대한 관심은 육로를 통한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할 때 기록한 <혼춘 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는 아홉 번째 편지가 또한 잘 보여주고 있다.

 

103) 1집, 357쪽.

104) 이 점은 별고에서 다루어보려고 한다.

105) 1집, 379쪽.

106) 1집, 381쪽.

107)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507쪽.

 

108)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417쪽에서는 “세실 사령관이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서한은 김대건 신부의 사형집행을 위한 계기가 되었거나, 적어도 그 사형집행을 재촉하였다.”고 보았다.

 

109) 2집, 19쪽.

110) 우강면지편찬위원회, 《(증보판)우강면지》, 2008.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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