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8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온유한’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프라우스(praus)’는 야생동물이 길들어 온순해지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였습니다. 인간의 영역에서 이 단어는 자신을 훈련해 부드럽고 비폭력적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을 비폭력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비폭력이 외적 흥분과 대립하는 반면, 온유함은 육정의 내적 폭발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은 나태, 무기력, 우유부단, 두려움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견고한 인격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온유함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땅의 소금으로 남도록 하는 내면의 힘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마음이 진정되고 유순해지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침착함과 균형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암브로시오 성인은 온유한 이들이란 시기의 가시가 아무리 찔러도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 누가 화를 내며 대들어도 어지럽힐 수 없는 사람, 거친 행동에도 흥분하지 않는 사람, 격분으로 불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동안 주님의 평화를 더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에 영혼이 당하는 온갖 싸움을 평정합니다. 온유한 이들은 온화하고 겸손하며 잘난 체하지 않고 믿음에 충실하며 모욕을 당할 때 참습니다. 또 자신이 행하는 선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온유한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그분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마치 모세가 빛나는 구름을 앞서 가지 않고, 여기저기로 가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던 것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께 저항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이들은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서 온유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들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한 사람 한 사람을 꼭 안아 줄 만큼 연민을 지닙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간통한 여인을 심판하시기를 바랄 때에도,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3,17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과도 화합하기를 바라십니다(마태 18,15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유다인이 온유함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자질로 여긴 것은 옳습니다. 하느님의 지도를 구하며 거룩한 법에 순종하는 것을 회한하거나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역시 온유를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로 선포했습니다(에페 4,2; 콜로 3,12; 갈라 6,1 참조). 성령의 선물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온유한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나타나기를 청원합니다

 

온유한 이들에게는 성령칠은 가운데 효경이 주어집니다. 이 은총을 통해 그들은 성경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며 존경하고, 읽고 경청하며,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그 편지 내용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지?’ 하며 몇 번이고 읽어 봅니다. 비록 지금 성경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까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주님의 기도 중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청원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 때의 광채처럼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기를, 곧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분의 다스림이라고 한다면, 우리 마음이 그분의 통치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온다는 것은, 영혼이 육신을 이끌고, 여러 가지 내적 충동에 대항해 싸워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온유한 이들이 차지할 ‘땅’은 시편 142,6에서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땅입니다. 이는 자녀로서 누릴 영원한 유산의 영속성과 견고함을 상징하며, 오직 내적으로 변화된 힘으로 얻게 되는 자기 마음의 땅입니다. 이 땅은 성도(聖徒)가 살게 될 일종의 하늘이며, 그래서 산 이들의 땅이라 불리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영혼이 그 땅에서, 육신이 지상에서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감정을 통해 안식을 누리고 고유한 음식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땅’은 평화이며 성인들의 안식이요 삶입니다. 그렇기에 땅을 소유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과 내적으로 친밀하게 결합하는 것이고, 온유하신 하느님께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온유한 이들은 위의 것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집을 이 세상에서 찾지 않고 하늘에서 찾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거처로 마련해 드리기 위해 항상 마음을 주님께 드높이 올립니다. 그의 마음은 살아 있는 보석들로 꾸며진 방과 같아 하느님께서 기꺼이 머무르십니다. 그렇기에 온유한 이들은 악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악의 부추김에 넘어가지도 않으며, 악행에 동의하지 않고 악을 선으로 극복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땅을 지금 소유하고자 한다면, 유의하십시오. 당신이 온유하다면 땅을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정하다면 땅이 당신을 소유할 것입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변종찬 마태오]



2,60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