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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9: 만리장성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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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8 ㅣ No.941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9) 만리장성을 넘다


고조선 땅을 밟다 … 조선에 가까이 더 가까이

 

 

-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광무성을 통과한 후 8km 밖에서 숙박을 하고 그 길로 3일을 걸어 대동에 도착했다. 사진은 광무에서 대동으로 가는 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9월 22일 산서대목구청을 떠나 일주일 만인 9월 29일 만리장성의 외벽에 도착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여행 일정과 딱 맞다. 앵베르 주교 역시 산서대목구청에서 태원까지 하루 반나절, 태원에서 만리장성 남쪽 성벽까지 닷새가 걸렸다. 

 

만리장성 남쪽 성벽 입구가 바로 대주(代州)이다. 지금은 대현(代縣)이라 하는 이곳의 시내 주막에서 관문 관원에게 미리 통행증을 얻은 후 만리장성 남쪽 산기슭에 있는 안문관(雁門關)과 산 정상, 그리고 성벽 북쪽 산 밑에 있는 광무(廣武) 등 세 관문을 거쳐야만 대동부(大同府)로 갈 수 있다. 

 

“제법 높았지만, 사람들이 내게 겁을 준 위험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산을 하나 오른 다음에, 우리는 만리장성의 외벽을 만났다. 그것은 대형 중국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지선들로 만리장성 남쪽에 표시된 구불구불한 선이다. 이곳은 밑에서부터 보았을 때 단지 큰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곳이 구멍 나고 무너져 있지만, 예전에는 사방이 모두 벽돌로 덮여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 벽돌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 이곳 큰 구릉까지 닿아 있는 산들의 협곡에는 흙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몇 개의 세관 초소가 있다. 이것은 밀수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행객들의 금품을 강탈하기 위해 세워졌다고들 말한다. 가벼운 언쟁이 있었다. 한쪽 사람들은 충분히 주지 않으려 하고, 다른 쪽 사람은 지나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내 우리는 타협점을 찾았고 여정을 계속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안문관은 대상들의 무역길이었다. 바위에 난 수레 바퀴 자국이 얼마나 많은 교역이 이뤄졌는지를 보여 준다.

 


만리장성 관문을 차례대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첫 번째로 만난 만리장성 관문은 바로 안문관이었다. 기러기가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의 안문관은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해발 1700m의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 고대 춘추시대 때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어진 안문관은 “안문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안문을 잃으면 중원을 잃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최후의 방위선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동쪽 끝인 산해관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했고, 고비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관문인 가욕관을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 부르며, 안문관을 ‘중화제일관’(中華第一關)이라 했다. 

 

안문관은 또한 서역대상의 주요 교통로였다. 대상들의 무거운 짐수레가 바위를 닳게 해 바퀴 길을 낼 정도였다. 그래서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짐수레의 크기와 수에 따라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챙겼다. 관병들이 얼마나 뇌물 챙기기에 바빴으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안문관 통과 때 “나라는 존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안문관을 무사히 통과한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왜웨라는 하급 관리가 지키는 산꼭대기 관문을 지난 후 북쪽 마지막 관문인 광무로 향했다. 안문관에서 광무까지 만리장성은 토성이다. 지금도 끊어지고 무너진 토성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광무 고성은 산서성 산양현 남쪽 40㎞ 지점에 있다. 이곳은 한나라 당시 흉노와 동이가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던 지역이다. 고조선과 흉노가 서로 다투다가 한 무제가 이곳을 점령했고, 고구려가 강해지면서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나중에 발해 요에 넘어갔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광무 고성은 돌로 쌓은 입구 벽을 보면 마치 명나라 시대 옹성처럼 보이지만 ‘고구려성’이라고 한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雉)가 군데군데 확연하게 설치돼 있다. 치는 성벽 일부를 앞으로 나오게 쌓아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과 좌우 측면에서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을 말한다. 학자들은 또한 광무 고성이 고구려성인 증거로 휘어진 입구를 제시한다. 한족들은 성문을 일(一)자 형태로 만들지 절대로 휘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고성이 있는 마을은 개발로 폐가가 많았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나이 든 이들만 양과 염소를 방목하고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산서성 정부에서 광무 고성을 관광지로 개발한다니 이 도심의 풍광도 조만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안문관을 통과한 후 광무까지의 만리장성은 주로 토성으로 이뤄져 있다. 곳곳이 무너지고 끊겨 있어 세월의 흔적을 말해 준다.

 

 

고조선 땅인지도 모르고 

 

광무 현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고조선 땅을 밟고 고구려성을 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답사를 떠나기 전 이 지역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땅이라는 건 알았지만, 현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를 보면 정작 그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한 우리 민족의 삶 터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만리장성에 감탄해 진나라 시황제를 비롯한 중국 연대기만 장황하게 적고 있다. “그들의 제국이 설립된 것은 약 4000년, 다시 말해서 70인역 성경의 연대기를 채택한다면 대홍수 훨씬 이전으로 그리고 히브리어 텍스트와 불가타 성경의 연대기를 따른다면 노아가 신아르 평야로 내려간 얼마 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광무를 빠져나가면서 관리들에게 대주에서 받았던 만리장성 통행증을 반환했다. 주교 일행은 성에서 약 8㎞ 떨어진 곳까지 더 가서 숙박했다. 광무에서 잠을 자는 것은 신분을 들킬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3일을 더 걸어 산서성의 마지막 관문인 대동에 도착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26일, 글 · 사진=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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