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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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1) 초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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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07 ㅣ No.285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1) 초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체에 대한 공경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그 양상을 조금씩 달리하여 왔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당신의 교회에 그 거행을 명하신 성체성사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교회의 처지에 따라, 신학과 전례의 발전에 따라, 또는 사목상의 이유로, 성체성사의 거행과 그에 대한 이해는 계속 변화되어 온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성체성사는 지금도 발전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비롯한 성체에 대한 공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특히 미사성제와 영성체 참여에 대한 이해는 어떠하였던가를 알아봅니다.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만찬

 

성체성사는 초세기부터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 곧 ‘감사의 예(禮)’, ‘감사의 말’ 혹은 ‘감사의 기도’라는 말로 불리었는데, 이 용어는 ‘감사의 기도’를 노래하면서 행하는 성찬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용어는 빵과 포도주가 ‘기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된다는 성체성사의 신약성서적인 기원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3-26) 라는 성경말씀이 그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령강림 이후 먼저 (유대교) 성전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어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집에 모여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감사의 의식, 곧 주님의 만찬을 지냈습니다. 이 만찬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는 공동체가 나누는 ‘사랑의 만찬’으로 다함께 나누는 ‘식사’였고 ‘잔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배불림의 식사’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이때의 성찬례였는데, 이 배불림의 식사는 만연하는 남용(1고린 11,17-34 참조) 때문에, 또 공동체 식구가 점점 불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져갔습니다.

 

이렇게 차츰 일반 식사에서 분리되어 거행된 감사의 의식, 곧 성찬례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도교 고유의 ‘성체성사’로 곧 ‘미사’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차츰 유대교와는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어 간 것입니다. 이때 신자들은 축성된 빵을 예식에 참가하지 못한 신자와 가난한 사람, 병자,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체성사가 박해시대의 신자들의 삶에 큰 힘이 된 것이지요.

 

 

성체에 대한 경외심의 태동

 

사도 이후의 초기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심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이 신자들의 삶과 윤리, 도덕의 기준이 되었고, 그분께서 남겨 주신 성체성사는 현세의 모든 음식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해서 전해 주고 있는 초기사료가 많지는 않지만, 사도시대 직후에 저술된 ‘12사도의 가르침’(디다케)에 따르면 신도들은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고, 이웃들과 불화 가운데 있다면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2세기의 호교 교부인 유스티노(Justinus, 100?-165?)가 전하는 다음의 기록에서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음식을 우리는 성체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우리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믿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죄를 용서하고 생명의 재탄생으로 이끄는 세례욕에서 씻었던 사람이 아니면 이 음식의 한 몫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예물을 보통의 빵이나 보통의 음료처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말씀을 통하여 육(肉)이 되셨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취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께 향한 기도를 통해서 감사기도 아래서 축성된 음식은 그렇게 우리의 살과 피를 변화시키고 양육하기 위하여 이 예수의 살과 피가 되기 때문이다.”(호교론, 66장)

 

이때의 신자들이 성체를 배령함에 있어 경외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체현시’나 ‘성체강복’ 같은 미사 밖의 성체공경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생교회는 그때까지도 전통적인 유대교 신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대교 조직의 기본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는데, 우선 미사 밖에서 성체를 보관하는 일은 교회의 모태인 유대교의 관습에부터 어긋났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유대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 안식일 전날을 제외하고는 그날 먹을 것 외에 더 모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또 빠스카 기념제에서 제물인 양을 먹을 때에도 그날 다 못 먹게 되면 불을 살라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를 보관하는 관습의 시작

 

성체를 보관하는 관습은 당시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고 했지, 언제 다음 날까지 보관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습니까?”(레위기에 대한 5번째 강론) 그런가하면 축성된 제병은 만나처럼 금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혹은 다음날까지만 보관할 수 있다고 한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견들 때문에, 또 유대 관습과 불일치 한다는 이유 때문에 미사 밖에서 성체를 보관하고 공경하는 일이 공식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으면 부제들이 직접 그들에게 성체를 모셔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신자들이 미사 밖에서 개인적으로 성체를 보관하고 공경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습은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그리스도교적 관례로 보입니다. 즉 신자들은 (아직 4세기경까지는 매일미사가 일반화되지 않았기에) 미사 후 성체를 집에 모셔가서 매일의 첫째 음식으로 영하기도 했고, (박해시대엔 미사거행이 어려웠기에) 성체를 몸에 지녀 보관하며 공경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초대 아프리카 교회의 성체에 관한 신앙의 증인으로서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를 들 수 있는데, ‘교회에서 정한 단식일에 성체를 영하면 그것 때문에 단식을 깨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식 날에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단식을 깨고 싶지 않은 신자는 성찬례 때 ‘주님의 몸’을 손에 받고 그것을 다음날까지 간직했다가 영할 수 있다.”(De oratione, 19)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훗날 금지가 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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