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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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02 ㅣ No.568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제의 삶

 

 

1988년 독일 유학 시절의 일입니다. 겨울방학 기간이었던 어느 날, 덴마크 지방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성탄을 앞두고 미사를 봉헌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12월 중으로 꼭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던 신부님들이 모두 일정이 있어 독일에 있던 나에게까지 연락이 온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던 독일에서 그곳까지는 열차로 꼬박 1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나 역시도 당시엔 다른 일들이 있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결국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청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 기차를 타고 덴마크로 향했습니다. 내키지 않았던 일정이어서 그랬는지, 열차를 착각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내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어느 역에 내려 추위에 떨면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날의 추위는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매서웠습니다. 말 그대로 고생길이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작은 역이었습니다. 열차에서 내리니 중년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나고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나타난 나를 보며, 새벽부터 나와 걱정하며 기다렸다고 울먹였습니다. 그분들은 사제를 매우 오랜만에 보는 눈치였습니다.

 

서둘러 이동하는 차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려고 17명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니, 내가 고작 17명을 위해 이 먼 곳까지 왔단 말인가, 내가 사는 독일 주변에만 해도 수백 명의 신자들이 한국 신부가 없어 우리말로 미사를 지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데!’라는 생각과 동시에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그 후로 약 한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난 듯한, 간절하고도 애틋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얼굴을 보고 나는 투덜거렸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작은 미사였지만 가장 큰 기쁨과 행복 느꼈던 시간

 

고해성사를 드리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미사 중에 한 분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가 가르쳐준 한국어로 미사를 볼 수 있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이 사람들에겐 너무나 감격스럽고 애절한 것이었습니다.

 

미안하면서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담아 강론을 시작하며 “솔직히 전 여기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나니, 주님이 절 여기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제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어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모든 신자가 “신부님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드렸던 어느 미사보다도 작은 미사였지만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날 신자 분들은 기차역까지 나와 환송해주었습니다. 어느 분이 제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과 이제 이별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신부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그 말이 유난히 마음 아팠습니다. 한 자매님은 가는 길에 먹으라고 김밥까지 손수 만들어주셨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저를 지켜보며 손을 흔드는 그분들을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독일로 돌아오는 차창 밖에는 소리 없이 흰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

 

그날 이후 그분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 성체를 모시며 감격하던 눈빛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분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이고 축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제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부귀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묵시 14,13)라는 말씀은 사제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혹 중에 가장 피하기 어려운 유혹은 주님의 길과 반대로 가면 편안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사제는 누구보다도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사제 역시 나약한 인간이며 죄인이기에 부족함을 안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제로 사는 것보다 사제로 죽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첫 미사에서 선배 신부님이 해주신 말씀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사제로서 성실하게 사는 것이 모든 사제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4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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