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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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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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7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코헬 1,14는 세상의 재화에 대한 바람을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교만한 이는 바람에 의해 팽창된 것처럼 부풀어 오른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로마 11,20)하라고 권고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권위에 순명하므로 잘난 체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곧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마음으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령칠은(聖靈七恩)이 참행복의 일곱 단계와 상응한다고 봅니다. 겸손한 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timor Domini)’ 은사를 지닌 사람입니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집회 1,14 참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과 내가 다른 존재라는 사실, 곧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시지만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여,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피할지 압니다. 더욱이 이 두려움은 장차 올 죽음에 대한 인식을 날카롭게 하여 교만의 모든 요동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결국 마음의 가난은 회심의 단계입니다.

 

아울러 아우구스티노는 행복 선언을 주님의 기도에 나타나는 일곱 가지 청원과 연결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에 상응합니다. 이는 누구도 하느님보다 더 거룩한 이가 없음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혹여 그 이름을 모독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부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두려움을, 종이 갖는 두려움과 자녀가 갖는 두려움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때 그들이 마음 아파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곧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청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순결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이 나옵니다. 겸손을 뜻하는 라틴어 humilitas는 ‘땅’이라는 뜻의 humus에서 나왔습니다. 어원상으로 겸손은 땅에 가깝기에 비천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라틴어 어원으로 볼 때, ‘흙’이라는 단어와 ‘사람’이라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어 만든 존재이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자신이 사람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도록 합니다.

 

반대로 교만은 동등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게 하면서 노예로 만듭니다. 또 창조주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선물이거나 빌린 것, 그것도 잠시 빌린 것인데도 교만은 이러한 것에 집착하고 소유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교만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하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마음의 가난은 이 세상의 재화와 추이(推移)에 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평온한 이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현재에서 벗어나 영원을 추구하는 이에게서 발견됩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원의(願意)가 가난한 사람이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는 하늘 나라는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어떻게 높아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꽉 찬 것은 하느님께서 채우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공허함과 깊은 가난만을 채우실 수 있으며, 그대의 ‘예’는 비어 있음 또는 비움의 시작입니다 …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아무것도 아님을,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뻐하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이를 고백하도록 이끕니다. 죄의 고백은 회심의 여정에서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우들을 방문할 때 약속을 정해서 가면 집이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들르면 한 분도 곧장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집 안에서는 왠지 모를 부산함이 흘러나오는데, 어떤 분은 자녀들을 밖으로 내보내 저와 대화하게 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끈 후 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요. 이렇게 누군가를 초대할 때는 청소부터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1코린 3,16 참조) 늘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시기 위해 정리 정돈을 시작하는 것이 회심의 단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인정한다, 그러니 청소할게!’ 하는 겸손의 단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얻습니다.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는 거룩하게 살기 위해, 선에 항구하기 위해 늘 하느님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면서 성령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아울러 재화를 소유하였다 해도 그것이 참된 부유함이 아님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것, 즉 마지막 날에 더는 부족함이 없으며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참된 재화를 받기를 희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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