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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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2: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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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3 ㅣ No.1481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2)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겸손해지십시오”

 

 

-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육화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면서 그 사랑에 온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고자 하였다.

 

 

5.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Ⅱ

 

겸손(humilitas)과 인간(homo)이라는 단어는 다 같이 ‘humus’(흙, 먼지)라는 라틴말에서 온다. 흙이 흙 자체로는 비옥한 땅이 될 수 없고, 오직 적절한 온도와 빛, 수분, 양분 등을 받을 때 비옥해질 수 있듯이, 인간 역시도 그렇게 흙과 같은 존재로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보살핌 속에서만 풍부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온전히 고백하는 삶이 바로 가난한 삶이고, 겸손한 삶이다. 달리 말하면, 겸손하고 가난한 삶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의탁하며, 그분으로부터 받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며 그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자기 내어줌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살아가기로 서약한 ‘작음’과 ‘겸손’과 ‘가난’은 결국 하느님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이며, 그런 가난과 자기 내어줌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동시에 우리 서로 간에 나누며 살아가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육화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면서 그 사랑에 온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고자 하였고, 또 그를 따르는 형제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그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요한 11,27)

사제의 손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높음이며

경이로운 공손함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토록 겸손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시편 61,9).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참조: 1베드 5,6; 야고 4,10).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회에 보낸 편지’ 26-29절)

 

 

5.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Ⅲ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로 인해 온 세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삶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하시는지를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보잘것없으며, 존재와 사랑의 원천이신 분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더 많이 숙고하게 해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순간도 어김없이 삶의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계속해서 내어주시는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성체성사 안에서 여실히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기고만장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숙고해보아야 한다. 이 상황은 어찌 보면 우리더러 조금 더 겸허하게 하느님과 세상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살펴보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주도권을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은총도 주어지고 복도 주어진다는 ‘인과응보’의 정신구조를 어려서부터 배워왔고, 이런 정신구조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무의식의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모든 것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주님은 당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거저 은총(gratia-무상의 선물)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선업이나 공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 공로나 선업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주도권을 넘겨드리지 않는 신앙생활은 절대 믿음의 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쉽게 말하자면 하느님만이 하느님이셔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도권을 온전히 넘겨드리려는 깨어있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지닌 하느님의 모상이 무언지를 알고, 하느님과 일치되어있는 참 자아를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신앙생활이나 수도생활은 ‘깨어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핵심이 들어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에 얼마나 깨어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조금 더 철학적으로 말자면 행함(doing)이 아니라 존재(being)가 우리 삶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참으로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행하는 바나 나의 업적, 위치, 능력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벌거벗겨진 채 서 있는 나’, ‘하느님과 일치되어있는 나’, ‘하느님 은총 안에 존재하는 나’를 얼마만큼 깨어 바라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5,45)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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