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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한국 신흥종교의 이해: 그리스도계 이단 종파의 뿌리와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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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06 ㅣ No.891

[한국 신흥종교의 이해] 그리스도계 이단 종파의 뿌리와 전개

 

 

외국에서 들어온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이단’이라고 불리는 신흥종교들은 모두가 개신교에서 파생된 종파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한국개신교의 신앙 흐름과 역사 체험 안에서 발생한 종파들이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초기부터 미국선교사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왔다. 그들이 지녔던 신앙과 선교 정책은 오늘날까지 한국개신교의 주된 흐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선교사들은 세상이란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헛된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일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천국 복락에만 관심을 두도록 가르치면서 한국개신교를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으로 충만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정책은 한국개신교의 신앙을 내세주의와 개인주의로 흐르도록 만들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성경이란 성령에 의해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글자 한 자 틀린 것이 없다는 입장에 따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그 배경이나 문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쓰인 그대로 받아들이는 엄격한 문자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성직자나 평신도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성경 해석에 따라 교파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의료 활동과 교육 사업을 통해 개화와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들은 고통 받는 하류계층을 주 대상으로 삼아 하느님의 사랑과 평등사상을 전함으로써 시민의식과 민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강한 서구문화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과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역사를 저급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끼리만 어울려 살았으며,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각종 이권과 사업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으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일부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호화롭게 사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받아 잘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선교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미국선교사들의 정치무간섭주의에 저항해 다양한 종파 운동 일어나

 

선교사들이 지녔던 신앙적 순수주의는 선교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선교사들은 외세 열강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동정하면서도,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치무관심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활동 일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권력이나 기존의 정치체제를 지지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에 비판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안 된다는 다분히 권력 지향적이고 체제 옹호적이며 보수적인 정책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까지 한국개신교 대다수 교단에 이어져오고 있다.

 

선교사들의 정치무간섭주의는 1905년 일본과 미국이 한일합병을 양해하는 태프트-가츠라(Taft-桂) 비준문서를 체결하자 더욱 강화되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거나 민족 독립을 주장하는 신자들을 단죄하거나 교회 밖으로 축출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인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를 순수하고 초월적이며 경건한 신앙으로 충만하도록 이끌었다.

 

당시, 신자들 가운데는 개화파 지식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개신교가 개화와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지녔던 민족의식과 개종 동기는 선교사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민족과 국가의 위기 상황은 외면한 채,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기를 바라는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는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개화파 지식인들은 물론 민족의식을 지녔던 많은 신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다.

 

이러한 반발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파 운동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에 저항하는 종파 운동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개인적이고 초월적이며 내세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의 가르침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과는 맞지 않는다는 ‘신학적 이단종파 운동’,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사명은 끝났으니 이제 조선교회는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반(反)선교사 종파 운동’, 민족과 국가가 당하는 수난을 외면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는 ‘반(反)교권적 종파 운동’,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면서 복음은 받아들이되 어떤 형태의 종교조직체도 거부하고자 하는 ‘무교회주의 종파 운동’, 망국과 식민 수탈에 따른 고통을 신비 체험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신비주의 종파 운동’, 민족사를 하느님의 구세사라는 측면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민족주의 종파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단 종파 운동은 해방, 분단 6.25 겪으며 더욱 활발해져

 

이러한 흐름 가운데 특히 이용도와 이호빈이 이끌었던 신비주의 종파 운동과 여러 갈래의 민족주의 종파 운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되었다. 그러면서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 이단 종파들의 뿌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에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면서 신비주의 계열의 종파를 만들었던 황국주, 스스로를 말세에 출현할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성주교를 만들었던 김성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다음에는 제3의 시대인 ‘새 생명의 길 시대’가 온다고 주장하면서 ‘천국결혼’이라는 행사를 벌여 큰 논란을 야기하였던 백남주, 통일교를 만든 문선명과 전도관을 만든 박태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등은 모두 이용도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종파를 세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통일교를 세운 문선명은 학생시절 이호빈의 ‘예수교회’에서 주일학교 반사생활을 하였고, 이호빈 목사의 주례로 첫 결혼식을 치렀었다.

 

이단 종파 운동들은 해방과 분단 그리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통일교·전도관·용문산기도원·새일수도원 등은 6.25 전쟁 직후 등장한 이단 종파들이었다.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전통적으로 삶의 기반이었던 마을과 친척의 기능이 약화되고 기성교회가 중산층 중심으로 변모하는 상황에서 이단 종파들은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과 기성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단 종파들은 계속 분열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면, 박태선 장로가 세운 전도관에서도 많은 분파가 나왔는데, 그들 또한 오늘날까지 계속 분파되고 있다. 전도관에 참여했던 김종규는 호생기도원을 세웠고, 호생기도원에서 유재열의 장막성전이 파생되었으며, 유재열의 장막성전에서 다시 최병준의 이삭교회, 심재원의 무지개증거장막성전, 백만봉의 세계기독교복음반포회(새창조교회), 구인회의 천국복음전도회(새미을전도회), 김풍일의 새빛실로중앙등대교회가 분파되었고, 백만봉의 새창조교회에서는 오늘날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이만희의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 나왔으며, 이만희의 신천지로부터 홍종효의 증거장막성전이 갈라져 나왔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기독교복음선교회(JMS)의 창교자 정명석은 1970년대에 통일교에서 전도사로 활동한 경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2월호, 노길명 요한 세례자(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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