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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4: 7개월 만에 왕 요셉을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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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1 ㅣ No.932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4) 7개월 만에 왕 요셉을 다시 만나


조선 신자들은 손꼽아 기다리는데 주교의 조선행은 더뎌지고

 

 

-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헤어진 지 7개월 만에 복사 왕 요셉을 소주에서 만났다. 사진은 운하가 잘 개발된 소주의 모습.

 

 

브뤼기에르 주교는 복건대목구장 카프레나 디아스 주교의 도움을 받아 우선 남경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에 무라(Castro e Mourq, 1804~1868, 포르투갈 라자로회 출신) 신부에게 안내인과 여행상의 편의를 도움받아 절강성, 강소성, 산동성, 직예, 북경을 거쳐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물거품이 됐다. 복안에 머무는 동안 모방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경교구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1833년 3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또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르 신부는 3월 29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안내인을 남경으로 데려오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기면 총대리의 권한으로 안내인을 배에 억류해 상륙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공식 통보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떠날 때 복사 왕 요셉을 북경에 먼저 떠나 보냈다.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에 오는 조선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주교는 마카오에서 ‘아중’이라는 임시 안내인을 고용했었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아중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네 선교 활동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아중이 너무 말이 많고 거칠며 정직하지 않다고 비난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자들의 이 말들을 다 믿진 않았지만 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별수 없이 아중을 해고해야만 했다. 결국, 주교는 동료 선교사도 안내인도 없이 혼자서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4월 23일 복건대목구장 디아스 주교의 추천서를 들고 남경을 향했다. 4월 27일 주교는 마카오에서 복안까지 타고 왔던 그 배를 이용해 복안 항을 떠났다. 배는 짙은 안개를 헤치며 연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해 5월 12일 절강성 북부 히아푸(Hia pou)에 닿았다. 주교는 이곳이 일본으로 가는 중국 배들이 정박하는 포구라고 했다. 히아푸는 브뤼기에르 주교뿐 아니라 모방ㆍ샤스탕 신부도 조선 입국을 위해 기착했던 포구이다. 브뤼기에르 주교 연구의 권위자인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히아푸를 절강성 가흥부(嘉興府) 평호현(平湖縣)에 있던 사포(乍浦)일 것으로 추정한다. 사포는 18세기 중반부터 중국과 일본과의 핵심 교역항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왕 요셉을 소주에서 다시 만났다. 사진은 한 낚시꾼이 소주 운하에서 여유롭게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히아푸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강남 제일 남쪽에 있는 도시 중 하나인 샹난푸(Chang nan fou)로 갔다. 당시 선교사들은 오늘날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를 ‘강남’으로 불렀다. 그런데 강남 남쪽 지역에 샹난푸라고 발음되는 도시가 없다. 대신 남경 인근에 ‘상주부’(常州府)라는 도시가 있다. 하지만 샹난푸가 상주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여하튼 브뤼기에르 주교는 히아푸에서 배를 갈아탄 후 운하를 이용해 여행을 계속했다. 어떤 때는 약방 주인 교우 집에 머물기도 했고, 5월 15일 새벽에는 소성당이 있는 한 농가에서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도 집전했다. 아마도 이곳이 브뤼기에르 주교가 말한, 상주부로 추정되는 샹난푸가 아닐까 추정한다. 

 

5월 18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에서 북경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보내온 편지였다. 편지에는 “조선 신자들이 주교를 모시게 돼 기쁨이 절정에 달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몇 해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가 바라던 이상으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선교사 한 분을 요청했는데, 이렇게 하늘에서는 우리에게 여러 선교사님과 주교님 한 분을 보내 주십니다”라고 외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같은 날 저녁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르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찾아왔다. 주교는 총대리 신부에게 “안내원 한 명을 구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카스트르 신부는 주교의 청을 다음과 같이 거절했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안내원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저는 산동(山東)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짐을 그 지방으로 부쳤습니다만 저와 동행하려는 사람을 하나도 구할 수가 없군요. 그래서 직예(直隸)에 있는 안내인 한 명을 불러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그를 북경교구 총대리로 임명해 산동에서 사목할 것을 명했으나 안내원을 구하지 못해 1833년 11월 2일이 되어서야 임지로 떠날 수 있었다. 이후 카스트르 신부는 1838년 북경교구장 서리로 임명됐고, 1841년 2월 포르투갈 왕은 그를 북경교구장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교황청 포교성성은 그를 클라우디오폴리스 명의 주교이며 직예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포교성성이 북경교구에 대한 포르투갈 보호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듣자 카스트로 주교는 교황청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북경교구 총대리 자격으로 계속해서 북경교구장 서리직을 수행하다 1847년 6월 마카오로 돌아갔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교구 총대리 신부로부터 길 안내자를 구할 도움을 받지 못하자 북경에 있는 왕 요셉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주교와 그의 복사 왕 요셉은 6월 26일 강남에서 극적인 상봉을 했다. 1832년 11월 23일 마카오에서 헤어진 지 7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왕 요셉은 이곳이 소주(蘇州)라고 그의 편지에서 정확히 밝히고 있다. 왕 요셉은 남경교구장 주교가 쓴 몇 통의 편지를 들고 왔다. 그 편지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공급해 줄 것과 만주까지 갈 수 있도록 안내인을 구해 주라”는 명령이 들어 있었다.

 

 

알아보기

 

포교성성 = 지금의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명의 주교 = 주교로 서품되었으나 특정 교구를 교구장으로 책임지지 않는 주교. 그가 대주교일 때는 ‘명의 대주교’라 부른다. 보좌주교, 교황청 각 부서의 직책에 종사하는 주교 등이 명의 주교로 임명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1일, 글 · 사진=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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