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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특강: 병인순교와 현대사회의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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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30 ㅣ No.790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특강] 병인순교와 현대사회의 평신도

 

 

한국평협 전반기 연수회가 ‘평신도! 21세기 백색순교의 주역’을 주제로 지난 7월 8~9일 서울 마포구 절두산순교성지 내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회관에서 열렸다. 이 글은 연수회 중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특강’ 때 발표한 원고를 간추린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시간은 변화를 수반한다. 시간을 다루는 학문인 역사는 그 변화를 추적하고 변화가 가지고 있는 원인과 의미를 탐구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 순간은 변화의 장면이다. 그러나 크로노스(chronos)로서의 시간은 그 질적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1000년 전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최근 100~200년간에 걸쳐 진행된 시간의 질적 특성과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역사의 서술과정에서는 이전의 다른 시기와는 다른 격변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후반 조선왕조가 처해 있던 상황은 한국사가 종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격변기였다고 규정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한반도는 새롭게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태평양을 건너 서진(西進)해 오던 미국은 중국과 일본을 지나 조선에 이르고 있었으며, 인도양을 건너 동진(東進)해 오던 영국과 프랑스도 또한 중국을 넘어서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서진(西進)과 남진(南進)을 거듭하던 러시아의 경우에는 1860년 베이징조약 이후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면서 조선에 대한 진출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감안하자면 조선의 19세기는 격변기임에 틀림없다. 조선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국내외적으로 일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864년 고종(高宗)이 새롭게 왕위에 올랐고, 대원군의 ‘세도’(勢道)가 진행되었다. 특히 1866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인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올해는 그 병인박해 150주년에 해당되는 해다.

 

 

2. 박해와 침략의 양상들

 

박해의 사전적 의미는 “힘이나 권력 따위로 약한 처지의 사람을 못살게 굴거나 해를 입힌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박해라고 할 때는 특정 종교 신앙이나 사상 또는 인종에 대한 탄압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용어를 교회사적 입장에서 사용할 경우에 ‘박해’는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당국자(권력자) 내지는 가문이나 지역에서 일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천을 실정법이나 관습법의 위반으로 규정하여 이를 반대하며 탄압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박해가 일어나는 데에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게 마련이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확인해 보자. 이를 시험에 비유하면, 필요조건은 ‘응시 자격’, 충분조건은 ‘합격 자격’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조선왕조에서 진행된 천주교 박해의 근본원인으로는 먼저 당시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충돌’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당시 조선에 수용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이론 상당부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성리학적 태극론(太極論), 이기론(理氣論)은 그리스도교적 창조론, 섭리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한 유교적 오행설(五行說)은 그리스 자연철학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적 사행설(四行說)과 충돌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성리학적 오륜 체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지배층에서는 천주교를 멸륜폐상(滅倫廢常)으로 규정한 바가 있으며, 권철신(權哲身, 1736-1801)도 “사학에는 오륜이 없다.”(邪學卽無五倫也)고 단언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윤리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유교적 윤리와 다름을 말했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에 따른 사상적 충돌은 ‘현세적 사회질서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나타났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군주와 천주를 대비하면서 군주권 내지 왕권을 천주의 신권을 말하며 상대화시켰다.

 

무엇보다도 당시 천주교도들은 창조주 천주로부터 나온 피조물(被造物)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과 평등성을 말함으로써 신분제적 권위의 상대화 작업을 수행했다. 그들은 실천적 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백정 출신 황일광(黃日光)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잘 알면서도 신도들이 자신을 교우(敎友)로 맞아들이는 데에 감격하여 자신은 현세에서도 벌써 천국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의 신도들은 일반인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삶의 방식을 신앙 취락인 ‘교우촌’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병인박해의 과정에서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신도들이 처단 당했다. 이 과정에서 리델 신부를 비롯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몇몇 조선인 신도들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선교사들은 베이징에 주재하던 프랑스의 벨로네 대리공사에게 자신들과 자신의 동료들이 처했던 상황을 보고했다. 이에 벨로네는 조선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조선국왕의 폐위를 선언하면서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대한 침략을 단행했다.

 

 

3. 그 죽음에 대한 해석

 

역사에 대한 해석은 근대역사학의 전개과정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근대 역사학에서는 역사란 사실과 해석의 결합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66년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두 가지의 입장이 존재하고 있다.

 

1866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해석은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이 성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즉, 1890년대 중반기 이래 조선에 대한 일제 침략을 경험했고, 얼마 안 가서 국가 주권의 상실을 체험한 일단의 국가주의적 지식인과 연구자들은 국가 주권의 절대적 가치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근대사를 조명해 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병인양요나 제너럴셔먼호 사건, 오페르트 사건과 같이, 서양세력의 조선침입이라는 사건은 조선이란 국가의 존재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이러한 사건과 연계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도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기 이래 공산주의 운동과 함께 ‘역사적 유물론’이 수용되고 있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대세력으로 자임하면서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서양 제국주의 침략’ 또는 ‘서양 자본주의의 침략’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과 연계되어 죽음을 당한 조선인에 대해서 당연히 부정적 평가를 하게 되었다.

 

한편, 유물사관적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사건의 해석에도 몇몇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유물론적 역사 진영에서는 전제적 왕조국가에 대한 도전을 정당시하며 이와 같은 사건을 일반적으로 긍정 평가해 왔다. 전제적 왕조국가는 궁극적인 극복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1866년의 사건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되었던 전제적 정치 · 사회 · 문화적 질서에 대한 신도들의 도전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침략세력의 앞잡이로 인식하고 매도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제국주의 내지 식민주의의 앞잡이로 파악하려 했던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는 대 항해 시대 이후 그리스도교 선교와 결탁한 신대륙에 대한 침략에서 유래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당시 스페인 교회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도했던 encomienda(유럽인이 인디오의 영혼을 구제해 주는 대가로 그들을 강제노역에 종사시키던 제도) 등을 현지인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非)그리스도교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일반적으로 침략의 전구(前驅)로 인식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에 있어서 신앙의 자유는 조선사회가 이해하고 인정하는 자유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다른 편지에서 자신들이 박해를 받아 죽더라도 신앙의 자유는 조선인 스스로가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무력적 개입을 반대했지만, 외교적 교섭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화적 방법으로 담판을 통해서 중국에 천주교 선교의 권리를 보장받게 한 드 몽띠니(M. de Montigny) 같이 단호하고 헌신적인 전권 대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조선의 그리스도교 운동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두가 조선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었다.

 

한 사회에서 체계가 다른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게 되는 것은 그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8~19세기 조선은 새로운 사상과 사회의 출현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은 외국 선교사의 직접적 도움이 없이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지역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침략세력과 결탁되어 있다는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조선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는 없다.

 

 

4. 순교의 의미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행위를 우리는 치명(致命)=순교(殉敎)라 하며, 자신의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을 치명자=순교자라고 한다.

 

‘치명’이란 단어는 《주역》(周易)이나 《논어》(論語) 등의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단어였다. 《주역》에서는 곤괘(困卦)에 대한 해설 과정에서 “군자(君子)는 목숨을 내던져[致命] 뜻을 이룬다.[遂志]”는 말이 나온다.[《周易》, 〈困卦〉 第四十七, “象曰, 澤无水, 困, 君子以致命遂志.”] 그리고 《논어》에서도 ‘선비는 (국가나 의리가)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던진다.’[士見危致命]고 말했다.[《論語》, 〈子張〉 第十九, “子張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여기에서 말하는 선비 즉 사(士)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지배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주역》이나 《논어》가 저술되고, 경전으로 존중되던 당시에는 치명의 주체가 군자(君子)나 사족(士族)으로 제한되고 있었다. 그래서 ‘치명’이란 행위는 당시 사회에서 군자나 선비와 같은 예(禮)를 알고 실천하는 특수한 계층이 특정한 가치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기 희생적인 행동을 뜻했다.

 

치명이란 용어는 천주교의 수용 이후 교회의 용어로 차용되어 정착되어 갔다. 그런데 조선후기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신분이 높지 않은 일반 민인(民人)들이었다. 지배층에게 한정되던 이 용어가 지배층의 배격을 받던 한미(寒微)한 신분의 천주학도에게 적용되고 있었다. 이는 민인(民人) 출신이 주류였던 천주교도들을 군자(君子)나 사족(士族)과 동일시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원래 순교[martyreo]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증언하다’,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교 박해 단계에 이르러 교부들은 이 단어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이라는 차원에서 ‘순교’라는 말로 번역했다. 오늘날 천주교의 역사신학에서는 순교의 개념 안에 광의(廣義)와 협의(狹義)의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광의의 개념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 행위 모두를 순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교라 할 때에는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를 협의로 규정할 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순교자는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고’,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 제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순교의 배경적 사상으로 한국문화적 요소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시의 순교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한국문화의 어우름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대군대부에 대한 대충대효론(大忠大孝論)이 순교를 가능케 한 힘 중의 하나였다. 이로써 한국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이해하고 섬기는 특이한 방법을 세계 교회에 제공했다. 즉, 조선후기 천주교 신도들에 있어서 천주교 신앙과 충효라는 전통사상의 결합이 순교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또한 신앙을 획득한 이후 그들이 실천했던 새로운 생활은 순교의 정당성을 설명해주는 또 다른 기제로 작용했다. 천주교의 교리는 새로운 인간관과 이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관계의 구성을 강화시켜 주었다.

 

한편 당시의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사상이 가지고 있는 평등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은 모두 다 형제이므로, 감히 형제를 업신여길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에서 조선후기 천주교도들은 수직적 관계를 기반으로 했던 당시의 신분제적 인간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전환시켜 가고 있었다.

 

또한 현실사회에 대한 도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1866년의 박해시대 신자들, 특히 순교자들의 신앙실천과 순교는 자의식(自意識) 여부와는 상관이 없이 당시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 었다. 조선왕조가 자행했던 전근대적(前近代的) 사상통제와 신분제적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또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출현했던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였다. 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전선에서 산화한 전사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순교는 단순히 신앙적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행위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해시대 조선 천주교회와 신도들은 순교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직접 피를 흘리는 순교 이외에 일상 생활을 통한 순교를 언급하여 순교의 외연을 넓혀 나갔다. 즉, 순교에 대한 협의의 이해와 함께 이를 광의로 해석하여 일상적 기도나 선행도 순교(를 준비하는) 행위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 일생의 순교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그는 순교라는 개념을 순교자의 피 흘리는 순교 이외에 일상생활에서 진행해 나가는 평생에 걸친 순교의 중요성까지 말해 주었다. 이처럼 순교의 개념은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순교의 개념이 확대 발전되는 과정에서 최근에 이르러 순교란 단어는 신앙을 위해 죽은 이들 만을 지칭하는 용어로부터 일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신앙의 실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신앙의 표현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은 이들도 사랑의 순교자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82년에 거행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 Kolbe)는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諡聖)되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던 인물이었다.

 

 

5. 나가는 말

 

병인박해 당시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나갔고, 이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강요당했다. 그들은 믿음이 곧 사랑이며 소망임을 확인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인간의 평등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던 이러한 삶을 통해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순교라는 교회사적 사건은 한국사와 무관하거나 오히려 해를 입히려던 침략과 연계된 행동으로 규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적 사건임과 동시에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들의 소망은 한국사회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행동으로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오늘의 한국사는 역사적 격변기에 해당하던 1866년의 사건의 희생자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긍정성을 평가할 단계가 되었다. 즉 1866년의 사건들은 제국주의 침략이나 자본주의 팽창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국가주의적 해석이나, 유물사관적 해석에 입각하여 이를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천주교 순교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과정에서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실천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자였다. 또한 자유로운 신앙의 실천이 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간절히 소망했던 사상자유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오늘의 평신도들이 병인 박해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들이 감행했던 순교의 의미가 신도 공동체 안에서만 의미를 가졌던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사회를 위해 새로운 믿음과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확실한 소망을 심고자 했던 행동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교회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닫힌 순교가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를 향해서 열려 있는 열린 순교였다.

 

오늘 우리는 150여년 전에 죽은 그러한 순교자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머리에 담아두는 일로 그칠 수는 없다. 순교에 대한 기억에는 당연히 그들의 모범을 따르려는 결심을 수반하고 있다. 기억은 실천을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죽음을 강요하는 박해는 없다. 그러나 마땅히 실천할 사랑이 있다. 오늘의 순교는 사랑이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오늘의 사람이라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순교자는 큰 소망을 이루려던 사람들이었다. 오늘의 신자들은 크고 바른 소망을 제시하여 이를 이루어나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의 이웃과 이 나라와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우리가 이러한 결심을 다지고 이를 실천해 간다면 오늘의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 정의와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 2016년 가을호(VOL.53), 글 조광 이냐시오(고려대 명예교수), 정리 서상덕(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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