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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내며: 자비의 희년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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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20 ㅣ No.419

[경향 돋보기 -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내며] 자비의 희년 무엇을 했나

 

 

한해 동안 교회는 자비의 희년을 거행하면서 ‘자비’를 기념하고, 가르쳤으며, 실천하고자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 덕에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내면에 하느님의 자비가 깊이 새겨졌으리라 기대합니다.

 

물론 자비의 희년이 끝났어도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우리가 거행해 온 자비의 희년에 대하여 그 의미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비의 성문 열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과 함께 세계의 모든 교구에서 자비의 문을 열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비에 초대하였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문을 여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결정적인 어떤 순간에 하느님의 자비가 꽉 닫혀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열린 교회’를 만들려고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먼저 바티칸에서는 가정을 주제로 두 차례의 시노드를 개최하면서 가정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고 동행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혼 뒤 재혼한 신자들에 대한 영성체 허용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혼인 무효 소송 절차는 대폭 간소화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이들에게는 교회의 윤리적 장벽이 너무 높아 주님의 자비를 체험할 기회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각 교구와 본당에서는 순교극과 영화제, ‘거리의 대중과 함께하는 선교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소외된 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종합해 보면 희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교도소나 병원에서 있었던 일부 행사를 제외하면 성당에 잘 나오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행사가 대부분이었다는 데에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혹시 교회 내 행사들과 ‘우리끼리’의 모임으로 바빠서 적극적으로 문을 열고 초대하지 않는다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는 밖에 있는 이들에게 ‘닫힌 교회’로 비칠 것입니다.

 

 

자비의 문으로 들어가기

 

자비의 문으로 들어가야 할 첫 번째 대상은 신앙인들입니다. “부활시기 없이 사순시기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복음의 기쁨」, 6항)이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희년에는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1) ‘주님을 위한 24시간’과 고해성사

 

전 세계의 모든 신앙인이 같은 날에 ‘주님을 위한 24시간’에 참여하여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도록 권장하였는데, 실제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본당에서 진지하게 참여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이 판공성사 기간이어서 참여도가 더 높았던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각 교구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설 고해소를 운영하며 신자들이 쉽게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특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쉬던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2) 순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향한 순례를 지속하게 되는데, 올해에는 자비의 문을 통과하며 순례를 마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각별히 체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특히 걷는 행위는 인간이 순례자라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도보순례를 적극 권장하였습니다.

 

그동안 각 교구에서 다양한 순례 코스를 개발하며 도보순례를 장려한 일이 자비의 희년에 빛을 발하여 순례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자비의 희년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호응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3) 전대사

 

하느님의 자비가 믿는 이들의 삶의 깊은 데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였습니다.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는 도보순례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성문을 거쳐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기도를 하면 전대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옥에 갇힌 이들의 경우 감옥의 문을 넘어갈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기도를 드린다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최소한의 성의만 표현하면 누구나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평상시에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의식하면서 감히 하늘을 바라보는 일마저도 포기하던 이들이 전대사의 은총을 열망하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4) 자비의 영성 심화

 

자비의 희년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국적으로 많은 강연회와 세미나, 특강, 피정이 실시되었습니다. 또한 신자들이 소공동체 모임을 비롯하여 다양한 모임 기회에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 칙서인 「자비의 얼굴」을 직접 읽고 묵상하며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전례와 사제들의 강론을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묵상하여 영적 감각이 새로워지고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우선적인 노력은 성경 말씀을 통해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일입니다. 평상시에 교회가 늘 해오던 일이라서 새롭게 강조되지 않은 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다른 활동에 비해서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자비의 문으로 초대하기

 

마태오 복음의 행복선언은 자비의 대원칙을 제시합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5,7). 자비를 입는 일과 베푸는 일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비의 얼굴」은 자비를 베푸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1) 자비의 선교사 파견

 

교황청에서는 세계의 모든 교회에 자비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자비를 선포하고 특별히 사도좌에만 유보되어 있는 사죄권을 부여하여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의 사제에게는 이미 그러한 사죄권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비의 선교사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비의 선교사 개념을 응용하여 교리교사나 소공동체 봉사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화 활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자비의 선교사’라는 호칭을 부여하여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각별한 소명의식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들을 통해서 자비의 희년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2) 자비의 영적 활동

 

자비의 영적 활동 일곱 가지는 마음을 바꾸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며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인의 내면과 교회 공동체 안에 자비가 넘치도록 하며, 하느님을 잊었거나 모르는 이들도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향에 따라 자비의 희년 기도를 바치면서 이웃에게 자비롭게 대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중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쉬는 교우에 대한 권면과 선교활동입니다. 지금까지 보기에는 예년에 비해 두드러지게 많은 결실을 거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비를 충실히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 결국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리라고 기대합니다.

 

3) 자비의 육체적 활동

 

자비의 육체적 활동 일곱 가지는 대부분 최후의 심판 때의 판정 기준을 그대로 제시한 것입니다(마태 25,31-46 참조).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든 이들 돌보기를 직접 실천하도록 권합니다.

 

가끔 우리는 성경 말씀을 너무 융통성 있게 해석하다 보니 본디의 의미를 놓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흔히 소외된 이웃을 위해서 단 한 번도 힘든 수고를 하지 않으면서 헌금을 하는 것만으로 의무를 다 이행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향 때문인지, 자비를 실천하려고 했지만, 직접 자기 몸을 움직여 자비의 육체적 활동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비의 과업을 이어가려면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 교회는 자비의 특별희년을 맞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런 노력들이 자비의 문이 닫히면서 함께 중단되지나 않을지 염려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50년째 되는 날에 자비의 특별희년을 시작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새 복음화를 오늘의 교회가 더욱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해 가도록 요청하셨습니다.

 

특히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제자 공동체의 생활을 가득 채우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21항)이어야 한다며,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27항) 바꾸라고 권고한 일을 우리는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 새 복음화를 위해 교구나 본당의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일이나, 교회 내의 활동과 밖으로 나가 선교를 하는 일 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입니다.

 

새 복음화는 종래의 틀을 고수하면서 기존 활동을 되풀이하거나 더 많이 하자는 것이 아니라, 열정을 새롭게 하여 달라진 문화와 환경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복음화하자는 것입니다.

 

더욱 역동적인 새 복음화를 위해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건설하고 자비를 실천하면서 세상 복음화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교구와 본당 구조의 변화를 진지하게 모색해야 되겠습니다.

 

* 김광태 야고보 - 전주교구 신부. 1993년 사제품을 받고 교구 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였다.

 

[경향잡지, 2016년 12월호, 김광태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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