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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71: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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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31 ㅣ No.486

[추기경 정진석] (71)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김수환 추기경을 당신 품에 받아주소서”

 

 

- 정진석 추기경이 2009년 2월 19일 김수환 추기경 입관 예절에서 분향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2009년 2월 16일 명동 주교관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교구청 전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꾸리아 신부들에게 회의를 지시했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위중하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건강이 악화돼 2008년 8월부터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이미 여러 차례 위중하시다는 소식이 있었고, 신부들이 병원에서 비상대기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다시 깨어난 김 추기경은 “내가 며칠이나 잤나? 미안해서 어쩌나”하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곤 했다.

 

2008년 10월 말 아침에는 병원에서 김 추기경이 위험하다는 기별이 와서 정진석 추기경이 바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김 추기경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긴 잠’에 빠져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옆에 앉은 정 추기경은 두 손으로 김 추기경의 손을 한참 잡고 있었다. 김 추기경의 손은 마르고 힘이 없었지만, 마치 아버지의 손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잠든 김 추기경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정 추기경은 직감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정 추기경도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행히 며칠 후 김 추기경은 깨어났다. 

 

다음 해인 2009년 초부터 김 추기경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리고 2월 16일 오후 6시 12분쯤 마침내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善終)했다. 향년 87세로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일순간에 한국 사회를 슬픔에 빠트렸다. 선종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사 기자들은 앞다퉈 성모병원과 명동으로 급파됐다. 

 

당시 서울대교구 대변인을 맡고 있던 나는 병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에게 처음 공식 발표를 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 안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통해 하는 모든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빈소는 명동대성당에 마련될 것이고 5일장으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주변 의사와 간호사분들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셨고, 문병 온 신부님 수녀님들께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정 추기경은 명동대성당에서 김 추기경의 빈소를 마련하고 많은 사제들과 신자들과 함께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정 추기경은 선종 즉시 추모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빛과 희망이 되어주셨다. 평소 추기경님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성모병원에서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평소 생명 나눔을 강조했던 김 추기경은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힌 바 있었다. 그리고 1990년 1월 안구 기증 신청서에 서명했다. 선종 후 일부에서는 김 추기경의 연세가 많아 장기 기증이 실제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 선종 후 즉시 각막을 떼어 두 사람에게 기증이 이뤄졌다. 

 

밤 9시쯤 되어서야 김 추기경 시신이 명동에 도착했다. 시신은 사제들에 의해 명동대성당 안으로 운구됐다. 정 추기경은 다가가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김 추기경의 이마에 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얼굴을 들어 김 추기경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참았던 슬픔이 치밀어 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 추기경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50년 가까이 김 추기경과 맺은 인연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 추기경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김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늘 저희들과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전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하늘에서도 빛이 돼 주셔서 저희를 비춰주세요. 주님! 김수환 추기경님을 당신 품에 받아주세요!’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정 추기경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큰 형님처럼 기댈 수 있던 김 추기경을 이젠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고아가 된 것만 같아 쓸쓸해졌다. 

 

다음날 새벽부터 조문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동대성당 안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은 유리관에 안치돼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살아왔던 김 추기경은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목자의 모범이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의 선종은 교회 신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5일 동안 명동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40만 명에 이르렀다.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온 젊은 어머니부터 검은색 정장 차림의 어르신까지 추모객들은 종교와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고인을 기렸다.

 

2월 16일 오전 10시 김 추기경을 떠나보내는 장례 미사에서 강론하는 정 추기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시대의 성자인 김수환 추기경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치셨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였습니다. 평소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미사가 끝나자 33번의 조종이 울렸다. 그리고서 김 추기경의 관이 명동대성당을 빠져나갔다. 운구 행렬이 장지를 향하자 줄지어 늘어선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손수건 등을 흔들며 “안녕히 가세요, 추기경님” 하며 인사를 건넸다. 장례 행렬은 용인 성직자묘지로 이동했다. 일반 시민들은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 잠시 멈춰 목례로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하관 예절을 마친 정진석 추기경은 마지막으로 흙을 떠서 김수환 추기경의 관 위에 뿌렸다. 흙은 꽃잎처럼 관 위에 흩어졌다. 정 추기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아쉬운 인사를 하는 듯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정 추기경은 이제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29일, 허영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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