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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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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6 ㅣ No.1041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성 프란치스코가 구세주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를 마음에 두었다. 그의 봉사 생활, 그리스도 닮음(Imitatio Christi),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시공간상으로 멀리 계신 구세주가 아닌, 성체성사 안에 매우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연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도 열렬했으며, 너무도 진실하고 생생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이전의 어떤 성인과도 다른 성체 공경심을 지녔다.

 

이는 성인이 가진 여러 신심 중 하나가 아닌 바로 신심 자체임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심지어 성체 신앙을 지니지 않은 역사가도 성인의 수도생활에서 성체 신심이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해서 이 신심은 어느 정도 그의 신앙의 혼이 되었다고 말한다. 성 보나벤뚜라는 “원죄 없으신 양의 현존은 그를 그 자신에게서 늘 이끌어 내곤 하였기에 그는 자주 탈혼하였다”고 했다.(대전기 9장 2절)

 

그의 프랑스 말과 관습에 대한 애정도 성체 공경심에서 기인했다.(2첼라노 201) 그가 언젠가 멀리 있는 관구에 그의 주거를 정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성모님의 이름으로 나는 프랑스 관구를 선택하였습니다. … 그곳은 가톨릭의 나라이며 다른 어떤 가톨릭 나라보다도 성체를 각별히 더 잘 모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나에게 큰 기쁨이 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완덕의 거울 65)

 

그는 또한 지극히 거룩한 성사에 대한 신심에서 프랑스에서 죽기를 원하였다.(2첼라노 201) 성체에 대한 그의 공경과 사랑은 또한 멀거나 가깝거나 이 장엄한 신비와 관련되는 모든 것(즉, 성서 · 교회 성직자·제단·성작 및 성합 그리고 감실 등)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기도 했다. 이제 그토록 열렬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공경에 나타나는 몇 가지 근본적인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실제 현존에 관한 신앙

 

구유 안에서 예수는 아기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을 비우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더욱 작아지셨다. 그러나 제대 위에서 그분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을 낮추시고, 부서지고 연약한 빵의 모습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다. 구유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비록 그분의 신성은 감춰졌지만,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보았다.

 

그러나 제대 위에서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감춰졌으며, 예수는 어떠한 극단적인 사랑으로도 능가할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비우셨다. 이러한 예수의 전적인 자기 비움과 작음 그리고 완벽한 자기비하는 프란치스코의 애정 깊은 심성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6-29)

 

인간이 죄를 짓고 하느님을 떠났을 때에도, 인간을 죄의 그늘에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분의 십자가와 피와 죽음을 통하여 사로잡힌 우리를 구원하기”(인준받지 않은 회칙 23, 3)위해 아드님을 인간이 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를 얻어 주신 이 크나큰 사랑을 매일 미사성제를 통해, 온갖 지혜를 초월하는 겸손으로, 또다시 보여주신다. 프란치스코가 이 사랑의 겸손과 이 겸손의 사랑을 묵상할 때 넋을 잃었고 넘치도록 감사하는 마음을 느꼈다.(2첼라노 201)

 

그는 두려움과 놀라움, 감사와 존경심을 가지고 그 사랑 앞에서 자기 자신을 굴복하고 헷갈림 없는 회개의 생활, 남김 없는 가난의 생활로 응답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말한 짧은 권고와 훈계, 주의사항을 포함하고 있는 28개의 권고 가운데 첫째 권고에서 성인은 예수의 동시대인들이 그분의 인성만을 보았지만, 우리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온전히 숨어 계시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보아야 함을 가르치며, 성변화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하심을 설명한다.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은 단죄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도 단죄받습니다.”(권고 1,8-9)

 

이 구절은 삼위일체의 신비와 성체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이다. 프란치스코는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을 통해서 신적인 것으로 변화되며,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녔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성체를 모심으로써 성령과 함께 참된 하느님이요 참된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체에 대한 현존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표현한다. “사실 우리는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1요한3,14) 구원된 그분의 몸과 피의 이름과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 지상에서 지존하신 그 분을 절대로 모실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3) 여기서 우리가 지상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즉 “성체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구원 역사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개념은 프란치스코의 성체에 관한 아름답고 심오한 신심을 나타낸다. 프란치스코가 구세주라고 말할 때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다. 단순히 과거 팔레스티나의 구세주가 아닌, 복된 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그러한 그리스도이다. 사실, 놀라운 신비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는 지상 생활로만 관조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영광으로 충만한, 살아계시며 생명력을 불어 넣으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성체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프란치스코는 그의 저서에서 “몸과 피”란 용어를 23번이나 언급하고*, “빵과 포도주”는 2번 사용한다.(권고 1,9.21) 미사 후 성체의 보존 방법에 대해서 말할 때도 단순히 “주님의 몸”이라고 하였다.(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1) 이렇듯 성체 성혈에 대한 위대한 신비를 프란치스코가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성체 성사 설정에 관한 말씀에 주의하도록 하려는 성인의 지향을 알 수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14, 22.24)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요한 6,54).”(권고 1,10-1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복된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한다는 사실은 프란치스코의 신앙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신앙은 그 현존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또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 권고 1,9-10; 11,21.21; 인준받지 않은 회칙 20,5; 유언 10;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I 1,4 2,2;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II 6,23.33.63;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3.4;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2.14.16; 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 I 2,4; 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 II 4

 

* 김성학 사무엘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부산 기장성당 주임. [성모기사, 2017년 3월호, 김성학 사무엘]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제사

프란치스코는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하는 것을 바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에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신비 전체,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과 영예를 나타내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평화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미사를 거행할 때 … 거룩하고 깨끗한 지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참다운 제사를 존경심을 가지고 순수한 사람이 되어 순수하게 드리도록 하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2-14)

많은 사람이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너무 자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영혼의 만남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성체 성사와 구속 사업의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구속 사업은 성체 성사 안에서 새롭게 되며 성체 성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성체 성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새롭게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뉘우치고 고백한 다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깊은 겸손과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것입니다.”(인준받지 않은 회칙 20, 5) 성인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 사실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말한다. “모든 근심 걱정을 물리치시고, 또한 그분을 거룩하게 기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지극히 거룩하신 피를 열심히 영하십시오.”(백성의 지도자에게 보내신 편지 6)

프란치스코는 미사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일 뿐만 아니라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는 대제관이시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자들은 이같이 “거룩한 희생물”을 성부께 바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새로운 율법의 대제관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어려움이 거의 없다.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또한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 안에서 희생물이자 제물이셨으며 신자들 또한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로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깨끗한 재물, 거룩한 재물, 티 없는 재물”(성찬기도 1양식)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성체 성사는 죄스러운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영속적인 희생 제사이다. 성체 성사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들과 다시 한번 결합하신다. 왜냐하면 그 분은 당신 사랑의 평화를 그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3)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에서 시작되고 골고타(Golgotha)에서의 그 분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 이제 성체 성사의 거행 안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니, 그것은 하느님과의 화해와 평화이다.


마음과 입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

예수와 함께 행하여진 최후의 만찬은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행하여질, 영원한 기쁨인 예절의 전표이며, 보증이며 예고였다. 복음서에서 하느님과의 친교, 영원한 친교는 가끔 혼인 잔치 등에 비교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준비가 필요하다.(마태 22,1-14) 프란치스코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분별없이 성체를 영하는 것도 잘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십시오, 하물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계약의 피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은총의 성령을 모독한 자는 얼마나 더 나쁜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습니까?’(히브 10,29) 사실 사도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빵을 다른 음식과 구분치 않고 ‘깨닫지 못한다든가’(1코린 11,29), 합당치 못한 사람이 먹는다든가, 아니면 합당해도 먹는 태도가 속없고 불손할 때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멸시하고 더럽히고, 짓밟는 것입니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7-19)

프란치스코는 성체의 식탁에 나아가는데 필요한 규정을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합당한 통회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은총 지위에 있어야 한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II 53) 다음의 조건으로는 지상적인 생각이나 온갖 걱정에서 해방되어 정결한 몸과 깨끗한 마음으로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순수한 사람이 되어 순수하게 미사를 드리는 사람이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4-16) 이러한 사람은 자기추구, 자기애, 자기중심성 없이,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만을 위하여 온전히 자유롭게 된 사람 - 회개(metanoia)하여 온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선 사람 ? 이다.

마음으로 모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말씀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권고 1,12-13)

성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주님의 영”이란 신앙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로서 인간에게 빛, 확신, 길, 사랑, 자극제가 되는 각 사람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여기서 성체 성사로부터 마리아의 모성을 연상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II 53) [성모기사, 2017년 4월호, 김성학 사무엘]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미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형제애와 공동체성

미사 성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류하는 길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분의 지체로서 형제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이자 공동체 일치의 표시이고 근거이므로,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사는 곳마다 제대를 중심으로 모여 매일 미사 한 대만을 바치기를 원하였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II 58)

“형제들이 머무는 곳에서 거룩한 교회의 규범을 따라 하루에 미사 한 대 만을 드리도록 하십시오. 한 곳에 여러 명의 사제가 있을 경우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리에 있거나 없거나 당신께 합당한 사랑을 당신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분은 많은 곳에 계시지만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시고 어떠한 손상도 입지 않으시며, 어디서나 하나이시고, 당신 뜻하시는 대로 주 하느님 아버지와 위로자이신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일하십니다.”(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 30-33)

사제들이 개별적으로 드리는 ‘사적인 미사(Missa Privata)’의 기원은 불행하게도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성 프란치스코 시대에 사제들은 이익 때문에 개별적인 미사를 많이 드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총회에 회람용으로 이 편지를 보냈을 당시, 형제회 안에는 고유의 성당, 고정된 거처, 지역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다수의 사제 형제들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각 사제 형제들이 사적인 미사를 드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로 인하여 몇몇 형제들 사이에 불목해지곤 하는 위기에 처했다. 한편으로는 미사를 많이 드리는 것이 미사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치유할 방안으로 각 공동체 내에 사제 형제가 많이 있다 할지라도 한 사제만이 미사를 드리고, 다른 형제는 미사에 참여하도록 훈계하며 형제회 내에서 가장 중요한 형제적 친교를 강조하였다. 그는 적어도 형제회 안에서만큼은 사제 형제들이 지상의 관심사나 두려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순수한 존경심과 지향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제사를 봉헌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성체에 대한 경멸 행위로 여길 정도로 그리스도의 성체께 지극한 존경심을 가졌고(2첼라노 201), 형제들이 같은 사랑의 원천으로부터 가득 채워지도록 매일 제대 주위에 같이 모이길 열망하였다.

앞의 내용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성체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과 삼위일체에 대한 신심을 엿볼 수 있다. 또 형제들의 공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끈인 형제애의 필요성(참조 : 골로3,14)이 성체의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인이 주장한 신학적이고 영성적인 사상은 당대의 사람들 중에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신심이나 의무 때문에 사제 각자가 개인적으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어디서든지 쉽게 바꿀 수 없는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인의 의향에 따라 공동체마다 매일 한 대의 미사가 바쳐지는 관례는 생기지 않았다. 14세기에 각 사제들의 미사순서를 정하는 것이 공동체의 큰 어려움 중의 하나였음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성모기사, 2017년 5월호, 김성학 사무엘]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사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봄

역사상 그 누구도 프란치스코처럼 사제들을 깊이 존경하며, 그들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 정도로 완전한 신뢰심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리에서조차도 성인은 지극히 감동적인 말로써 성체 성사와 이 장엄한 신비에 봉사하는 사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공경심을 표하였다.

그는 형제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 엄숙한 순간에 레오 형제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케 하였다.

“주님께서 거룩한 로마 교회의 관습에 따라 생활하는 사제들에 대한 큰 신앙심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주시기에 만일 그분들이 나를 학대한다 해도 그분들이 받은 품 때문에 나는 그분들에게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내가 솔로몬이 가졌던 그 정도의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고, 속화된 어떤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 해도 그분들의 뜻을 벗어나 그들이 거주하는 본당에서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들과 또 다른 사제들을 마치 나의 주인인 듯이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그분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분들이 나의 주인이므로 그분들 안에서 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제 자신들도 성체를 영하고 사제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내 육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유언 6-10)

성 프란치스코는 앞의 구절에서 사제가 성체를 영하고 분배하는 기능적인 면을 말하며, 이 안에는 사제의 본질적인 사명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손으로 영하고, 또 다른 이에게 분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임을 내포한다.

성체와의 일치의 삶은 모든 차원을 축복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성직자를 존경해야 하고(권고 26,1), 모든 신학자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영과 생명을 넣어 주는 사람들로서 받들어 존경하라고 한다.(유언 13)

당대의 사회에는 사치와 탐욕, 무절제함, 거룩한 미사에 대한 불손한 태도 등이 팽배해 있어 신자들은 추악한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다. 성직자의 타락은 심했으며,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점을 비판한 일부 종교 개혁 운동가들은 반성직주의(Anticlericalism) 논리를 펼쳐 교회에 반기를 들었다. 이단자들은 사제들의 죄에 대하여 떠벌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성체 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사제이지, 그 사제가 범한 죄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부패된 사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사제를 존경과 신뢰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교회를 옹호하며 교회에 순종하였다. 성체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활 중심이 되었다. 성체에 대해 공경과 경배의 자세를 가졌으며, 귀중한 장소에 모시기를 원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교회에 끼친 중요한 영향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사제들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전하기에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사실 “주님 자신께서 이들을 판단하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만 유보하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권고 26,2)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에 대한 존경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성당에 자주 들르고 성직자들을 존경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비록 그분들이 죄인들이라도 우리는 오직 그분들 때문이 아니라 다만 제대에서 축성하여 자기도 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해주는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에 대한 직책과 봉사직 때문에 말씀과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고 그들만이 이런 봉사를 해야 합니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II 33-35)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고 그들만이 해야 한다’라는 표현은 하느님 은총의 비추임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고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당대 이단적 복음 운동가들의 잘못을 반박하고, 사제에 대한 존경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낸 내용이다.

한편 성인은 많은 성직자가 성체의 거룩한 신비를 소홀히 다루는 것을 마음 아파했기에 이점에 관해서 간곡히 부탁했다. 즉, 성체 성사를 거행할 사제에게는 죄가 없어야 하는 것 외에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낮은 자로서 겸손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성체 성사는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의 비하를 이 지상에서 계속 이어나가는 신비이기 때문에 이 신비에 참여하는 사제는 겸손과 포기를 통해 드러나는 작음이 있어야 한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4, 21-22, 27-29) 사제들에게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공경심을 가지도록 권고할 때이면 그는 신자들이 엿듣지 못하도록 사제들을 개인 방에 모아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신자들 앞에서 사제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완덕의 거울 56) [성모기사, 2017년 6월호, 김성학 사무엘]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주님의 몸을 가장 귀하게 모실 것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의 모습을 취하며, 계속 성체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심을 묵상하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신앙과 사랑의 부족 때문에 성체를 경멸하고 소홀히 다루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며 주님의 몸을 모시는 것을 말할 때, 다른 문헌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귀중한 장소’(유언 11), ‘값진 성작’(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0-11), ‘성체포’(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 I 3-5), ‘값진 제대 장식’(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Ⅰ 3-5)과 같은 표현을 사용해 그 존경심을 드러냈다.

실제로 그는 성녀 글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너무 가난하여 그런 것들을 마련할 여유가 없는 교회들을 위하여 제대포, 제의, 제대물품 등을 만들 것을 명하였다. 극단적인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들에게 모든 지역에, 아름답고 깔끔한 성합을 들려 보내길 원했다. 그들은 주님의 몸이 부당한 방법으로 보관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곳은 어디에서나 그들이 지니고 간 성합 안에 그 성체를 정중하게 모셔야만 했다.(완덕의 거울 65)

또한 종종 그가 제대포를 빨고, 예술적으로 조각된 철판에 제병을 굽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는 이 철판들을 여러 관구에 보냈고, 따라서 형제들이 아름다운 순백의 제병들을 어디서나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여행 중에 교회를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빗자루를 들고 하느님의 집을 겸손되이 헌신적으로 청소하였다. 그리하여 주님은 거기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예와 공경 중에 머무르실 수 있었다.(완덕의 거울 56)

이와 같이 복되신 성사에 대한 그의 불타는 사랑 앞에서는, 그가 일생을 통하여 신의(信義)를 지키고자 했던 가난에 대한 사랑조차도 길을 내어 주어야 했다. 이는 코르토나 부근의 한 수도원 성당의 다른 모든 것이 완벽한 가난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감실의 문만은 순금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그의 성체께 대한 공경심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당에 감실이 생기기 시작한 것에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성체 공경에 대한 신심의 영향이 지대했다. 성인은 당대 교회법상의 규정을 지키도록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와 “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에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두 편지에서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는 “성체를 가장 귀한 곳에 보존해야 한다”는 말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법규에 부합하는 것이며, “성체를 귀중한 곳에 모셔 자물쇠를 채우라”(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1)는 당부는 13세기에 각 교회 안에 퍼진 성체 보존을 위한 “감실(Tabernaculum)”의 기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프란치스코 이전에는 축성된 성체를 장롱이나 혹은 지저분하고 초라한 성당 안에 보존하거나, 아니면 지붕으로부터 끈이나 쇠사슬로 매단 금속으로 된 비둘기 모양의 보관함에 보존했기에 성체가 자주 훼손되었다.

또한 이 편지에서, 환자들에게 모셔가는 ‘노자성체’에 대한 호노리오 교황 3세의 규정을 잘 지킬 것을 권하고 있다. “공경심을 다해 성체를 옮기고 신중히 영해 주어야 합니다. … 사제가 성체를 다른 곳으로 모실 때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살아계시고 진실하신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영예를 드려야 합니다.”(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 I 4,7) 프란치스코의 이 권고 말씀은 약 20여 년 뒤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성체거동’이라는 전례 예식을 도입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성모기사, 2017년 7월호, 김성학 사무엘]

 

 

프란치스코 성체 공경의 근본 사상

 

 

그동안 성 프란치스코가 성체에 관해서 가졌던 근본적인 이상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에 관한 가르침이나 실천은 아주 새로운 관점이나 혁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다만 교황이나 공의회 혹은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과 이름까지 공경해야 함을 말한다.

둘째로,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성체는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며 계속된 그리스도의 수난과 파스카 사건을 재현한다. 성체 공경은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다 포괄하는 예수께 대한 사랑의 길잡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더욱 작아지려는 마음가짐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형제임이 미사성제를 통하여 분명히 나타난다.

셋째로, 저서에서 그는 성체의 신비가 매일 새롭게 재현되는 구원 역사의 비전임을 보여준다. 성체에 대한 성인의 신심은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거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격을 띠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성체성사 거행은 단지 예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지극히 실존적인 생생한 만남을 통한 체험의 과정이었다. 그분의 이름과 기록된 말씀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육화의 계시가 성체 안에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넷째로, 성 프란치스코는 성체를 통하여 교회 안에 항구히 그리고 생생히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신비를, 위로부터 오는 은총의 비추임과 신앙의 체험을 통해 확고히 믿었고, 이를 주변의 이웃과 형제들에게 전하였다.

다섯째로, 미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신앙생활의 정점이며, 또한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원천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성체를 작은 형제들의 공동생활에서 형제들이 일치할 수 있는 사랑의 끈으로 보고, 작은 형제들의 사도적 활동의 중심이며 생명의 원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인은 우리 삶의 존재와 의미의 중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인의 성체 공경은 성직자들과 거룩한 물건, 말씀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포함한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신앙과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외적인 표시는 신앙 자체에 효과적이고 생생한 뒷받침이 될 수 있다. [성모기사, 2017년 8월호, 김성학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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