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령은 보이는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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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57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령은 보이는 분이신가?(Kann man den Heiligen Geist sehen?)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은, 저녁이 되어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또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 상처를 바라봄으로써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봅니다. 이 복음의 본문은 장황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아주 간결합니다. 그리고 이제 결정적인 장면을 전합니다.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하느님의 숨

 

이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기 2장 7절의 이 말씀은 물론 상징적 언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겨진 진리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땅의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먼지로 돌아갈 존재이지요. 하지만 그런 존재를 성령께서는 인간이 되게 하십니다. 희망과 동경으로 충만한 생명체가 되게 하시지요. 물론 인간은 많은 면에서 여전히 동물과 비슷합니다. 또 자주 아예 동물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인간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와 선을 찾고 무한을 갈망합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신 것을 찾는 것이지요.

 

인간이 땅의 먼지와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을 놓고 보면, 요한 복음서 20장 22절은 결국 성령에 의한 ‘새’ 창조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새 창조의 영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시고 현양받으신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런데 이 새 창조는 교회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제자들의 파견과 함께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은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용서에서 교회가 생성됩니다. 성령의 작품이요 새 세상의 시작인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하지만 그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감지할 수 있지요. ‘숨’은 성령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숨은 온화함과 부드러움, 생명력과 온기, 고요함 등을 나타냅니다. 지나치기 쉽지만, 그러한 부드러움이야말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나이 사건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모습의 성령 강림을 묘사하는 듯합니다. 성령께서는 거센 바람 속에서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형상으로 제자들에게 내리지요(사도 2,2-3 참조).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2장 7절이 아니라, 바로 탈출기 19장 16-19절입니다. 시나이 산기슭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은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토라(Tora)를 받습니다.

 

유다인들의 오순절 축제(Shavuot)는 신약성경 시대에 이르러 단지 추수감사절의 성격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미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구원사적 축제가 되어 있었지요.

 

성전 순례 축제이기도 했던 이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깊이 흔들어 놓는 성령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체험을 곧바로 시나이 사건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당신 백성에게 토라를 주셨듯이, 이제 새롭게 모인 제자 공동체에게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서로 화해하고 거룩하게 된 하느님 백성에게 종말에 약속된 하느님 영이 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 강림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리시어 제자 공동체를 사로잡는 이야기지요. 곧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 동료들에게 돌아옵니다. 그들은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언하고 돌아온 참이었지요. 그들의 귀환은 공동체에 자발적인 감사 기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루카는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고 말합니다(사도 4,31 참조).

 

요한 복음서 20장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성령은 감지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뒤흔들리는 사건이었지요.

 

 

오늘날에는 왜?

 

하지만 이런 반문이 듭니다. 그 모든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하느님 예배를 위해 모인 공동체 위로 불타는 혀 모양의 성령이 내린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성당 안이 거센 바람으로 일렁이고, 우리가 딛고 선 바닥이 뒤흔들린다면…? 어찌하여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는가?

 

이런 반문 뒤에는, 일단 성경 본문의 핵심은 외면하고 성령 강림 사건을 경건한 옛이야기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반문은 본질을 비껴간 질문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성령은 감지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시 성령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뒤흔드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으로 살고 성령께서 자신을 이끄시도록 내어 맡기는 사람은 거짓으로 점철된 사람의 삶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한 공동체와, 그렇지 않고 두려움과 억압에 사로잡혀 있으며 침울하고 풀이 죽어 있는 공동체, 서로 갈라져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공동체의 차이를 누구나 단번에 구별할 수 있지요.

 

 

성령의 체험 장소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성령 자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상징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비둘기 형상은 임시방편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 이유가 어느 정도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성령에 대한 본래의 상징은 함께 모인 공동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한마음으로 모인 공동체, 누구에게나 모두 호의로 대하는 믿음 깊은 공동체,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야말로 성령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적합한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성령 강림 사건은 예부터, 기도하는 가운데 한 마음으로 모인 열두 사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한가운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시지요. 이 모습이야말로 성령 강림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보이는 구체성은 바로 거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혀 모양의 불꽃보다는 함께 모인 공동체의 겸손과 믿음, 한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과 믿음, 한 마음에서 우리는 성령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요한과 루카가 성령을 보이는 차원으로 묘사한 것은 올바른 일이었지요.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제2독서의 말씀으로 봉독되는 코린토 1서 12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 은사들, 곧 ‘성령의 선물들’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는 은사는 이런 것들입니다. 곧 지혜를 전하는 은사, 지식을 전하는 은사, 믿음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을 하는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등이지요. 그리고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은사를 따로따로 나누어주신다는 것입니다(1코린 12,8-11 참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감지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체험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로 공동체에 나누어진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그런 것이지요.

 

예를 들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믿음의 은사’를 생각해봅시다. 이 믿음의 은사는 마음속에만 숨겨진 채로 머물지 않습니다. 밖으로 빛을 발하지요. 온 존재를 다해 믿는 거룩한 사람에게서 교회는 빛을 발합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공동체는 빛나고, 그런 이들의 굳센 믿음의 길을 따라 우리 역시 걸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열거한 다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달리 말해, 그 모든 은사들을 넘어 공동체 자체가 성령의 보이는 기적이라는 뜻이지요. 교회 자체야말로 성령의 보이는 기적,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위로자이신 성령

 

성령 강림 대축일의 모든 말씀이 한결같이, 성령은 감지될 수 있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말씀도, 코린토 1서의 말씀도, 요한 복음서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이 점은 제2독서 다음에 이어지는 부속가인 ‘성령송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속가는 중세에서 유래하는 아주 아름다운 찬미가인데,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잉글랜드의 대주교 랭턴(Stephen Langton, 1150년경-1228년)이 지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성령송가’에서도 성령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빛이시라고 노래합니다. 슬프고 외로울 때 위로를 주고, 지치고 힘들 때 휴식을 주는 분, 차디찬 것 데우고 굳은 것 풀어주고 메마른 것에 생기를 주는 분이시라고 노래하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침투하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바로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한 번 경험하기만 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달콤함으로 우리 안에 남으십니다.

 

이 성령송가에서는 인간의 노력이나 영웅적인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열성적인 종교적 행위나 자기 극복과 고행에 대해서도, 도덕적인 성취나 윤리적인 재무장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송가의 끝부분에서 신뢰에 대해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송가 전체가 어린이와 같은 청원이지요. 성령은 순전히 선물로 오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쳐들기만 하면 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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