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가톨릭 교리

신앙교리: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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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4 ㅣ No.2003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 (1)

 

 

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또 나를 사랑하셔서 자원하여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사제는 성찬례 중에 그리스도의 성찬례 제정의 말씀을 전하며 말합니다. –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이 말씀대로 그분은 어쩔 수 없는 사건을 당하여, 혹은 뜻밖의 불행을 겪어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계획하시고, 미리 알고 계셨던 그대로 죽임을 당하신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삶의 유일하고 위대한 목표인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조금도 남김이 없이 당신의 삶 전체를 그야말로 송두리째 바치신 것입니다. 9세기에 열렸던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힘입지 않은 사람은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853년 퀴에르시 공의회)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수난의 힘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을 위해서도 돌아가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도 수난하시고 운명하셨다는 것,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자원하여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그러면서도 우리의 무지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그런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지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죄와 무지함에 아파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아파하고 회개하고 보속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당신께 닥친 수난과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께 바친 기도는 이러한 당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 26,39) 그 수난의 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피땀을 쏟으시며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신 그 수난을 ‘내가 받아야 할 세례’ 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원하여 수난하시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크신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에 응답을 드립시다.

 

 

주님을 기억하여 행하는 성찬례

 

주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수난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우리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 신비는 오늘날 모든 미사성제에서 재현되고 있지요. 우리를 위한 구원을 현재화하는 것이 미사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을 기억하여 행하는 기념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열심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열렬한 마음의 준비로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기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 수난의 요청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수난하셨다는 말은 그분의 수난에 내가 관계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관계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그분의 수난에 나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왜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넓게는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나에 대한 일종의 요청이 아닐까요? 그분의 수난은 나로 하여금 당신 수난에 감사하고, 그렇게 수난하신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이 나를 행동하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과 뜻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수난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노력하는 것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의 소명이 아닐까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저 수난하시고 죽으시기만 했다면 그분께 대한 우리의 신앙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죽은 자가 부활하리라는 소망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분, 우리 구원의 주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인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은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바로 나의 곁에,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맙시다.

 

 

나를 위해 수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나의 믿음은 나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음을 겪으셨으나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즉 십자가의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믿음이지요. 십자가 위에 달리셨던 구원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의 구리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 니다. 모세는 뱀에게 물린 백성들에게 왜 하필 구리뱀을 쳐다보라고 했을까요? 물론 뱀이라는 존재가 당시 사람들에게 영생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뱀이라면 다시 쳐다보는 것부터 끔찍할 사람들에게 구리뱀을 쳐다보는 행위는,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지 않을까요?

 

십자가는 죄인이 받아야 할 극형의 상징이었지만, 그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달리셨던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믿음을 잘 드러내는 기도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와 함께 생명을 주는 십자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잘 드러내는 ‘성호경’이지요. 레지오 단원 여러분! 경건하게 십자가를 그으며 기도할 때마다 나를 위해 수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분께 대한 나의 믿음을 고백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5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 (2)

 

 

고통과 시련을 겪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고통 없이 영광이 없고 죽음 없이 부활이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시련 없이 살아가기는 정말 힘들 수밖에,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살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도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는 결코 존경받는 위치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사람은 어떠할까요? 대개는 많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때로는 너무나 억울하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의 고통과 시련에 직면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나를 위해 겪으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시고 엄청난 고통을 맛보신 그분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예수님의 이 말씀에 루카복음사가는 ‘날마다’를 덧붙여 전하고 있습니다.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내 자신을 버리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일생의 과업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일찍이 시편을 번역하신 고 최민순 신부님은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주여,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치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내 앞에 놓인 험한 산, 나를 가로막는 고갯길, 내가 걷는 길에서 부딪치게 되는 돌들을 하느님께서 치워주시고 옮겨주시도록 기도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설 힘을 주십사 기도하신 신부님의 마음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가 걷는 십자가의 길이 너무나 힘들어 주님께서 나를 외면한 듯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매일 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 수 있는 우리는 사는 동안 어디까지나 어려움과 시련과 고통을 발판으로 영광의 날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어 주시니 말입니다!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참아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왕이면 큰 문으로 들어가 넓고 편한 길을 걷고자 하는 우리에게 그 문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니 오히려 생명으로 이끄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불편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한 말씀처럼 들리지만 그대로 따르기 쉽지 않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본성을 역행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요? 고통과 시련과 불행 등 온갖 어려움이 나에게 닥쳤을 때에도 가던 길을 멈추거나 돌이키지 않고 한 결 같이 가던 길을 계속가야만 할 터인데 말입니다.

 

한비야의 책 ‘그건 사랑이었네’를 보면 자신의 잘못도 없이 에이즈에 걸린 한 아프리카 청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청년이 사는 집의 담벼락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본 한비야가 그 청년에게 “자신이 이렇게 된 데 대하여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원망은요,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아직은 모릅니다. 왜 하느님이 절 에이즈에 걸리게 하셨는지를. 그러나 저는 지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저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걸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욥처럼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한비야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웃는 청년의 믿음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에이즈에 걸리게 했느냐고 울고불고 원망하며 난리를 쳤겠지. 이 청년의 기도가 바로 성숙한 감사의 기도일 거다. 눈에 보이는 은총은 물론 고통으로 가장한 은총까지, 감사할 수 없는 것까지도 감사하는 기도 말이다.” ‘고통으로 가장한 은총’,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은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고통에 대해서도, 감사드릴 수 없는 것에 대해서까지도 감사할 줄 아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높은데서 사슴처럼’이란 영성서적에는, 목자의 일을 하고자 하는 주인공 ‘두려움’을 친척들이 방해하고자 사촌인 ‘비겁함’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가운데, 두려움이 목자의 인도로 수치의 골짜기에서 달아나 높은 데에 오르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과연 완덕의 길이라고 할 높은 데로 가는 길은 어렵고 위험하게 묘사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떤 흠이 있어도, 또 어딘가가 불완전해도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다리를 사슴의 다리처럼 날래게 만들어 높은 데서 살게 하고자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높은 데서 살기를 우리 스스로 고대하는 것이고, 높은 데서 살게 되기 전에 내 자신이 먼저 바뀌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가슴에 사랑을 심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 가슴에 사랑의 꽃이 피어 있어야만 우리가 사랑의 왕국에서 살 수 있을 것이고, 두려움과 모든 고통까지 몰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어디서나 그분을 부르면 그분은 우리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도움을 청하면 즉시 도우러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기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써 사랑의 주님을 더 잘 알게 되고 그분과의 온전한 일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내가 어쩔 수 없이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거나, 어둠 속을 걸으며 빛을 보지 못하거나, 광풍에 시달리며 위로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다면, 목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 두려움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참아내어라! 그러면 너는 사랑의 왕국에서 나와 함께 살게 되리라!”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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