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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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자비의 특별 희년: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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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4 ㅣ No.446

[새로봄]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얼굴일까?

 

 

자비의 특별 희년에 나는 ‘자비의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주님의 자비’를 참으로 많이 생각하고, 성찰하고, 체험하였다. 그런 면에서 희년은 큰 은총과 감사의 해였다. 사실 ‘자비의 특별 희년’(2015. 12. 8-2016. 11. 20)이 선포되었을 때,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2000년 ‘대희년’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기념하는‘신앙의 해’(2012. 10. 11-2013. 11. 24)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어서 ‘축성생활의 해’(2014. 11. 30-2016. 2. 2)를 지내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이어지는 특별한 해를 통해 ‘교종이 너무 전대사를 남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 ‘왜 이 시점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특별 희년’을, 그것도 ‘자비의 해’를 선포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교종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문제와 교회의 현실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고민했을 것이고, 지금 세상과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자비’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했을 것이다.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적시하고 있듯이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로 ‘버려지고 폐기처분이 되는 문화’의 확산, 돈의 우상화, 무관심의 세계화, 인간의 무자비한 탐욕에 따른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 생태계의 파괴 앞에서 교종의 제안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자비는 세상을 바꿉니다. 약간의 자비로도 세상은 덜 차갑고 더욱 정의로운 곳이 됩니다”(2013. 3. 17, 삼종기도 중)라고 한 교종의 진단은, 다양한 원인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자비로운 문화’의 복원과 확산은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에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교종은 교회가 자비 문화의 확산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셨다. 왜냐면 교회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즈카르야의 노래>와 <성모의 노래>를 바치면서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를 노래하는 백성이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는 요청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의 특별 희년에 ‘자비의 선교사’로 선택되고 파견되어 활동하면서 ‘얼굴’에 대해서 자주 묵상하며 지냈다. 희년의 칙서 제목이 <자비의 얼굴>이고, 또한 교종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 주고 느끼게 해 주라’고 이르셨기 때문이다.

 

사실 수도자요 사제로 살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얼굴’로 떠올려질까? 또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어떤 얼굴일까? ‘자비로운 얼굴’일까? 등의 질문 앞에서 참으로 많이 반성했고, 이를 통해 정작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다시금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이들이지만 그 이전에 그분의 자비가 참으로 필요한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자비의 특별 희년에 하느님은 내게 어떤 얼굴로 다가오실까?’ 하는 질문 역시 하나의 화두로 내 마음속에 있었다. 실제로, 강의하러 다니면서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 12,7)는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느냐?”고 물으면, ‘기쁘다’는 대답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두렵다’였다.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보다는 ‘두려운 분’으로 더 다가온다는 현실 앞에서,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인(<자비의 얼굴> 11항) 교회의 얼굴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속 ‘큰아들’의 얼굴이 아닌 ‘한없이 기다리고 포옹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계속 자극하고 촉구하시는 교종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보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 우리는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에페 2,4 참조)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여전히 그분의 자비 안에 있는 이들이다. 자비의 특별 희년에 자비의 선교사로서 ‘화해성사’에 오는 신자들을 참 많이 맞이했다.

 

이 성사로 ‘깨끗해지고 싶어서’ 자신의 수많은 어둠과 아픔, 고름투성이 상처, 때론 슬픔과 흉물스런 인생 이야기, 기막힌 시련 등을 쏟아 낸 뒤 달라진 모습으로 고해소를 나서는 신자들을 보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나병 환자의 치유’(마르 1,40-45)가 실현되고 있음을 자주 느꼈다.

 

‘깨끗해져라’ 하시면서 나병 환자를 어루만지는 그분의 자비로운 음성과 손길이 그 순간 그들에게 와 닿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느님의 자비’는 결코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며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었고 여전히 감싸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를 기쁘게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교회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은 우리에게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교종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자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을 제안하셨다(<자비의 얼굴> 15항). 이렇게 구체적 활동을 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의 선교사’이다. 사실 우리는 ‘자비를 베풀면서 자비를 입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된 순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느 날 그가 나병 환자에게 가서 포옹을 하는데,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가 나병 환자를 포옹했지만, 오히려 주님이 그를 포옹한 것이다. 자비를 베풀러 갔지만, 오히려 그가 자비를 입은 것이다. 그리고 나병 환자에게 봉사하면서 그가 ‘선’해졌다고 전기 작가들은 전한다. ‘선善’이신 하느님의 눈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자비의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점만은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이들이고, 주님 자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자비가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자비로운 얼굴을 우리 이웃에게 보여 주길 바라시며, 그렇기에 ‘자비의 선교사’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또한, 우리 서로를, 그리고 피조물들도 ‘자비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자비로운 얼굴’을 보여 주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길 바라신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피조물을 포함해서) ‘남’이나 ‘경쟁자’나 ‘도구’가 아닌 형제로 존재함으로써, 좀 더 따뜻하게 보듬고 치유하며 함께하는 사회와 교회를 만들기를 희망해 본다. 확실한 것은 그분은 늘 이 눈길과 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함께하신다는 점이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

 

* 우영성 신부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199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비의 특별 희년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임명한 자비의 선교사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현재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본원 수호자(원장)로 있다.

 

[성서와함께, 2016년 12월호, 우영성 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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