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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복 대상자 약전: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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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30 ㅣ No.1591

[시복 대상자 약전]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

 

 

보이론수도원, 1906년 11월 19일 생, 독일 로텐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 루드비히

첫서원 : 1929년 6월 29일

사제 서품 : 1934년 8월 5일

일본 파견 : 1937년

한국 파견 : 1940년

소임 : 주교 아빠스 비서, 덕원 수도원 오르간 연주자, 덕원 신학교 교수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1월 15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그레고리오 조르거(Gregor Sorger, 金, 1906-1950) 신부는 1906년 11월 19일, 독일 로텐부르크(Rottenburg) 교구 슈파이힝엔(Spaichingen) 투틀링겐(Tuttlingen)에서 아버지 레오폴트 조르거(Leopold Sorger) 박사와 어머니 파울리네 할러(Pauline Haller) 사이에서 태어났다.  루드비히(Ludwig)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의 밑에는 남동생 둘이 있었다.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평온하지 못했다. 공중보건의였던 아버지가 부임지를 옮길 때마다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1925년 3월 13일자, 로트바일(Rottweil)에서 발급된 김나지움 졸업시험 합격 증명서에는 가톨릭 신학 연구에 몰두할 의향이 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튀빙엔(Tubingen) 대학에 입학하여 다섯 학기동안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수도생활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27년 11월 12일,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는 보이론(Beuron) 수도원에 입회했다. 1929년 6월 29일, 첫서원을 하고 마리아 라흐(Maria Laach) 수도원에서 철학과 보이론 수도원에서 신학을 이수했다. 당시 수도자가 300명 정도 되던 보이론 수도원은 학생과 교수를 자체적으로 충원했다. 1932년 6월 29일, 종신서원을 했고 1934년 8월 5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제서품을 받기 이전에 그는 이미 일본에 새로 생긴 도노가오카(殿ヶ丘) 수도원으로 파견되기로 결정되었다. 첫미사를 봉헌할 때 사용한 성작에는 도노가오카 수도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도노가오카 수도원은 교황 비오 11세의 요청으로 일본에 세워진 보이론 연합회 소속 수도공동체였다. 1931년, 보이론 수도원에서 파견된 수도자들이 도쿄 인근에 작은 수도원을 세웠는데, 1934년에는 후지산이 바라보이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지가사키정(茅ヶ崎町) 도노가오카로 수도원을 옮겼다. 도노가오카는 도쿄(東京)에서 약 90km 떨어져 있다. 도노가오카 수도원은 1936년 2월 25일, 정식으로 개원했다.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는 1937년 4월 18일, 고별미사를 집전하고 란델린 이비크(Landelin Ibig) 수사와 일본으로 떠났다. 1937년 6월 23일, 그들이 도노가오카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안타깝게도 신생 공동체는 좌초 위기를 겪고 있었다. 1940년 2월 2일, 도노가오카 수도원은 증여의 형식으로 모든 토지, 건물, 물품과 함께 덕원 자치수도원구로 넘겨졌다. 덕원 수도원은 오래전부터 필요했던 일본 내 거점을 마련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새로운 아빠스좌 수도원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도노가오카 수도원은 해산되었고 전쟁으로 귀국길이 막힌 수도자들은 흩어졌다. 애초에 그는 수사 세 명과 함께 브라질의 보이론 연합회 소속 수도원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어를 구사하지도 못하는데 그곳에 가봐야 의미있는 활동을 하기는 무리였다. 그는 계약 체결 직후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와 함께 덕원 수도원으로 왔다. 그 말고도 오딜로 람로트(Odilo Ramroth) 신부, 베드로 골더(Petrus Golder) 신부, 발레리아노 루드비히(Valerian Ludwig) 수사가 덕원 수도원으로 정주를 옮겼다.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는 독일을 떠난 이후 덕원에서 처음으로 편안함과 만족을 느꼈다. 그는 덕원 수도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훌륭하고 경건하고 종교적이며 수도승적 정신과 구성원들 간의 우호적이고 신실한 관계가 공동체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덕원 수도원에 안착한 그는 수도 공동체의 보배가 되었다. 그는 덕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독일어, 영어,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소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대신학생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는 일주일에 30시간까지 수업을 맡은 적도 있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그를 비서로 데리고 다녔고 예전에 법학도였던 그의 유능함에 매우 흡족해했다. 수도원 성당 오르간 주자인 그는 음악 수업과 연계하여 신학생들과 작은 연주회를 종종 개최했다.

 

안셀모 로머 학장신부(앞줄 왼쪽),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뒷줄 왼쪽), 덕원 신학생들.

 

 

해방이후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는 전설같은 일화를 만들기도 했다. 어느날 소련군 장교와 사병들이 수도원 성당에 나타나자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오르간 음악을 연주했다. 마음이 가라앉은 군인들은 수도원에 행패나 야료를 부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다. 나중에는 소련군 장교들이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 그는 수도원이 폐쇄되는 순간까지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그가 기획한 마지막 연주회는 1949년 5월 1일에 열렸다.

 

1949년 5월 9일과 11일, 두 차례 걸쳐 정치보위원들이 덕원 수도원을 수색했고 독일인 신부와 수사, 그리고 한국인 신부들을 체포해 평양으로 압송했다. 그는 다른 독일인 동료들과 함께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을 일으켜 초반에 승기를 잡았던 북한군이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자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만 했다. 죽음의 행진은 10월 25일, 만포에 이르렀다가 압록강을 건너 10월 27일에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으로 갔다가 다시 만포로 이어졌다. 만포 관문리 수용소는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의 마지막 삶의 현장이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디오메데스 메퍼트(Diomedes Mefert, 1909-1998) 수녀의 증언으로 대신한다. “우리가 수감된 참호는 탁 트인 대지 위에 허술하게 지붕이 덮인 매우 추운 방이었다. 당시에 먹을 것이라고는 가끔 삶은 옥수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는 이 시기의 고난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운명했다. 글자 그대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 얼어 죽은 것이다. 그때가 11월 15일이었다. 그의 시신이 조용히 누워 있을 수 있는 옆방조차도 없었다. 그는 실제로 우리 참호 안의 통로에 눕혀져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의 시신에 몸이 닿는 상태로 지나다녀야 했다. 그는 평소에 겸손했던 대로 자신이 자리를 막았다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그는 그곳에 누워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자료출처 -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Necrologium(2015, 오딜리아 연합회)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여름호(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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