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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토리노의 말 - 살아야만 해, 그리고 희망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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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30 ㅣ No.970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살아야만 해, 그리고 희망해야 해

 

 

이번에 소개해 드릴 영화는 헝가리의 영화감독인 벨라 타르의 2011년 작, 『토리노의 말』입니다. 이 영화는 세찬 바람이 끊이지 않는 광야의 외딴 집에서 늙은 말과 늙은 마부 그리고 그의 딸에게 벌어진 6일 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들의 매일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을 것입니다. 딸은 아침에 일어나 물을 긷고, 화덕에 불을 지핀 다음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마부를 도와 옷을 입히고 마차를 채비해 일을 떠나보낸 뒤 집안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마부와 함께 찐 감자 한 알씩을 먹은 후 창을 통해 세찬 바람이 부는 광야와 그 너머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6일 동안 그 이전의 삶과는 조금씩 다른 일들이 벌어집니다. 첫째 날, 58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기둥을 갉아대던 나무좀의 소리가 멈춘 것을 시작으로 둘째 날에는 늙은 말이 멍에를 지고 수레를 끄는 것을 거부합니다. 셋째 날에는 집시들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딸에게 성경처럼 보이는 책 한 권을 주고 떠나갑니다. 넷째 날에는 우물물이 말라버려 이들은 집을 비우고 떠나지만 웬일인지 그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에는 빛이 사라지고 기름이 가득 찬 램프마저 꺼져버립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바람마저 멎어버린 심연이 찾아옵니다.

 

6일 간의 소멸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창조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구조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변화를 바라보는 두 인물의 태도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삶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마부에게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집시들이 다가올 때도 자신은 나서지 않은 채 딸에게 내쫓으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우물을 침범하자 도끼를 들고 나가 그들을 쫓아냅니다. 또한 우물이 말랐을 때 마부는 즉시 짐을 싸서 떠납니다. 그러나 빛이 사라졌을 때는 의아해 할 뿐, 그 다음날이면 다시 밝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마부에게 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딸에게 물은 정화와 청결의 수단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세수를 하는 데에 필요할 뿐 아니라 언젠가 입을 날을 기다리며 매일 하얀 드레스를 세탁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딸에게는 빛(불)이 중요합니다. 딸에게 빛은 음식을 데우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영화 속 몇몇 요소들은 강조되거나 반복해서 제시되어 관객에게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딸의 드레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영원히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이 옷을 딸은 매일 손질합니다. 우물이 마르고 집을 떠나려 할 때도 딸은 드레스와 반짝이는 가죽구두를 가장 소중하게 챙깁니다. 또한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 말라버린 우물, 그리고 사라지는 빛까지, 이 영화에서 변화하는 요소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 환경에 대한 것들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환경 안에서 생존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첫 번째 대사는 딸이 마치 관처럼 보이는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마부에게 “식사하세요.”라고 건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 역시 불이 사라져 유일한 양식인 생감자를 씹으며 마부가 딸에게 “먹어야만 해”라는 말입니다. 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말에게 “그러면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날 생각해서 마셔”라고 말합니다. 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희망입니다. 마부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며 희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제시되는 말의 멍에는 이것들이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임을 알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영화의 제목인 『토리노의 말』에서 이미 예상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연관되는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는 니체의 일화를 말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1889년 토리노에서 늙은 말이 마부에게 채찍을 맞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마부를 말리다가 미쳐버린 니체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니체의 사상을 대변하거나 그러한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전해 주는 니체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 술을 구하러 온 짜라투스투라를 연상시키는 사내에게 마부는 “헛소리 집어치우게.”라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우물이 말라버리자 떠나간 그들이 왜 돌아오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말이 움직이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고 집시들이 물을 구하러 그곳까지 왔던 것을 미루어 보면 언덕 저 편에도 이미 물이 말라버렸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는 것 보다는 인간의 의지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감독의 장치로 읽는 것이 현명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의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 역시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영화도 아니고,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로 보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神)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이 죽은’ 세계에서는 현실만이 존재할 뿐 피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저버리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게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두 가지 외침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살아야만 해. 그리고 희망해야 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여름호(Vol. 34), 이창민 세례자 요한(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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